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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Baggage, 여행 가방은 필요 없어
클라라 벤슨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아일랜드 식탁 위에 그들의 물건이 놓인다. 왼쪽에는 제프의 물건이, 오른쪽에는 클라라의 물건이. 새빨간 치노 팬츠, 스텟슨 카우보이모자, 팬티 한 장, 양말 한 켤레, 줄무늬 면 티, 아이폰, 아이폰 충전기, 칫솔, 동유럽 지도 반 장, 메모지, 샤프, 현금 조금, 신용카드 한 장, 여권. 전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오른쪽에 놓인 클라라의 물건은 초록색 원피스, 팬티 세 장, 면 스카프 한 장, 검정 브라, 라벤더 향 데오도런트, 칫솔 한 개, 열여섯 살 때부터 끼고 있는 치아 교정기, 렌즈 케이스, 비상용 안경, 탐폰 두 개, 아이폰, 아이패드 미니, 작은 노트 한 권, 펜, 여권, 주머니를 대신할 작은 크로스백, 텍사스 기념품으로 여행 중에 선물할 카우보이 자석 여러 개, 체리향 챕스틱. 끝. 옷을 입고 가방에 물건을 담는데까지 8분이 걸렸다. 8분이면 충분했다. 지구 반대편을 3주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라. 아름다움도 끔찍함도. -릴케의 <기도시집> 중에서
여행가방 없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에게(정확히는 클라라에게) 옷을 입다 만 채로 거리 한가운데 버려진 것 같은 낯선 기분을 안겨주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의 여행은 특별해졌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도 늘 여행가방을 꾹꾹 눌러야 겨우 닫히곤 했는데, 그런 것들 하나 없이 떠난 여행도 그럭저럭 즐겁게 시간이 흘러간다. (생각보다 '노 배기지'에 쉽게 적응한 클라라가 놀라웠다) 물론 갑작스러운 미니멀리스트로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원룸에는 인류가 등장한 이래 그 어떤 선조 세대보다 많은 물적 자원이 늘 가득가득 쌓여있었으니까. 하지만 클라라는 새로운 물건의 획득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외려 굉장히 빨리 최소한의 물건으로 만족을 느끼는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심장을 아주 약간 빠르게 뛰게 하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안식처와 먹을 것. 그거면 충분했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종이컵에 담긴 싸구려 커피가, 낯선 이의 소파에 놓인 낡은 담요가, 깨끗한 속옷이 사소하지만 소중한 기적이 되었다.
'여행travel'은 '고난travail'에서 유래한 단어다. 고난은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종아리가 뻐근해지는 등 수만 가지 이유로, '그냥 집에 있을 걸'하고 후회하게 되는 험난한 여정이다. 하지만 보기 좋고 멋진 것에는 어느 정도 고난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탁 트인 풍광과 인상적인 셀카는 길게 늘어선 줄은 물론, 비행기에서 울어대는 아기와 혈당 부족까지 겪은 후에야 쟁취할 수 있으니까. (34쪽)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차질 없이 실행하거나, 행운의 날벼락을 맞아야 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둘 중 어느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완벽하게 충족된 기대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있다 해도 정말이지 지루할 것이다) 제프와 클라라는 오케이큐피드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만났다. 클라라가 제프에게 쪽지를 보내고, 그들이 지구 반대편을 함께 여행하게 되기까지는(그것도 '노 배기지' 여행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여행은 여러모로 여행이었고, 탐험이었고, 모험이었던 것이다. 단지 '노 배기지'라서가 아니라, 서로에게도.
마법과 위험은 찰떡처럼 붙어 다닌다 했던가.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고, '노 배기지'는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현실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기가 어렵다고- 그런저런 이유로 여행을 거절했더라면 클라라에게 마법 같은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흥겹게 헐떡이는 캉갈의 혓바닥도 늘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 있지 않은가. 마법을 위해서는 낯선 것에, 말 없는 순간에, 삶의 신비에,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한정된 지식의 틀을 가차 없이 뛰어넘는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클라라에게는 그것이 제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여행은 익어갔고, 그 사이 그들의 관계도 선명해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함께 있다'는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제프가 클라라의 손을 꽉 잡았을 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해'라는 쪽지를 스스럼없이 보낼 수 있는 사이가 되겠구나, 하고. (흐뭇) 그러니까 뭐랄까, 독자로서 정말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던 시작이 덮을 즈음에는 이렇게까지 명료해져있다니. 그저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뭔지 모를 것에 나를 완전히 내맡긴다는 것은- 이렇게나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