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졸업 - 소설가 8인의 학교 연대기
장강명 외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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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의 학창시절은 거지 같았습니까? 누군가가 묻는다. 고개를 끄덕인 몇몇에게 글을 부탁했다. 당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르포 문학의 형태로 써 달라고. 가능한 직접 겪은 일이나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써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자신의 시대에만 잠시 있었고, 그래서 내 세대만 알았던 무엇인가를 기록해달라고. 그 기획의도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 <다행히 졸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973년생부터 1993년생까지 아홉 명의 작가들이 모여 자신의 학창시절을 이야기했다. 무려 25년의 세월이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공통의 감정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아홉 개의 이야기 중, '단편하게책읽는당'을 통해 김아정의 <환한 밤>을 먼저 받아들었다.

2. 엄마와의 대화란 언제나 말다툼이었다. 나에게 엄마의 말은 충고가 아닌 잔소리였고, 엄마에게 나의 말은 대답이 아닌 말대꾸였다. 한참 잔소리와 말대꾸가 오가다 끝내 내가 침묵을 택하는 것으로 대화는 종결되곤 했다. (김아정, '환한 밤' 중에서)

3.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 그래서 당분간 시골 할머니 집에서 지내야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아빠의 선언? 아니 통보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제 겨우 고1인 '나'는 엄마처럼 아빠의 멱살을 잡지도, 고1이나 된 주제에 엉엉 울며 자리에 드러누워버리지도 못한다. 그렇게 시작된 시골생활. 그맘때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 '나'도 가난이 부끄럽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호기심을 보이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괜한 거짓말도 하게 된다. 예컨대 '홍대의 버스킹도 좋지만, 북촌의 고즈넉함이 더 좋더라 나는.' 그런 거.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겠냐마는, 그때는 그게 중요했다. 부끄럽지 않은 거. 아니, 더 정확히는 쪽팔리지 않는 거.
어쨌거나 시골생활이 쪽팔리고, 요금을 내지 못해 수신도 발신도 되지 않는 휴대전화가 쪽팔리고, 아빠 아는 분의 딸내미가 입던 오래된 교복이 쪽팔리던 찰나 하룻밤 일탈을 하게 된다. 아무 일 없었다면, 정말 아무 일 없었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기엔 '내'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었던 그날 밤. 소설은 그날 밤을 쓰고 있다.

4. 그러고 보니 내게도 '그날 밤'이 있었다. 소설 속의 '나'처럼 밤에 몰래 학교에 잠입해들어갔던 것은 아니었고,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대담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냥 어느 날 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아주아주 늦은 밤. 그러니까 아마도 새벽 한 시 반쯤은 되었던 것 같은데, 친구 두 명과 그냥, 궁금해서- 소화기를 뿌려보았다. "소화기 사용법 알아요?"하는 어느 영화의 대사를 이야기하다가 였던 것 같은데, 그게 행동으로까지 이어진 걸 보니 10대는 10대였던 것 같다. 어쨌거나 안전핀을 뽑고 힘껏 꾸욱. 그랬더니 그 오래된 소화기에서 하얀 가루가 푸와아아아악-하고 쏟아져 나왔다. 의외로 작동이 쉬워서 깜짝 놀랐고,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쾌감이 찌릿해서 또 깜짝 놀랐다. 오! 이거 재미있는데? 해서, 소화기 몇 개를 주워들고 운동장에다 소화기를 마음껏 뿌렸다. 아마도, 새벽 두 시의 일. 새벽 두 시, 19살이 셋 모이면 뭐든 할 수 있다. 어떤 미친 짓도. (암요 암요) 그러고 보니 나도, 다행히 졸업을 했다.

