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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그림 - 민화에서 복제화까지
박석우 / 동연출판사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에피소드 하나. 어릴 적 집 근처의 백화점 층계참에는 이름모를 화가들의 그림들이 항상 전시되어 있었다. 대개 물레방아 도는 시골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었는데 어린 맘에도 서정성을 극대화한 그 그림들이 썩 맘에 들지 않았었다. 내가 뭐 특별한 심미안을 갖고 있어서는 아니고, 그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게 이유의 전부이다. 좀더 설명한다면, 작품 하나하나의 독특함이 결여되어 있어 서너 작품만 봐도 금새 질려버린 것쯤이라고 할까.
에피소드 둘. 고등학교 축제 때 시화전이 열렸다. 정성들여 만든 친구들의 작품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작품들이 이발소 그림 같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에피소드 셋. 대학 때의 내 전공은 디자인이다. 그 중 일러스트레이션 교수는 한 작품을 만들 때마다 학생의 독창성보단 자신의 고정된 스타일을 요구했는데-배경의 그라데이션 처리와 아름다운 꽃의 등장은 필수 요소였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엔 항상 야릇한 무릉도원이 표현되어 있었다. 혹시 그 교수는 제자들을 이발소 그림의 대가로 키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이발소 그림계의 대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토록 싫어하던 이발소 그림을 그만 내 손으로 그리고 만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찌 이발소 그림에 대해 조악하다고 비판만 할 것인가. 식당이나 액자 가게에 진열된 그림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화가의 노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발소 그림>은 근, 현대의 대중미술을 정리한 책이다. 이발소 그림의 유래에서부터 일상 속 갖가지 이발소 그림의 유형, 대중미술 작가와의 인터뷰까지 이발소 그림에 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있다. 저자의 글에는 이발소 그림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어릴 적의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전원풍경의 사진에 대한 추억이며 직접 삼각지나 동두천 등의 이발소 그림 작가들을 찾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생활미술의 소중함을 잘 아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몇 가지 부분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다. EBS에서 방영했던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에 대해 저자는 틀에 박힌 색채와 구도, 개성이 무시되고 나무, 산 등 비슷한 소재에 자연대상에 대한 관찰은커녕 사진조차 보지 않고 그려 마치 기계가 그린 것 같으며 이국적인 이미지를 그린다는 혹평을 했다. 어라, 이건 바로 저자가 사랑하는 이발소 그림의 특징이 아니던가? 하나의 그림에 사계절이 담겨있으며 초가집에 흐르는 시냇물과 몇 마리의 닭들이 노는 비슷한 소재로 일관한 것이 이발소 그림의 특징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이국적인 이미지를 그린 것이 불만이라면 서양의 명화들도 결코 좋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단 얘기인지? 이발소 그림 작가를 밥 로스 대신 출연시켰다면 좋았겠다는 바람을 뒷받침하기에는 논리가 맞지 않는다. 이발소 그림의 쫑쫑이 기법을 인정한다면 밥 로스의 덧칠 기법도 인정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자는 이발소 그림이 키치로 분류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이발소 그림과 키치와의 연관성을 비교적 상세히 서술했는데, 이발소 그림은 키치와 비슷하지만 키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속하고 싸구려인 것을 키치의 큰 요소로 꼽았지만 글쎄, 이젠 키치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네오키치 시대이다. 생활 속에서 키치와 키치가 아닌 것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키치는 우리 일상 그 자체인데 하물며 키치적인 요소로 가득찬 이발소 그림이야… 키치냐 아니냐의 문제를 논하기보단 이발소 그림이 우리 생활의 어떤 면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하는지에 대한 고찰에 지면을 할애했더라면 더 호감가는 책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장점이 많다. 명화만을 그림으로 알던 이들에게는 미술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열게 해주는 자극제가 될 것이며, 잊혀져 가는 분야의 장인을 만나는 기회도 선사해주니 말이다. 이런 대중미술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네 사는 향내를 맡을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