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무늬를 어루만지다 - 어제의 나와 화해하는 내 마음 셀프 테라피
조영은 지음 / 레드박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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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마음은 이상하다. 늘 그랬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마음이 불편할 때, 이상신호를 보내올 때만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러니 늘 이상할 수밖에. 심리학자처럼 마음을 잘 알면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심리학 책도 읽어보고, '마음 다스림'이라는 키워드로 검색되는 여러 책들도 들춰보았지만 늘 돌아오는 답들은 비슷했다. 이 책 <마음의 무늬를 어루만지다> 역시 그 대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위로가 되었다. 표지 이미지처럼 어두운 밤을 반짝, 밝혀주는 촛불 같았다. 책은 초를 켜기 위해 성냥을 찾아드는 순간에 큰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마음의 이상신호를 감지하고 스스로 이 책을 찾아 들었다는 것 자체에 진한 밑줄을 긋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리적인 문제를 겪게 마련이고, 죽기 전까지 평생 동안 마음이 일으키는 갖가지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혹자는 (혹은 어떤 책의 카피는) '인간은 쉽게 변화할 수 있고 심리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라고 외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각자 다른 기질을 타고 태어났으며, 다른 경험들을 쌓아왔기 때문에 심리적인 문제에서만큼은 질문이 같다 하더라도 같은 해법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름 가운데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지점들은 있다. 각자 다른 환경에 처했지만,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것만큼은 선명한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프리 영(Jeffery E. Young)이 만성적인 심리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개발한 '심리도식치료(Schema Therapy)'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리도식'이라는 말이 좀 낯설었는데, 책에 의하면 '광범위하고 만연화된 패턴'으로서 성장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기억과 감정, 신체 감각, 인지로 구성되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상, 대인관계상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타고난 기질과 쌓아온 경험이 만든 오늘의 내'가 어떤 특정 선택(혹은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것이 이 책 제목에 쓰인 '마음의 무늬'다.

꽤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을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책은 쉽게 쓰였다. 특히 성격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누고 그 유형에 맞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아서 좋았다. (그 경우 나의 성격을 굳이 어떤 것에 끼워 맞추게 되니까) 책은 이론을 소개하는 것보다 버림받음, 정서적 결핍, 사회적 소외, 특권의식, 자기희생 등의 18가지 키워드를 풀어내는 데 더 집중하고 있는데 그 점도 좋았다. 저자가 심리상담가로 일하며 만나왔던 수많은 케이스들이 집약되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무엇보다 '감정'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감정은 찰나의 것,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감정은 우리 안의 것, 혹은 밖의 것을 '느껴서' 만들어내는 마음의 형태다. 그것은 나의 오늘을 드러내는 동시에 앞으로의 나를 움직이게 할 원형적 에너지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의 무늬를 잘 살필 것. 늘 같은 지점에서 펜끝이 맴돈다. 오늘도, 나에게 잘하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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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평전
박현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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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에 대한 나의 지식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할아버지인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 영조-정조 시대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제일 평탄했던 때였으며, 해서 문화와 예술도 발달할 수 있었다고. 그냥 그쯤에서 그쳤던 것이, 지난해 김홍도 전시를 보면서 다시 보이게 됐다. 전시를 관람하러 가면서 기대했던 것은 역시나 그의 풍속화였다. 하지만 전시의 대부분은 정조와 함께 한 시간으로 꾸려져 있었다.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이 사람 나랏일 했었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이후에 관심이 생겨 김홍도와 관련한 몇 권의 책을 읽었더니 역시나, 정조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화원이었다. 영조에 이어 정조의 어진을 그렸을뿐더러, 의궤 제작과 같은 일상적인 도화서의 업무에서도 제외하고 어명에 따른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화성에 행차했던 기록화를 살펴보며 정조와 김홍도의 그때를 상상했다. 이 책 <정조 평전>은 그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 책 <정조 평전>은 정조의 정치적 업적만을 나열하고 있지 않다. 외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서술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생각해보면 정조의 유년기는 그 누구보다 불행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물론이고 그 앞의 임금 영조조차도 그에게 듬직한 의지처가 되지 못했다. 의지처는커녕 오히려 '죄인의 아들'이라는 묵직한 짐을 남기고 떠났다. 신하들 역시 서로 당색이 달라 사사건건 대립하고 갈등했다. 왕실이나 조정 어느 한곳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정조가 겪어야 했던 고독과 좌절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럼에도 그는 좋은 정치를 했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좋은 세상이었고, 그가 하려던 일은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샀다. 읽는 내내 그의 지혜가 탐스럽다 생각했고, 그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정조의 인재 경영 방식이었다. 정조는 사람들의 개성이 다양함을 알고 그들의 생김대로 인재를 이용하려 했다. 공자가 제자 3000명에게 각기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는 대목과도 엇물려 흥미롭게 읽혔다. "봄이 만물을 화생하여 제각기 모양을 이루게 하듯이 좋은 말 한마디와 착한 행실 한 가지를 보고" 그 장점을 살려 써야 한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나아가 인재를 가려내고 활용하는 주체로서 왕의 존재를 강조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좋았다. 그에게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차근히 풀어내갈 줄 알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도 알았다. 그리고 실천했다.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얼마나 무겁건, 그것을 남에게 지우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사실- 역사를, 특히 한국사를 다시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다. 이건 좀 의식적으로라도 들여다봐야 하는 부분이라고.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존재하기 전에, 이 땅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던지- 그들은 어떻게 이 땅을 꾸려나갔던지 아는 것은 결국 나의 오늘을, 또 나의 내일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사도>를 다시 한번 봐야지, 하고 생각한다. 다시 보면 좀 더 마음이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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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 나를 지키는 일상의 좋은 루틴 모음집
신미경 지음 / 뜻밖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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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었다. 새 노트를 꺼내고, 으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올해의 목표를 적어보았다. 목표라고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쓰고 보니 달라지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 어제의 내가 그랬듯, 오늘의 나도 열심히 살기. 무엇보다, '나'로 살기. 좋아 보이는 누군가를 따라가기 급급한 삶만은 절대 지양하기. 나의 속도를 가까운 사람들의 속도와 맞추어가며 조금씩 나아간다. 아니, 그게 제자리걸음일지라도 괜찮다. 그런 말들을 '올해의 목표'라고 쓴 페이지 아래에 구구절절 썼다. 그래도 조금은 비장한 마음도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어설픈 자기 위안 같아서 조금 웃겼다. 아, 나 요즘 칭찬이 필요한가, 하면서.