5. 오랜만에 그때 그 시절로 슈욱-하고 돌아갔다 온 느낌이다. 아른아른 아지랑이처럼 예쁘지만, 그래도 그 안에 뭔가 다이내믹함이 남아있던 시절. 제일 큰 걱정이라고 해봐야 수능에서 몇 등급을 받을 것인가!였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 아아, 다른 누군가는 또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려나. 그게, 이 책을 더 읽어봐야 할 이유라면 이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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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Baggage, 여행 가방은 필요 없어
클라라 벤슨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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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식탁 위에 그들의 물건이 놓인다. 왼쪽에는 제프의 물건이, 오른쪽에는 클라라의 물건이. 새빨간 치노 팬츠, 스텟슨 카우보이모자, 팬티 한 장, 양말 한 켤레, 줄무늬 면 티, 아이폰, 아이폰 충전기, 칫솔, 동유럽 지도 반 장, 메모지, 샤프, 현금 조금, 신용카드 한 장, 여권. 전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오른쪽에 놓인 클라라의 물건은 초록색 원피스, 팬티 세 장, 면 스카프 한 장, 검정 브라, 라벤더 향 데오도런트, 칫솔 한 개, 열여섯 살 때부터 끼고 있는 치아 교정기, 렌즈 케이스, 비상용 안경, 탐폰 두 개, 아이폰, 아이패드 미니, 작은 노트 한 권, 펜, 여권, 주머니를 대신할 작은 크로스백, 텍사스 기념품으로 여행 중에 선물할 카우보이 자석 여러 개, 체리향 챕스틱. 끝. 옷을 입고 가방에 물건을 담는데까지 8분이 걸렸다. 8분이면 충분했다. 지구 반대편을 3주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라. 아름다움도 끔찍함도. -릴케의 <기도시집> 중에서

여행가방 없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그들에게(정확히는 클라라에게) 옷을 입다 만 채로 거리 한가운데 버려진 것 같은 낯선 기분을 안겨주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의 여행은 특별해졌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도 늘 여행가방을 꾹꾹 눌러야 겨우 닫히곤 했는데, 그런 것들 하나 없이 떠난 여행도 그럭저럭 즐겁게 시간이 흘러간다. (생각보다 '노 배기지'에 쉽게 적응한 클라라가 놀라웠다) 물론 갑작스러운 미니멀리스트로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원룸에는 인류가 등장한 이래 그 어떤 선조 세대보다 많은 물적 자원이 늘 가득가득 쌓여있었으니까. 하지만 클라라는 새로운 물건의 획득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외려 굉장히 빨리 최소한의 물건으로 만족을 느끼는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다. 심장을 아주 약간 빠르게 뛰게 하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안식처와 먹을 것. 그거면 충분했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종이컵에 담긴 싸구려 커피가, 낯선 이의 소파에 놓인 낡은 담요가, 깨끗한 속옷이 사소하지만 소중한 기적이 되었다.

'여행travel'은 '고난travail'에서 유래한 단어다. 고난은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종아리가 뻐근해지는 등 수만 가지 이유로, '그냥 집에 있을 걸'하고 후회하게 되는 험난한 여정이다. 하지만 보기 좋고 멋진 것에는 어느 정도 고난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탁 트인 풍광과 인상적인 셀카는 길게 늘어선 줄은 물론, 비행기에서 울어대는 아기와 혈당 부족까지 겪은 후에야 쟁취할 수 있으니까. (34쪽)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차질 없이 실행하거나, 행운의 날벼락을 맞아야 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둘 중 어느 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완벽하게 충족된 기대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있다 해도 정말이지 지루할 것이다) 제프와 클라라는 오케이큐피드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만났다. 클라라가 제프에게 쪽지를 보내고, 그들이 지구 반대편을 함께 여행하게 되기까지는(그것도 '노 배기지' 여행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여행은 여러모로 여행이었고, 탐험이었고, 모험이었던 것이다. 단지 '노 배기지'라서가 아니라, 서로에게도.

