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의 신
린지 페이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이제까지 내가 읽거나 본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서 미국은 언제나 자유와 기회의 땅이었다. 망쳐진 명성을 회복하고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사랑의 꽃 피우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위해 많은 유럽인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것이 행복의 보증수표라도 되는 양.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하는 국가만 달라진다 뿐이지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유럽인들.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은 꿈을 이루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까?






1845년, 뉴욕. 고담시


『고담의 신』은 19세기, 정확히는 1845년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북전쟁도 일어나기 전이다. 뉴욕은 수많은 범죄와 악행이 벌어지는 도시였다. 배트맨의 도시로만 생각했던 고담은 그런 뉴욕의 별명. 수많은 이들이 이민을 온 미국 안에서도 어느 나라에서 이민을 왔느냐에 따라 차별이 심해지고, 종교탄압도 지속된다. 그런 뉴욕에서 다른 중요한 도시들에 비해 뒤늦게 경찰국이 탄생하고, 화재로 직장을 잃어버린 티머시 와일드는 형 밸런타인의 영향으로 신생 경찰국의 경찰이 된다. 그리고 뉴욕 인근에서 아동을 십자로 벤 잔인한 살인이 벌어지고, 티머시는 그 살인을 수사하게 된다.


"나머지는 알다시피 범죄를 예방하지. 순찰경관, 그리고 지서장들도. 하지만 범죄를 예방하는 것은 일단 벌어진 범죄를 해결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야. 그게 자네의 자리가 아닌가 나는 생각하네, 와일드군. 사실이 벌어진 후에 해결하는 것. 아무나 그런 일을 시도할 수는 없다는 건 알겠지. 그러니 맹세코,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수수께끼를 푸는 것, 그리고 그걸 나에게, 오직 나에게만 보고하는 것."

-249쪽



인상적이었다. 린지 페이의 문장은 섬세하고 묘사는 곳곳을 훑어내린다. 캐릭터도 잘 살아있었다.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번역 문장이 군데군데서 튀어나왔다. 한창 집중하다가 그런 문장이 나올 때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 외에는 별 다른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 지루했다는 평도 봤는데, 나는 오히려 상세한 묘사와 곁가지의 자잘한 에피소드를 반기는 취향이라 오히려 더 재미있게 본 듯하다. 내가 소설은 어지간해서는 지루해하지 않기도 하고.





추리보다는 티머시가 더 좋았다. 


무엇보다 이 시기 뉴욕. 19세기잖은가. 나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도시가 달라졌지만 시기는 비슷하니까 역시 취향이다. 사건의 진상보다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에 벌어진 사건들이 재미있었다. 일종의 코지 미스터리적 재미? 물론 그처럼 코지하지는 않지만. 경찰이 처음 만들어졌는데 생각보다 그래도 잘 운영되네 싶기도 했고 말이다. 수사 보다는 티머시의 로맨스와 형과의 갈등이 더 흥미로웠다. 범인보다는, 그 추리 직전에 있었던 머시와의 사건, 밸런타인과의 사건이 더 큰 충격을 가져다줬고 말이다. 아, 독자들은 티머시가 정육점 종이에 써가면서 추리할 때 같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서는 독자에게도 다 주어졌으니까.




어디에도 평화는 없었다.


고담이었다. 배트맨의 도시. 악의 소굴. 뉴욕이 바로 그 고담이었다.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런던을 꿈꿨다. 런던 사람은 자유를 위해 뉴욕으로, 뉴욕사람은 자유를 위해 런던으로. 그러나 어디든 갈등은 존재했다.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로, 인종으로 차별당하는 게 당연하던 그 시대, 그 땅. 바로 뉴욕. 그 곳에서는 배트맨, 아니, 티머시 같은 경찰이 필요했다. 


"나아질 거야." 나는 약속했다. 그저 그게 사실이길 바라면서. "이 일에서 멀어질수록 더 나아지고 또 나아질 거야."

"멀어진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너나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일들, 우리를 아프게 하거나 더럽히는 일들에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냥 계속 걸어가는 거야. 뉴욕에서는 그 어떤 것도 깨끗하지 않아."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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