모르겐 몰라도 이 책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비슷한 마음으로 쓰인 글이다. 완벽한 평화가 깃든 그녀의 공간을 엿보는 일은 복작복작, 한시도 조용할 틈 없는 내게 동경의 대상처럼 읽혔다.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의 고요한 평화를 위해서 아침에 청소를 한다니. (말끔하게 청소된 집은 아이의 하원과 동시에 난장이 되는데u_u...) 그런 여유가, 또 평화로움이 짐짓 부러웠다. 생각해두었던 저녁 메뉴가 있건 없건- 아이의 "안 먹을래, 나는 이거 줘"하는 한마디에 휙휙 변하고야 마는 저녁상도, 아이를 재워두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오늘은 엄마랑 꼭 같이 잘 거야"하는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도 책 속의 그녀를 동경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기와 동경은 사라지고 그녀와 나만 오롯이 남았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을진대 누가 누구의 삶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의 삶에서 가져와 내 삶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만한 습관은 잘 메모해두었다. (그 사이에는 나를 칭찬하는 말도 꽤 많았다. 아마도 나는 '그래, 나도 멋져! 나도 잘 살고 있어!'하는 생각을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완벽한 평화가 너무 부러운 나머지'ㅁ'...)

책을 읽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 이불 정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잠든 후에는, 아이 놀이방도 깨끗하게 치워둔다. 어차피 밤에 다시 들어가잖아? 이렇게 치워봐야 아이가 등장하는 순간 다시 엉망이 될 텐데-하는 생각으로 정리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하는 이불 정리와 밤늦게 하는 아이 놀이방 정리는 스스로 하루를 잘 시작하고, 또 마무리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늘 복작하던 식탁 위와 책상 정리도 마찬가지. 너무 소소해서 그게 무슨 큰 변화를 가져오겠어? 싶은 것들이 의외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해의 시작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나만의 좋은 루틴 만들기.