마법과 위험은 찰떡처럼 붙어 다닌다 했던가.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고, '노 배기지'는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현실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기가 어렵다고- 그런저런 이유로 여행을 거절했더라면 클라라에게 마법 같은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흥겹게 헐떡이는 캉갈의 혓바닥도 늘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 있지 않은가. 마법을 위해서는 낯선 것에, 말 없는 순간에, 삶의 신비에,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한정된 지식의 틀을 가차 없이 뛰어넘는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클라라에게는 그것이 제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여행은 익어갔고, 그 사이 그들의 관계도 선명해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함께 있다'는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제프가 클라라의 손을 꽉 잡았을 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해'라는 쪽지를 스스럼없이 보낼 수 있는 사이가 되겠구나, 하고. (흐뭇) 그러니까 뭐랄까, 독자로서 정말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던 시작이 덮을 즈음에는 이렇게까지 명료해져있다니. 그저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뭔지 모를 것에 나를 완전히 내맡긴다는 것은- 이렇게나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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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최정수 옮김 / 부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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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일에서 은퇴한 부부가 모스크바로 여행을 떠난다. 둘 사이에는 각자 다른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하나씩 있었는데, 모스크바에는 남편 앙드레의 딸 마샤가 살고 있다. 삼 년 만의 모스크바 방문에서 앙드레는 사회적 변화 앞에 적잖은 실망감을 느끼지만, 딸과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반면 아내 니콜은 둘만의 시간을 마샤에게 빼앗겨버린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녀의 젊음을 시기하고, 이윽고는 부부의 관계를 처음부터 복기해보기에 이른다.

우리 부부는 너무도 촘촘한 습관들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 딱딱한 껍질 밑에, 진짜 우리와 살아 있는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그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안다고 해서 내가 그이에게 어떤 존재인지까지 알 수는 없어. (91쪽)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지된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 사이 서로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이 멋진 것은 그 대화의 과정들이(각자 오해를 쌓아가는 과정들까지도) 빛나는 문장으로 쓰였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게 뭐?' 그녀는 호텔 쪽으로 돌아가면서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자문했다. 해결책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 함께 살 것이고,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감출 것이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다, 앙드레 곁에서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한다. (104-105쪽)

그들의 고민은 단지 부부 사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늙음에 대한 것(그들은 각자 교수와 선생님으로 재직하다 은퇴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약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에 대한 성찰 역시 녹아 있다. 니콜은 불편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다리 힘이 부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앙드레 역시 소련의 활기찬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왜 더 이상 그들에게 속하지 못하는지, 어떻게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자문한다.

삶이란 것이 하루하루 늙어가는 과정이라면, 이 소설 <모스크바에서의 오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 열정 넘치던 젊은 시절에 만난 부부가 한 평생을 함께하면서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은 어쩐지 귀엽기까지 하다. 어른이 되었지만, 어쩌면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훨씬 더 많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그들은 '젊다'. 그들의 오늘은 더 모범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다음 순간에 둘러싸이고, 그 순간들에 의해 정당화되며, 마지막에 완전히 회복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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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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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들어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우주 탐사를 체험하는 4D영상물이었다. 우주정거장에 문제가 생겨 나로호가 멋지게 그것을 해결하고 돌아온다는 1차원적인 스토리였는데, 중요한 것은 스토리보다 영상물의 이미지와 입체감, 라이드를 했을 때 얼마나 '신나는가'였기 떄문에 과하게 나로호가 부각된 스토리는 만들던 이 중 누구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우주를 만들면서, 우주를 생각했다. 많은 자료가 쌓여갔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우주적 상상이 나의 우주적 상상을 증폭시켜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상상하고 있던 우주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 무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우주가 어떻건, 내가 만든 우주 속에는 무언가 자꾸 추가되어갔다. 여기가 좀 허전한데? 여기 행성을 하나 더 그려넣자. 이쯤에서 지구가 보였으면 좋겠어. 우주정거장은 더 멋져야 하는 것 아니야? 나로호의 속도를 더 높이자 등등. 그런 이야기가 자꾸만 오갔다. 그럼에도, 그런 복잡한 우주를 그리면서도 머릿속은 점점 검게 변해갔다. 우주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은 어두웠고, 깊었고, 그래서 섬뜩하리만치 고요했다.

