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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달
하지은 지음 / 드림노블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지은 작가의 신작 『녹슨달』이 나왔다. 『얼음나무 숲』에 이은 예술가들의 이야기이다. 얼나숲이 천재 음악가들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천재 화가들이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파도 조르디는 어릴 적 화가가 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재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인 건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누를 수 없던 탓인지 결국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라잔 공방에서 도제로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인생을 바꿀 여인도 둘이나 만나게 된다.
파도의 인간관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레오나드, 백리, 시세로, 마로로 이어지는 화가군과 사라사, 블레이젝, 이데아, 뒤벨 자작으로 이어지는 애정라인이다. 화가로서의 파도, 인간(남자?)으로서의 파도이다. 이야기도 둘이 동시에 진행되어 시세로, 레오나드의 과거이야기가 흘러나오고, 파도는 또 한 켠에서 자신의 사랑 때문에 몸부림 친다. 그러나 그 어느 길도 쉽지 않다. 예술도 사랑도. '괴로움이 나를 끝내기 전에 내가 먼저 괴로움을 끝내'겠다는 파도의 결심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끊임 없이 괴로워하면서도 화폭을 마주하는 화가의 모습은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다.
여기에 나오는 화가들은 자신감과 자존심, 오만함을 두루 갖췄다. 예술가답다. 자신이 원하고 믿는 바를 그린다. 파도처럼 재능을 가지고도 주위 상황에 흔들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레오나드처럼 과거 때문에 모든 걸 버린 경우도 있다. 시세로처럼 그 드높은 자존심을 재수없고 오만한 태도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흔들림이 없었던 시세로가 가장 멋졌다면, 레오나드는 인간적이었고, 파도는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스승 벡리는... 위대했으나 슬펐다. 세 제자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하지은 작가는 원래도 판타지로서의 환상성이 옅었던 작품을 써왔지만, 이번에는 이야기 자체에서 판타지가 전혀 없다. 배경은 가상공간이지만 이야기 자체에서는 그 어떤 신비도 기적도 전설도 없이 오직 인간만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환상문학으로 분류하기가 좀 미묘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를 기대한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원래 하지은 작가의 소설이 판타지의 색이 옅었던 만큼 낯설지 않고 도리어 편하다. 특히 군데군데서 얼음나무 숲과 겹치는 배경이라는 게 드러나기에 얼나숲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