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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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캄보디아로 갔던 가족여행. 그곳에서 진짜 해골을 봤다. 어렸기에 무슨 역사가 있었는지도 몰라 가짜처럼만 보이던 그 해골들. 그럼에도 인상적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다. 쌓여있는 두개골에는 총살로 난 구멍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킬링 필드라는 끔찍한 제노사이드로 죽어간 사람들의 해골이 캄보디아 전역 곳곳에 탑으로 보존되어 있다던 가이드의 설명이 생생하다. 킬링 필드만이 아니다. 인간이란 종의 동족 대학살은 수없이 자행되어 왔고 지금 어딘가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제노사이드. 대량학살


제노사이드. 인간의 광기. 생존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어찌할 수 없는 원죄인가. 제노사이드를 하는 생물은 인간 뿐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지만, 사실 진짜 그런 것은 아니란다. 『제노사이드』에서도 잠시 나왔지만 침팬지도 동족 살해를 자행하고, 그 수법은 꽤나 잔인하기도 하다. 나는 침팬지의 제노사이드를 『다니』라는 소설을 통해 먼저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소설에서도 침팬지들의 전쟁이 인간의 학살과 겹쳐 보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동족 대학살의 대표주자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인가보다. 


예거는 울컥했지만 화를 참았다. 다른 인종을 때리는 것에 저항감이 있었다. 게다가 믹이 왜 유인원을 쏘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린 원숭이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대장 원숭이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실제로는 그 어느 것도 아니라 하등동물에 무력을 과시하며 비열한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한 것일지도 몰랐다.  -p.205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는 새로운 종의 탄생과 그 종을 말살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호모 사피엔스. 이 인류가 이렇게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폭력성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뭣보다 그 최정점에 선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라니 뭐랄까 사실 같으면서 통쾌했다. 낄낄.






잘 짜인 구성, 전문적인 깊이까지.


꽤 긴 이야기였음에도 이야기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느슨해지지 않으며, 조금 느슨해진다 싶을 때는 곧바로 고삐를 조인다. 이야기는 진행될 수록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상을 그려낸다. 단 두 사람의 시선에서 시작해 민족과 국가로 발전한 후 종국에는 인류라는 종에 대한 고찰을 하게 한다. 또한 제노사이드는 이야기의 규모가 갈 수록 커지던 것과는 반대로 하나의 개체에 얽혀있으며, 유전자라는 굉장히 작은 영역까지 세세하게 신경쓰고 있다. 


작가는 진화라는 영역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굉장히 전문적인 과학지식들을 끌어온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언급되는 리간드와 수용체, 거울 구성체 등의 전문 용어들은 생소하다. 난해하다. 그러나 작가는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실제 과학 서적에서는 얼마나 더 어려울지 생각해본다면 이 정도는 양호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고 과학적 설명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것에 불과하다. 독자가 이 전문지식에 굳이 얽매일 필요도 없다. 물론 이런 과학 지식을 통해 글에 깊이가 더해진 건 사실이지만 애써 이해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그저 번역이 힘들었겠다 싶었을 뿐이다.


  겐토는 자기 어머니가 문득 떠올랐다. 분명코 이 강인한 면은 말이나 종교나 인종을 넘어선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 선(善)이리라. 겐토는 먼 나라에 있는 용감한 어머니에게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예거 씨."

  겐토는 하늘에 대고 전화 상대에게 들키지 않게 작게 신음했다. 그 후의 각오를 정하고 인생 최대의 도박이 될 말을 꺼냈다. 

  "제가 약속합니다. 반드시 당신의 아이를 구하겠습니다"

-p.349




한국? 일본? 중요한가?


한국학생 정훈이 나오고, 일본 작가가 쓴 소설에서 일본의 제노사이드 행태가 나온다는 점에서 일본 우익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들었다. 근데 그냥 언급되는 수준인 왜 과민반응일까 싶었다. 인종, 국가 등의 이유로 타자를 배제하기 때문인가? 일본인인 믹이 좀 비열하게 나오기는 했으나 그 반대선상에서 겐토라는 존재도 있는데 말이다. 국적이 한국이고 일본이라는 그게 그렇게 중요했던 건지. 소설에서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걸 넘어선 화합인데 말이다.


한신 대지진 때는 재일 한국인과 재일 조선인, 일본인이 서로 도왔다고 겐토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 올 손님이 부디 일본인을 원망하지는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선조가 어리석으면 후손이 고생하기 마련이었다. -p.171







종의 진화. (아래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신인류에 대한 이야기는 SF에서 많이 다루어진 영역이기도 한데, 그것을 이런 식으로 풀어나간 데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신인류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신인류의 탄생으로 인한 인간이라는 종의 반응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신인류는 이제 막 태어난 시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이들인지도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럴 것이라고 하는 추측형 시나리오만 소설 내에 무수할 뿐. 물론 그들이 실제로 보이는 능력은 있지만 호모사피엔스인 나로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신인류에 대한 SF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는데 개인적으로 떠오른 작품은 올라프 스태플든의 『이상한 존』. 어느 신인류나 마찬가지겠지만 극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존과 아카리가 계속 겹쳐보였다. 말을 배우는 게 느리고, 얼굴이 크고, 고양이 눈같다는 점 또한. 하이즈먼 리포트에 기록된 대로 만약 제노사이드의 신인류가 제6감을 가지고 있다면 아키리와 존은 더 가까워지겠지. 이상한 존에서도 신인류는 척결되었는데, 이런 제노사이드, 신인류에 대한 배제와 척결은 아무래도 DNA에 각인된 어쩔 수 없는 본능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단한 소설


대단한 소설이었다. 재미라는 점도 좋았고, 치밀한 구성도 멋있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대단한 것은, 인간의 존재와 그 폭력성을 드러내보이며, 우리 존재를 고찰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진화라는 게 반드시 진보, 진일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앞으로의 한발, 또 다른 변화를 기대하게 하는 것은, 그럼에도 내가 호모 사피엔스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아무 담보물도 없이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구하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의 플랫폼에서 떨어지는 외국인을 구조하거나 아니면 목숨 걸고 신약 개발에 뛰어든다던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극히 소수 아닌가. 그것도 일종의 진화한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구태여 누스를 만나러 가지 않아도 그런 사람과 길에서 지나쳤을 수도 있겠군." 

-p.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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