김중혁의 우주는 어땠을까. 그의 우주도 나의 우주와 비슷한 모양새를 지녔을까. 그도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양념을 계속해서 추가해야만 했을까. 어둡고, 깊고, 그래서 섬뜩하리만치 고요한 것 만으로는 소설이 되지 않으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위아래도, 가깝고 먼것도 없는 온전한 암흑 속에서 낙하산을, 여자친구를, 어려서 헤어진 엄마를 또 한번도 말을 섞어보지 않은 이복동생을 굳이 이야기해야할 이유는 무엇이었으려나. '나는 농담이다'라고 표지에 떡하니 써놓고서는 단 한번도 나를 크게 웃게하지 못했던 코미디 속에서 그 언젠가 만들었던 나의 우주가 떠올랐다. '얼마나 신나는가'가 가장 중요했던 영상이었는데, 그 영상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을 '신나게' 만들어주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를 '유치'하고 '재미없고', '뻔하고', '작위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농담이 마냥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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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최고의 질문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 마이크임팩트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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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라는 타이틀이 낯설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렇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음에 분명하다. 어쩌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되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함께 고민해보기로 한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상실'을 들어보고, 나의 상실된 무엇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 책 <상실의 시대:그랜드 마스터 클래스>는 올해로 3회째 열린 마이크임팩트의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빅 퀘스천'을 다시 한번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낮 12시부터 저녁 8시를 넘기도록 하루 종일 강의를 듣는 이른바 '생각축제'인데, 책에서는 그중 7인의 강연만을 담았다.
(실제 이 강의는 사흘 동안 총 21명의 선생님을 모시고 진행됐다. 개인적으로는 유키 구라모토의 강의가 굉장히 궁금했는데 이 책에는 빠져있어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면 내년에는 꼭 그 현장에 가는 수밖에;ㅁ;...)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빅 퀘스천'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강단에 세우고 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또 당연하게도 그 대답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또 그들 각자의 생각에 따라. 이 책에는 <생각의 탄생>의 저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문학평론가 정여울, 시사평론가이자 방송 진행자인 정관용, 20대 국회의원이자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 표창원, 도시사회학자 김정후, 기생충학자 서민, 인문학 교수 이진우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상실의 시대'라는 다섯 글자를 두고 누군가는 사회 정의를 말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창의성을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찾는 법'을 말하기도 했다. 실로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 청중이 된 것처럼, 한자리에서 쭈욱- 이 책을 다 읽었는데(본문도 강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라, 꽤 두툼한 볼륨에도 불구하고 한자리에서 읽어내는데 무리가 전혀 없었다), 대체로 모두 흥미로웠으나 특히 서민과 이진우의 강연이 좋았다. (기생충에는 1도 관심 없었던 내가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책이 구어체로 쓰였다는 것과 그가 진짜 얘기하고자 했던 것이 기생충 그 자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의 이야기로 말미암은 우리의 생존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경우의 무지가 있는데, 우리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진척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답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습관을 버리고 문제를 올바로 인식했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창의성의 상실과 회복 중에서)

지난 해 겨울,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를 들으면서도 그랬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내내 집중하지는 못했다. 자꾸만 '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을 만났을 때, 목에 턱-하고 걸리면 그것을 쉬이 넘어서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텍스트를 계속 읽어나가고 있다. 마치 진짜 강연을 듣는 듯 했다. 아마도,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새조충은 가시고기에 사는 기생충인데, 얘네 역시 새에게 가야 짝짓기와 알 낳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고기는 찬물을 좋아해서 헤엄을 쳐도 물 깊은 곳에서만 칩니다. 새는 물 깊은 곳에 갈 수가 없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요? 결국 이 기생충은 가시고기로 하여금 찬물이 아닌 따뜻한 물을 좋아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가시고기가 물 밑바닥이 아니라 수면 근처에서 헤엄을 치게 만들죠. 그러면 새가 저거다, 하고 와서 가시고기를 먹고 이 기생충은 자기 뜻을 이루게 됩니다. (서민:기생충이 사라진 세상 중에서

창의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영감이 아니라 불굴의 노력입니다. 또한 사실상 지능과는 무관하고 삶의 경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창의성은 문제를 찾고 문제를 제기하고 과제를 제시하는 능력이지, 해답을 도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또한 창의적인 사람들은 끈기 있는 초보자들이지 전문가들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창의적인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방면에서 훈련받은 팔방미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능력은 눈에 띄지 않다가 뭔가 중요한 기여를 하고 나서야 빛을 발하게 됩니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창의성의 상실과 회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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