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푸코, 역(逆)패놉티콘 사회, 민주주의

 

 

 

존 김 지음, <공개와 연대.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의 정치학>, 한석주ㆍ이단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게이오대학교 디지털미디어콘텐츠 통합연구기구의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존 김이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산하의 저명한 인터넷 관련 연구소인 버크만센터에서 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책의 논지는 ‘머리말’에 잘 드러나 있다.

 

“예전에 미국의 대학원에서 유학했을 때, ‘정보사회의 기원 The Origin of Information Society’이라는 수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읽은 적이 있다. ‘처벌’과 ‘감옥’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쓰인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 푸코는 ‘패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번역하자면 ‘전망대 감시 시스템’ 정도가 될 것이다. [...]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 혁명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나는 패놉티콘을 떠올렸다. 단, 구도가 반대가 되어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패놉티콘이라 하면 정부가 감시탑에 있고 독방에 들어있는 시민들이 감시당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위키리크스가 불쑥 등장하며 제시한 것은 우리들 시민이 감시탑에서 정부를 감시하는 구도인 것이다. 역패놉티콘이라고 불러야 할까. / 정부나 대기업을 비롯한 기존의 권위는 정보의 점유와 통제를 통해 그 권위를 구축하고 유지해왔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이 정보의 투명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기존의 권위는 붕괴되고 새로운 권위 체제가 구축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 이 책에서는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 혁명의 분석을 통해 ‘역패놉티콘 사회의 도래’에 대해 논해 보려고 한다.”(ix-xi)

 

이러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위키리크스의 창시자인 어산지는 시대의 이단아로 정보의 완전 투명화를 실현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최첨단 기술 지식을 종횡으로 구사하고 국가 간 법제의 차이에서 오는 공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전제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까지도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한 실적을 불과 몇 년 만에 만들어냈다. / 정보를 독점하고 은폐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권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정부이건 기업이건 종교 조직이건 간에 윤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내부 고발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기밀을 폭로하여 권위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부정은 없어지고, 사회의 투명성과 정의가 담보된다. 그리고 디지털 혹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통신 기술이 뒤에서 이를 지원한다. / 위키리크스는 이런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이에 대한 정부의 선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기밀의 누설을 허락하지 않는 더욱 견고한 정보관리 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기밀이 될 만한 정보 자체를 줄여 갈 것인가다. [...]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걱정한 것은 ‘빅 브라더’라는 정부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미래 사회였다. 그러나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의 등장으로 정부 활동의 어두운 이면을 포함한 모든 정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용기 있는 시민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목숨을 건 정치 행동을 일으키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 감시받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정부가 되는 ‘역패놉티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위키리크스가 실현하는 ‘완전 투명화 사회’와 페이스북이 실현하는 ‘게릴라 시민운동’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147-149)

 

존 김의 저작은 극히 최근의 현상인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 등의 현상을 통하여 중앙 행정기관의 감시자가 주위의 죄수 혹은 시민들을 감시하는 푸코의 ‘패놉티콘 사회’에 대하여, 불특정 다수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중앙 행정기관을 감시하는 ‘역패놉티콘’ 사회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선 존 김의 문제의식과 결론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존 김이 이러한 측면을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기본적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위키리크스로 대변되는 일련의 현상이 갖는 ‘긍정적인’ 정치적 측면 곧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을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적 정보 및 통신의 수단을 독점하고 이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존 권력 체제는 인터넷, 위키리크스, 페이스북 등으로 대표되는 ‘전자 민주주의적’ 경향에 의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서게 되었다. 존 김에 따르면, 정보의 독점 및 중앙 집중, 비밀주의로 대변되는 기존 행정ㆍ관리 체제는 특히 공적 이익을 위한 감시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어산지의 위키리크스에 의해 결정적인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국가 기관 혹은 국가 간의 협약에 의한 공공기관 및 국제적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기업 모두에 해당되는 현상으로, 이들 새로운 정보수단은 유사 이래 고급 정보의 독점ㆍ비밀주의에 기초한 권력을 남용하여 부당 이득을 취한 이들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저항에 무기를 쥐어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와 유사한 관점으로는 전명산의 『국가에서 마을로』(갈무리, 2012)에 등장하는 ‘홀롭티시즘 사회’의 도래를 들 수 있다. “홀롭티시즘은 판옵티콘을 완전히 뒤집은 개념으로, 판옵티콘이 소수가 다수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구조라면, 홀롭티시즘은 다수가 공동체 전체를 볼 수 있는 구조를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홀롭티시즘의 초입에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촛불집회, 지하철 게릴라 시위, 네티즌 수사대 등 최근 우리가 새롭게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그러한 사회적 경향의 초기 모습이다. /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빅브라더’의 사회가 될 가능성과 더불어 ‘위대한 개인들’이 이끌어가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공존한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홀롭티시즘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보도자료)

