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시대 세트 - 전4권 정치의 시대
은수미 외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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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피고인 자리에 앉았다. 그 옆으로는 국정 농단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는 최순실이 앉았기에 국민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정면만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53일은 그녀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탄핵 인용이 결정된 지 두 달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기 무섭게, 그동안 쌓여있던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조국 교수를 민정수석으로 임명하며 검찰개혁을 예고했고, 박근혜-최순실 특검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검사를 서울중앙지검 지검장에 임명하며 강한 개혁 의지를 확고히 다졌다. 빠르게 정상화되어가는 국정 운영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다시금 기대를 품는다.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저자인 최강욱은 서두에서 '심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변한 채 강의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의 강의는 왜 법이 정치를 심판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다. 일단 크게는 한국 사법의 구조적인 문제를 들었다. 여기서 구조라고 하는 것은 제도나 관행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문제까지 포함한다. 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왜 그들이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가,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라고 말을 바꿨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맞다. 이해가 된다. 그래서 참담한 기분이 든다. 우리나라 사법부가 겨우 이 정도라니.

사법개혁이 이루어진다면 법이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요?
하는 질문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사법부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한다 하더라도 정치를 온전하게 심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에 비추어 생각하자면 그러한 심판이 꼭 옳은 것도 아닙니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를 모두 경계해야 하듯, 모든 정치적 이슈가 사법의 영역에서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옳지도 않습니다.
선출된 권력이 아닌 직업 법관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심판하는 절대자로 군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주권자의 뜻을 받드는 바른 정치가 이루어져 건전한 토론과 합의를 통해 최선의 방안을 도출하는 건강한 정치가 작동되게 하는 것입니다.
법이 정치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기보다 정치를 통해 올바른 법이 만들어지고, 법을 집행하거나 법을 통해 판단하는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주권자의 입장에서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민주주의의 길입니다. 올바른 정치는 주권자의 뜻이 그대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법은 당연히 정치의 아래에 놓여야 하지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법이 올바로 만들어지고 올바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주권자에겐 일종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의 시대, 법은 정치를 심판할 수 있을까, 묻고 답하기 중에서)

그의 대답을 읽으며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맞다. 법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심판하는 것은 안될 일이다. 법이란, 건전한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뛰어넘어서도 안된다. 헌법 1조를 더듬더듬 겨우 외우는 수준이지만, 이런 내가 생각하는 원칙과 기준이 법에도 통용되어야 한다. 상식이 확립된 사회가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례없는 비선의 목격으로 지난겨울을 뜨겁게 보냈다. 너 나 할 것 없이 광장에 나와 '상식이 통하는 나라'이길 외쳤다. 많은 이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정권교체로 이어졌고, 상식의 재확립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권교체는 아마도 끝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 권력을 준 우리는, 그를 뜨겁게 지지하기도 하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할 것이다. 법도 정치도, 결국은 주권자인 우리가 심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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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사람들
크리스토발 레옹 글, 크리스티나 싯자 뤼비오 글.그림, 박선주 옮김 / 베어캣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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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엊그제가 식목일이었다.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시절 자랐던 나는, 문구점에서 파는 꽃씨를 사다가 집 앞 화단에 뿌렸던 기억이 난다. 꼭꼭 흙으로 씨앗을 묻어두고 물을 촉촉하게 뿌려주고 나면, 며칠 사이 예쁜 새싹이 돋아나던 일. 요즘 들어 다시 생각해보면, 그 경험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반추하게 된다. 베어캣의 새 그림책 <이상한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길게 쭉쭉 뻗은 나무가 울창한 숲, 과연 이 숲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짙은 풀 내음이 날 것만 같은 표지와는 달리, 이야기는 조금 울적하다. 어느 날 갑자기 숲 속 동물 친구들의 집이 사라져버린 것. 동물 친구들은 임시방편으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찾아와 집을 지어보지만, 뭔가 잘 맞지 않는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동물 친구들은 온통 조각조각 잘라져 있는 집들을 발견하고는, 집을 그렇게 만든 '이상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그 대화가 잘 됐을 리 없다. 그리하여 동물 친구들이 선택한 방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의 집도 어느 날 갑자기 없애기로 한 것. 아이들 그림책답게, '이상한 사람들'은 동물 친구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준다. 그들이 가져갔던 게 원래 우리의 집이었고, 우리에게는 그 집들이 필요하다는 말을.
내용도 내용이지만, 돌쟁이 아기인 채원이는 그림이 주는 희로애락에 즐거워했다. 책은 색채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활용해, 동물 친구들이 느끼는 기쁨과 환희, 슬픔과 절망을 표현했다. 해서 글을 읽지 않아도, 동물 친구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채원이는 책의 앞부분, 동물 친구들의 파티 장면을 제일 좋아했고, 채원이 아빠는 동물 친구들이 쓰레기 더미를 가져다가 집을 짓는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라 말했다)

