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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올해의 마지막 토요일 밤, 이 책을 집어 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어느덧 두 시임을 확인하고 잠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읽던 책을 마저 읽는다. 꿈 속인가,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건 아닌가, 싶게 예뻤던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소설 <마리카의 장갑>은 보기 드물게 성실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첫 장면은 마리카의 탄생이고, 그 마지막은 마리카의 죽음이다. 다소 밋밋할 법도 한 구성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순식간에 빠져들고, 금세 온몸의 감각이 마리카에게로 집중된다. 마리카의 삶이 어느 위인 못지않게 다이내믹했던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를 감싸고 있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은 계속해서 반짝거리는 빛을 낸다. 사실 이토록 소담하고, 정답고, 착한 일대기를 이제까지 본 일이 없다. 기록될만한 일생은 늘 폭풍우를 만나 이겨냈거나, 괴물을 무찌르거나,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선택을 과감하게 해낸 이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좀 달랐다.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마리카는 야니스라는 남자를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고, 뿌리를 아주 튼튼히 내린 가정을 꾸린다. 얼음제국의 침략과 전쟁의 상흔, 야니스의 징병 같은 어두운 문제도 녹아 있지만, 모두들 울기보다는 웃는 쪽을 택한다. 그 동화 같은 선택이, 상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 책은 발끝부터 지릿지릿 뜨끈한 것이 올라오는 온기의 책. 올해 마지막 일요일을 더없이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던 책이었다.
마리카의 일생은 파란 많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생애였다. 마리카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루프마이제공화국(마리카의 나라)이 얼음제국에 점령되면서 남편 야니스가 연행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시련을 겪는다. 사실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을 젊은 날 잃어 평생을 혼자 그리움에 지내야 하는 일은 크나큰 시련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시련의 흔적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로 숨겨진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랬던 것이다. 마리카는 울기보다는 웃는 쪽을 택했다.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있지만 괴로운 일, 슬픈 일도 당연히 겪게 된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기쁨, 잔잔한 감동을 발견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마리카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책 <마리카의 장갑>에서는 '엄지장갑'이 굉장히 중요한 오브제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엄지장갑 없이는 살 수 없기도 하고, 이 나라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아름다운 엄지장갑을 끼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열두 살이 되면 치르는 수공예 시험에도 엄지장갑 뜨기가 들어있다. 남자에게 청혼을 받으면, 결혼식용 엄지장갑을 떠주는 것으로 승낙을 표현한다. 결혼식에도 엄지장갑이 빠지지 않는다. 신부가 준비한 궤짝 한가득의 엄지장갑을 나눠가지며 신랑신부를 축하한다. 엄지장갑 뜨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또 싫었던 마리카는 야니스를 전쟁터로 보내고 직접 실을 자아내어 장갑을 뜬다. 야니스가 앉던 자리에 털 뭉치를 올려놓고 뭉친 양털을 살살 풀면서 붙어 있는 건초나 잔돌을 제거하는 마리카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이를테면 차근차근, 서두르지 않기. 좋은 털실로 뜬다는 출발점을 소홀히 하지 않는 점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엄지장갑을 떠야 받는 사람에게도 그 기운이 전달된다고 믿는 마리카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뭉근하게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팔디에스(Paldies, 고마워)
소설 속에는 '팔디에스'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마리카가 장갑 뜨기를 배우고 나서 할머니에게, 야니스가 자신의 엄지장갑 안 떡갈나무 잎에 새겨 마리카에게, 마리카가 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책을 읽는동안 수십번 '고마워요'하고 말했다. 마리카에게, 야니스에게, 마리카를 감싼 루프마이제공화국의 호수에게, 잘 자라준 칠엽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