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간 예수
송기원 지음 / 창비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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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송기원의 '인도로 간 예수'안에는 일곱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도로 간 예수] [사람의 향기] [아름다운 얼굴] [늙은 창녀의 노래] [수선화를 찾아서] [새로 온 사람들] [잡풀]

[인도로 간 예수]를 읽으며 끊임없이 들던 의문.. 왜 제목이 인도로 간 예수 일까? 지나친 은유는 가끔 거부감을 주곤 하지요. 단전호흡을 통한 자아찾기에 관한 내용인데 유난히 제목이 겉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아마도 이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단전호흡을 경험했거나, 경험자의 이야기를 모델로 삼았겠지요. '성명쌍수'의 논리에 관해서는.. 참선을 주축으로 하는 불가입장에서 본다면 반론을 제시할 충분한 재료도 되겠구요, 여하튼 재미있는 소설이네요. 해탈, 신선, 도... 이런것들, 인간에게 가장 큰 관심이며 욕구일수 있으니까요.

*성명쌍수란 간단하게 설명하면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다는 말이요, 그러나 이 간단한 말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요 여기서 성(性)이란 자기 자신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자 생명의 근원인 어떤 자유를 가리키는 말로 바로 수행의 요체가 되지요. 또 명(命)이란 글자 그대로 생명을 뜻하는데 성이 정신의 수행이라면 이 명은 육체의 수행으로 바로 호흡법을 일컫지요. 만일 이 성과 명 둘 중에 어느 하나만 치우쳐 닦는다면 그건 단전호흡이라 할수가 없는 거요.*

저도 한때, '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몇해전이였을 겁니다. 모악산 어느 기슭에 일주일정도 머문적 있었거든요. 그곳에서의 일주일은 명징한 무욕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흐르고 바람의 느낌도 가라앉고 다시 예전처럼 우울해하고, 쉼없이 흔들리고.. 세상속으로 복귀한거지요. 가끔 지나다가 '단'이라는 글자가 눈에 보이면 다시한번 돌아봐지고 '꽃비'가 생각나서 뭉클 해지다가도.. 수많은 빌딩속에 상업적으로 빛나는 '道'의 무게에 슬퍼지기도 합니다. 종교는 비지니스라고 누군가 그러더니만 자본은 더욱 큰 입을 벌리고 해탈하고 싶어하는자 깨닫고 싶어하는 자의 욕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이 길었네요. 여전히 착지할곳을 찾지 못하는 그의 소설 제목은 아직도 붕붕 떠다니고 있습니다. 부처 혹은 예수를 만나러 수정암이 아닌 진짜 인도로 가고 싶은 제 욕심위로 말이지요.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단편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입니다. 어릴적 상처의 기억이 지금의 아름다움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 단편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식의 자서전이라면! 자신의 상처나 치부를 우아하게 세상에 내보이는 방법- 일년간의 건달패 똘마니 노릇중에 어느날 문득 작가는 친척의 서재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발견합니다.
치부처럼 혹은 원죄처럼 치욕스럽던 상처는 이제 문학의 소재가 되고 통로가 된 것이지요.

그 외의 단편들도 거의 비슷합니다. 상처를 관통하여 아름다움으로 거듭나기. 그렇게 송기원이 저에게 왔습니다. 지금 그는 해산토굴에서 한송이 연꽃으로 피어 오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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