 

 

 

 

 

그러나 이러한 정보ㆍ통신 테크놀로지 수단의 발달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전자민주주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더욱 완벽한 ‘통제사회’를 가능케하는 ‘전자파시즘적’ 경향 역시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의 주체는 비단 이전과 같은 국가 기관 혹은 거대 기업만이 아니라, 웹 상에 존재하는 이른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다. 이런 면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다수 무지와 편견에 의해 저질러지는 소수에 대한 폭력적 테러에 다름 아닌 유럽 중세 ‘마녀사냥’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우리는 전세계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마녀사냥’의 최근 사례를 무수히 목격하고 있다). 하버드의 신학자 하비 콕스가 자신의 역작 『세속도시』(1965)를 통하여, 현대 거대도시의 대중사회를 분석하면서 오직 하나의 전제적인 세계관을 강요하며 모든 이들의 내면에 대한 투명하고도 완벽한 통제를 강요했던 유럽 중세사회에 대하여 익명성과 개인의 사적 영역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신의 추복이라고 갈파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러한 측면에서 위키리크스의 위상은 조금 다른데, 이는 평등한 주권적 시민들의 결합ㆍ계약으로 간주되는 근대 국가 혹은 그러한 국가들 사이에서 위정자 혹은 거대 기업인이 자신의 특정한 지위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국가 혹은 인류 전체가 아닌 자신들이 속한 특수 집단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할 권리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사실상 가히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도 한데, 이는 어산지이든 혹은 그 누구든 이러한 수준의 정보 취급 혹은 해킹 능력을 가진 인물들은 앞으로도 무수히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인물들이 이러한 사이트를 개설하고, 조직의 논리에 반하여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기밀’ 정보를 제공하는 개인들이 존재하며, 그에 대한 동조자들이 무수한 카피 사이트를 만들고, 이를 보도하는 매체들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폭로는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부차적 문제라고 칭하여 질 수도 있지만, 다만 문제는 ‘국가 기밀해제 시효’의 경우처럼, 이른바 ‘통치권자’가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기밀을 설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리’, 곧 장기적 관점에서 본 국가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모두 알릴 수는 없는’ 통치권자의 권리에 관련된 난점이 제기된다. 이는 말하자면 ‘네가 잘못한 일 혹은 오해받을 일이 없다면, 왜 내게 네 메일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못하느냐’는 애인의 잘못된 요구의 경우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의 국가 혹은 조직도 일정한 ‘내적 생활’ 혹은 ‘국가 혹은 조직의 사적 영역’이 존재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존재한다 해도 그러한 영역은 과연 어떤 조건하에서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가라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논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통치권 및 국가, 기업, 사생활, 권리, 공사 영역의 구분이라는 근대 정치학의 주요 개념들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는 요구와 당위성이다. 배아복제와 장기이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보 분야에서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가 이전에는 기술적 이유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문제들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하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이러한 기술을 활용해도 되는가, 활용한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은 단순한 통신 기술 발달의 결과를 넘어,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고 지탱해왔던 정치와 사회 영역의 모든 개념들 곧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및 재구성의 시기가 왔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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