그리고 괜히 생각이 많아진 엄마는,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고 채원이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1. 사람들은 왜 동물 친구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2. 사람들의 집을 없애는 동물 친구들의 계획은, 정말 최선이었을까?
3. 동물 친구들과 동물 친구들의 숲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는, 이 책이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비단 '자연 파괴'나 '자연 보호'에서만 그치지 않는다고. 이는 거대 권력에 대항하는 소시민의 모습이기도 하며, 하우스 푸어가 넘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특히 재개발 문제), 그런 생각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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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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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하는 질문은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와 직결된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는 왜 질문해야 하는가'하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에 다다른다.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어쩌면 '질문의 방향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로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하고 있던 연구는 이미 답이 나와있는 것을 다시 꺼내어 '맞추어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질문이 아닌 남들의 답에서 시작했기에, 주어진 답의 형식적 순결에만 집착한다고(38쪽). 그러니 우리의 사고는 공자보다 더 유교적이고, 마르크스보다 더 공산주의적일 수밖에.

그런 우리에게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대작 <수학 원리>는 굉장히 큰 충격을 안긴다. 1910년부터 1927년까지 무려 십칠 년 동안 그들은 단순한 몇 가지 공리들을 시작으로 논리와 집합 이론만을 통해 수학의 모든 진리를 증명하려 했다. 360여 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1+1=2'라는 사실을 증명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329쪽) 그들의 연구는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진리를 향한 끈질긴 질문과 집념이 있어 가능했다.

그렇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배철현 교수가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썼듯,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기 때문이다. 또한 질문은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주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 순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다. 그 질문들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서 오기도 한다.

저자는 그 '질문'들을 찾는데, 주로 고전을 이용했던 것 같다. 과학에는 문외한이라 과학자의 시선이 궁금했는데, 외려 그 끝에는 문학과 예술, 철학이 있었다. 저자는 이 책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통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책들을 여럿 소개하고 있다. 인상적인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가벼운 필체로 쓰고 있다. 해서, 친한 교수님께 좋은 책 몇 권을 소개받는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또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움베르트 에코가 특히 자주 등장했고, 줌파 라이히와 사르트르, 랭보 역시 반가운 이름들이었다.

 

언어의 해상도는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다. 모든 표현은 결국 왜곡이라는 말이다.(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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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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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는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다.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한다. 아주 어려서는 '아이가 아주 침착한 편이에요~'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평범한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엄마는 윤재에게 늘 말했다. '튀는 아이가 되어서는 안 돼'. 아마도 엄마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긋난 타인의 시선을 많이도 의식했던 것 같다. 덕분에 윤재는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일곱 가지 감정을 끊임없이 학습했다. 학습은 엄마와 할머니가 제시하는 다양한 상황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윤재가 커갈수록, 그 상황이란 것들은 걷잡을 수 없이 다양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엄마와 할머니마저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사고를 당했다. 그래도 윤재는 괜찮았다. 윤재가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늘 윤재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던 두 사람이 사라졌지만, 윤재가 완전히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위층의 심 박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곤이'도 늘 윤재 곁을 맴돌았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인 곤이는 13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아이다. 곤이는 늘 분노로 가득 차있었다.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두 사람은 서로를 궁금해하다, 친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윤재도 곤이도 성장한다.

