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지음, 최인자 옮김, 제인 오스틴 / 해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오만과 편견. 모르는 사람 없다. 다아시는 로맨스 코미디 남자 주인공의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고, 리지 또한 마찬가지로 모범적인 여자 주인공 아니겠는가. 오만과 편견에는 고전적인 예법, 아름다운 의상, 오해, 편견, 역경을 딛고 이루어낸 사랑이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역.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그런데 역병이 그 성역을 침범했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이야기다.

 


 


 




리지는 좀비와 싸워요. 


제인 오스틴 시대의 영국에 55년 간 이상한 역병이 돌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 역병은 감염자를 서서히 죽여가며 살아있는 시체로 만든다. 시체가 된 이들은 이성을 잃고 사람들을 죽여서 먹게 된다. 그렇다. 이 역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좀비와 비슷하다. 그렇다. 좀비.  오만과 편견은 좀비물이었다.


베넷 씨는 딸들의 안전에 상당히 신경 쓴다. 그는 좀비들 사이에서 딸들이 살아남게 하기 위해 전사로서 훈련을 시킨다. 중국 소림사의 리우 사부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기도 하고, 끝없이 수련을 멈추지 않는 베넷가의 숙녀들은 이미 노련한 전사이자 죽음의 신부이다. 그 중에서도 둘째 딸 리지는 최고의 전사. 전사의 법도에 따라 살고 죽는는 잔혹한 전사다.

 

손님들이 사방으로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을 때, 베넷 씨의 목소리가 이 소란을 뚫고 들려왔다.

"딸들아! 죽음의 팬터그램을!"

엘리자베스는 즉시 제인, 메리, 캐서린, 리디아와 함께 무도회장 가운데로 모였다. 아가씨들은 제각기 발목에서 단검을 꺼냈고, 보이지 않는 별의 다섯 꼭짓점 위에 우뚝 섰다. 그들은 방의 한가운데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전진했다. 아가씨들은 한 손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잘록한 허리 위에 얌전하게 올려놓았다. 

-p.16



좀비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네버필드 저택에 빙리 씨와 다아시 씨가 오게 된다. 다아시는 처음에 리지를 경멸하지만 그녀의 전사다운 몸놀림과 형형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에 반해버린다. 그리고 역병과의 싸움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 이름 사랑. 죽음의 신부가 다아시의 신부가 되어간다.




 




원작의 철저한 변용.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원작을 철저하게 가져오고 있다. 문장 하나하나가 원작의 것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렇기에 원작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다만 원작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내가 원작을 읽고 있는 건지, 아니면 좀비물이 된 오만과 편견을 읽고 있는 건지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라는 것. 단어 수준의 변형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보지 않으면 어디가 바뀌었는지 잘 모르게 된다. 바뀐 단어들은 물론 현대적인 이야기처럼 때론 노골적이고 때론 패러디 같기도 하지만 오만과 편견의 분위기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오만과 편견이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완전히 좀비물로 바꾸는 데는 성공한 듯 싶다. 좀비가 나오는 장면들은 어쩔 수 없이 원작에서 엇나가기도 하며(하지만 잠시 뿐) 때로는 지나치게 잔인하기도 하다. 원서에는 삽화가 있는데, 참 어울리면서도 그로테스크해서 안 실은 게 다행이다 싶다. 이 이야기에서는 특히 그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캐릭터가 큰 변화를 맞이하지 않았나 싶은데, '나의 리지는 이렇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이걸 읽는 동안 키이라 나이틀리가 카타나를 휘두르고 닌자를 죽인 후에 심장을 씹어먹는 걸 상상하려고 노력했는데... 안 된다. 안 돼. 




 

 


 



오리엔탈리즘?


소설을 읽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베넷가 숙녀들은 중국에서 수련했고, 캐서린 드 버그 영부인은 닌자들을 호위로 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국과 일본은 흔히 말하는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보다 더 야만적이고 미개하고 그러면서도 신비로운 그런 분위기로 묘사된다. 야만성도 무술도 잔혹함도. 좀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결과 만들어진 태도가 아니라 동양에서 수련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게 만들고 있다. 기분 나빠. 그리고 듣기로는 살상용으로는 일본도나 검술보다 서구 검술이 더 유용하다던데. 

 

엘리자베스는 무시무시한 일격을 가해 닌자의 늑골에 구멍을 냈다. 그녀가 손을 꺼냈을 때에는 여전히 펄떡거리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캐서린 영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몸서리를 치며 뒤로 돌아섰다. 엘리자베스가 심장을 한 입 깨물자, 시뻘건 피가 그녀의 턱을 따라 대련복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엘리자베스가 심장을 씹으며 말했다.

"거참, 흥미롭군요. 수많은 사람의 심장을 먹어보았지만, 일본인의 심장이 좀 더 부드러워요."

-p.169


 


잘 바꿨지만 거기까지.


설정이 참 흥미롭기는 했다. 원작을 저 어딘가 멀리 두고 와서 직접 비교하며 볼 수 없었던 게 아쉽다. 첫 문장부터 폭소하며 봤다는 분도 계셨지만 웃음 코드란 참 어려운 것이라... 나도 초반에는 키득거리며 봤지만 약간의 변형만이 끝까지 지속되다 보니 초반의 흥미로움은 중반부부터 그냥 끝나버렸다. 설정의 흥미로움을 그것만으로 끝내버렸달까. 좀비로 패러디를 하든 말든 원작과 그리 다를 건 없으니 초중반부터는 앞으로의 이야기가 전혀 궁금해지지 않았다. 


어쨌든 기대치에 못 미쳤던 소설이었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즐기기 힘들 것 같고, 또 유머 코드가 맞지 않는다면 역시 별다른 재미도 없겠고, 초반의 흥미가 끝까지 지속되기도 어렵다. 일반적인 액션 스릴러같은 속도감 있는 이야기도 되지 않고, 완전히 고전적이고 로맨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섭지도 않고, 동양의 무술만이 불편한 그저 그런 이야기였다. 



오만과 편견을 좀비물로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지만 거기까지. 정말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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