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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어린시절 끔찍한 화재사고를 겪은 주인공 유원과 그녀의 가족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
열 살 남짓 터울의 언니를 엄마처럼 따르던 여섯 살난 꼬마아이 유원은 어느 날 언니와 거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아파트 11층에 살았는데 윗층에 살던 할아버지가 베란다에서 피운 불씨가 살아있던 담배꽁초가 아랫집 유원의 집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불길은 삽시간에 번졌고, 언니는 유원을 불길 속에서 살리기 위해 그녀를 이불에 돌돌말아 아파트 11층에서 던졌다. 때마침 길위를 지나가던 아저씨가 그녀를 받아안았고, 유원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언니는 질식사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후 아저씨는 떨어지는 유원을 안으면서 받은 충격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이것을 빌미로 유원의 부모에게 사업 타령을 하며 시시때때로 급전을 뜯어갔다. 그럴 때마다 유원은 자신의 생존이 남겨진 부모에게 짐이 되는 것 같고, 때론 수치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언니의 희생의 대가 혹은 결과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 날의 사고는 트라우마로 남아 언니의 죽음에 대한 고마움은 자신만 살아남은 죄책감, 언니의 몫까지 잘 살아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또한 자신에게서 투영되는 언니의 모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뜻모를 비애, 자신을 구한 목숨값을 구걸하듯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아저씨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증오는 늘 그녀를 괴롭힌다.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 수현과 그녀의 동생 정현은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의 자식이자 유원의 유일한 친구들.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는 의로운 시민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이지만 유원의 가족들에겐 빚쟁이 같은 존재, 수현과 정현에겐 가정은 뒷전이고 늘 망해가는 사업에만 매달리며 한탕주의를 꿈꾸는 비정한 아버지이다.
유원과 수현은 가슴속에 담아뒀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조금씩 나눠가지며 서로를 위하는 우정을 쌓아나간다. 자신이 살아남음과 동시에 벌어지기 시작한 불행의 근원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며 살아가던 유원은 수현을 만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짐을 덜어간다. 그러면서 아저씨에 대한 원망, 아버지를 잃게 된 수현과 정현에 대한 미안함, 언니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증오, 화재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로 여전히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자신을 향한 세간의 시선 등 늘 그녀를 억눌러왔던 것들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려 노력하는 유원.
백온유 작가의 장편소설 <유원>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겪은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고 생각없이 말이 많다. 마치 강건너 불구경처럼, 카더라처럼. 작가는 이런 부분을 짚어주려 한 듯 하다. 우리의 지극한 관심이 때론 생존자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희생자의 몫까지 잘 살라는 당부, 불쌍해서 어쩌냐는 연민, 지금 그 아이는 잘 살고 있냐는 안부 등이 우리에겐 그저 지나가는 말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고, 새 삶을 살아가고픈 열망에 덫을 놓는 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묵묵히 어딘가에서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듯 일상을 살아나가려는 아니 버텨내려는 미세한 감정의 물결과 힘겨운 발돋음을 오늘 날 그 어딘가에서 해나가고 있을 또다른 <유원>들에게 너무 애쓰다 지쳐버리지 않기를, 곪은 속을 감추려다 영혼까지 곪지 않기를, 희생의 결과물이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며 살아가기를 이렇게나마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