심 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 심 박사가 화면을 보고 있다.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손원평, 아몬드, 209쪽)

심 박사가 유독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머니도 그랬다. 윤재의 엄마는 언젠가,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윤재에게 의문은 계속된다.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 일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윤재를 부둥켜안은 곤이의 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앞뒤로 흔들릴 때, 윤재는 퍼뜩 생각한다. 얼굴 위로 톡 하고 떨어진 눈물방울이 델만큼 뜨겁다고. 그리고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가 탁, 하고 터진다. 뭔가가 밀려들었다가 밀려 나간다. 느낀 것이다. 그것이 이름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외로움인지 아픔인지, 아니면 두려움이었는지 환희였던지간에- 윤재는 곤이를 통해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모호했던 것들이 한순간 카메라의 포커스가 맞듯 뚜렷해졌다가 사라진다.

읽는 내내 어느 특별한 소년의 성장기라고 생각했다. 윤재가 제 엄마의 바람대로 '평범한 아이'가 되기를 바랐고, 곤이와도 화해 아닌 화해를 하기를 바랐지만- (고백하건대)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책의 말미에서 들켜버리고 말았다. 마치 심 박사가 전쟁이라는 아픔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윤재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윤재를 저 멀리- 그러니까 소설 속의 아이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감정을 느끼지만, 느끼지 못한다. 가끔은 느끼는데 느끼지 못하는 척하고, 또 가끔은- 느끼지 못하는데도 느끼는 척한다. 너무 멀다는 이유로, 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돌아서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210쪽)"

하는 윤재의 문장을 읽으며 나를 돌아본다. 그러니까 소설은, 윤재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또 '감정 불능'에 빠진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책방은 수천, 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손원평, 아몬드,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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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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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9쪽)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132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의 여운은 결코 짧지 않다. 주인공 한탸의 지난 삼십오 년이 고스란히 베여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의 고백처럼 이어진다. 폐지 압축공인 그는 더럽고 끈적끈적한 지하실에서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이 있는 작은 압축기와 도수가 꽤 높은 술로 인생을 보내왔다. 그의 삶은 분명 고독했지만, 암울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날마다 천장에서 쏟아져내리는 온갖 종류의 폐지 사이에서, 빛나는 어떤 것을 캐내는 것이 그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그렇게 그는 독서를 통해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다.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10쪽). 문장들은 천천히 혈관으로 스며들어 그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더 깊숙한 곳까지도 비집고 들어온다. 그렇게 완전히 어떤 사상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그는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일까,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하는 단순한 기계의 조작 사이에서도 어떤 철학적 기제가 읽힌다. 느릿느릿한 그의 움직임들 사이에서 예수와 노자가 각자의 언어를 이야기하고, 니체와 헤겔이 논쟁하는 장면 역시 흥미로웠다. (그것이 술에 의한 환상이라 하더라도)

그런 점에서, 어느 날 찾아온 사회주의 노동단원인 두 청년이 그의 탁자 위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깔고 자신들의 우유병을 올려놓던 장면은 더없이 아팠다. 한탸의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독서'라는 행위의 기쁨
('읽는다는 것'과 좋은 책을 '발견한다는 것'의 기쁨)을 전하는 동시에, 견고하게 쌓아왔던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야만 하는 서글픈 운명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10-11쪽)

한탸는 청년들이 주는 굴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짓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그도 끝을 향한 선택지를 뽑아든다. 하지만, 그 선택에서마저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슬픈 선택의 순간에서 반짝하고 빛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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