토로스 & 토르소
크레이그 맥도널드 지음, 황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토르소. 몸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와 이제는 몸통만을 만든 미술작품을 지칭하고 있는 단어이다. 얼굴도 팔다리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몸통 조각. 부자연스러운 모습. 그 이상한 모습 속에서도 어떤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때로는 기괴함 자체가 곧 토르소의 미(美)처럼 보이기도 한다.『토로스&토르소』는 그런 섬뜩한 아름다움, 예술이 가져올 수 있는 잔혹한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띠지에 써 있는 '누군가가 죽어야 예술이 된다'라는 문구가 그 이야기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초현실주의 살인사건


헥터 라시터는 '자신의 소설 같은 인생을 사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범죄소설 작가이다. 그가 쓰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사건들을 현실에서 접하기 때문이다. 이 토로스 토르소도 그가 겪은 사건으로, 1935년에서부터 1961년에 이르는 긴 세월을 담고 있다. 하나의 이어진 사건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네 개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 1935년의 키웨스트, 1937년의 스페인, 1947년의 헐리우드, 1959년의 쿠바. 이 아무 연관 없어보이는 장소들은 '살인 사건'이라는 한 주제로 모인다. 어디에서든 저명한 소설가인 헥터는 역시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사귀다가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범죄소설가들만 그런 짓을 하지. 자기 소설 같은 인생을 사는 남자만이 말이야."

헥터는 자신에게 붙은 이 타이틀이 자꾸 퍼지는 것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홍보 담당이 광고를 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 생긴 타이틀인가?

-361쪽



일반적인 살인사건이라면 자신의 소설 같은 인생을 사는 헥터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범한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초현실주의 살인사건'이다.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들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살인사건으로 살인은 그 그림들을 모방하는 모습을 띈다. 여자의 내장을 빼내고 톱니바퀴로 가득 채워 놓는다거나, 머리만 없애둔다거나... 키웨스트에서 헥터가 유혹해서 사랑을 나누던 여인, 레이첼마저 그렇게 죽어버린다. 그리하여 수십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헥터는 사건의 그림자를 이고 가게 된다. 새로운 사건에 남겨진 그 전 사건의 흔적을 좇으며 진실을 서서히 밝혀간다. 




제 2의 주인공 헤밍웨이


반전은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예술가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참 흥미롭다. 그 시대의 유명인사들이 얼굴을 들이민다. 가장 비중이 큰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물론이고, 스쳐지나가는 조지 오웰, 사건에 협력하는 리타 헤이워드까지. 특히 헤밍웨이는 헥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나오면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이야기에서 사건을 걷어내면, 헤밍웨이만 남을 것처럼. 그 유명한 거장의 사생활과 행동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살인 사건이나 범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이야기고 그 중심에 헤밍웨이가 있으니까. 헤밍웨이는 제 2의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헥터가 탑승구 쪽으로 걷기 시작하더니 어깨 너머로 뒤돌아서며 소리쳤다. 

"헤밍스타인! 하나의 진실한 문장! 최고의 친구는……."

헤밍웨이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어느 날 혼자 남는다."

469쪽




"검음색 바탕을 배경으로 한 여자의 누드 상반신이에요. 배꼽에서부터 어깨까지가 널찍하게 찍혀있죠. 

머리는 그림자 속에 가라앉아서 전혀 보이지 않아요. 팔은 이런 모양으로 들려있었죠."

레이첼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보였다.

"마치 뿔 같은 모양으로요. 미노타우로스의 뿔이오. 아시겠어요? 모델의 가슴이 황소의 눈이고, 

아주 마른 모델이라 배의 푹 꺼진 부분이 황소의 코와 주둥이가 되죠. 

만 레이는 그림자와 편집을 이용해서 여자의 벗은 몸을 미노타우로스의 머리처럼 표현해낸 거예요."

-94쪽.



미노타우르스


황소가 죽는 걸로 끝이 정해져있는 투우처럼 그렇게 정해진 끝을 향해 가는 미궁 탐험. 초현실주의자들이 설계한 미궁 속에서 과연 무엇을 찾거나 나올 수 있었을까. 헥터는 미노타우르스의 미궁 속을 총 한 자루 들고 헤멘다. 그가 미노타우르스일지, 아니면 미궁을 헤매는 테세우스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주치는 것에 칼을 꽂아야한다. 안 꽂으면? 글쎄. 어쨌든 그는 미노타우르스가 만든 예술을 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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