어떤 순간에도 임시의 삶은 없다.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일은 어떤 예측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을 살고 있고, 여기에 있는 나를 잘 돌보며 사는 것만큼 확실한 만족을 주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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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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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의 마지막 토요일 밤, 이 책을 집어 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어느덧 두 시임을 확인하고 잠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읽던 책을 마저 읽는다. 꿈 속인가,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건 아닌가, 싶게 예뻤던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소설 <마리카의 장갑>은 보기 드물게 성실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첫 장면은 마리카의 탄생이고, 그 마지막은 마리카의 죽음이다. 다소 밋밋할 법도 한 구성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순식간에 빠져들고, 금세 온몸의 감각이 마리카에게로 집중된다. 마리카의 삶이 어느 위인 못지않게 다이내믹했던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를 감싸고 있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은 계속해서 반짝거리는 빛을 낸다. 사실 이토록 소담하고, 정답고, 착한 일대기를 이제까지 본 일이 없다. 기록될만한 일생은 늘 폭풍우를 만나 이겨냈거나, 괴물을 무찌르거나,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선택을 과감하게 해낸 이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좀 달랐다.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마리카는 야니스라는 남자를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누고, 뿌리를 아주 튼튼히 내린 가정을 꾸린다. 얼음제국의 침략과 전쟁의 상흔, 야니스의 징병 같은 어두운 문제도 녹아 있지만, 모두들 울기보다는 웃는 쪽을 택한다. 그 동화 같은 선택이, 상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이 책은 발끝부터 지릿지릿 뜨끈한 것이 올라오는 온기의 책. 올해 마지막 일요일을 더없이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던 책이었다.

마리카의 일생은 파란 많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생애였다. 마리카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루프마이제공화국(마리카의 나라)이 얼음제국에 점령되면서 남편 야니스가 연행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시련을 겪는다. 사실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을 젊은 날 잃어 평생을 혼자 그리움에 지내야 하는 일은 크나큰 시련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시련의 흔적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로 숨겨진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랬던 것이다. 마리카는 울기보다는 웃는 쪽을 택했다.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있지만 괴로운 일, 슬픈 일도 당연히 겪게 된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기쁨, 잔잔한 감동을 발견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마리카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책 <마리카의 장갑>에서는 '엄지장갑'이 굉장히 중요한 오브제다.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엄지장갑 없이는 살 수 없기도 하고, 이 나라 사람들은 화려한 색깔의 아름다운 엄지장갑을 끼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열두 살이 되면 치르는 수공예 시험에도 엄지장갑 뜨기가 들어있다. 남자에게 청혼을 받으면, 결혼식용 엄지장갑을 떠주는 것으로 승낙을 표현한다. 결혼식에도 엄지장갑이 빠지지 않는다. 신부가 준비한 궤짝 한가득의 엄지장갑을 나눠가지며 신랑신부를 축하한다. 엄지장갑 뜨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또 싫었던 마리카는 야니스를 전쟁터로 보내고 직접 실을 자아내어 장갑을 뜬다. 야니스가 앉던 자리에 털 뭉치를 올려놓고 뭉친 양털을 살살 풀면서 붙어 있는 건초나 잔돌을 제거하는 마리카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이를테면 차근차근, 서두르지 않기. 좋은 털실로 뜬다는 출발점을 소홀히 하지 않는 점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엄지장갑을 떠야 받는 사람에게도 그 기운이 전달된다고 믿는 마리카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뭉근하게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팔디에스(Paldies, 고마워)

소설 속에는 '팔디에스'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마리카가 장갑 뜨기를 배우고 나서 할머니에게, 야니스가 자신의 엄지장갑 안 떡갈나무 잎에 새겨 마리카에게, 마리카가 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책을 읽는동안 수십번 '고마워요'하고 말했다. 마리카에게, 야니스에게, 마리카를 감싼 루프마이제공화국의 호수에게, 잘 자라준 칠엽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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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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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에세이는 한 줌의 '눈'같다고 생각한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다리면 손바닥 위로 뭔가가 쌓이기는 하는데 그러기 무섭게 녹아버리고 만다. 그런 이유로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수필'이라는 말을 두고 굳이 '에세이'라 쓴 글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어쩐지 손이 가는 책이 있다. 이 책 <웃어라, 내 얼굴>도 그랬다. 받아드는 순간, 담겨있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게 설령 한순간에 녹아버릴 한 줌의 싸락눈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열었다.

 

김종광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20년 차 소설가라는데, 책 꽤나 읽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나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뭔가 좀 짠해오기도 했다. 책에는 그런 순간들이 숨김없이 적혔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일이지만- 포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무려 51권의 책이 쏟아진다.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해 온 그가, 대학에서 강의도 하는 그가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내면의 심란함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게 대단하다 생각되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바람을 얘기하자면, 올해에도 한 달에 200만 원 정도는 벌 수 있는 일거리가(원고 청탁이) 꾸준히 들어와주고, 한두 권의 책을 출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아가 그 책을 보게 될 소수의 독자에게 의미 있는 독서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간단히 말해서 소설가로 직업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본문 중에서, 204쪽)

한때 영화인으로 살기를 꿈꾸었고, 영화판에 짧게나마 몸담았던 적 있던 나는 바로 그 문제, 영화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위협감에 영화를 내려놓았다. 엄청난 고민과 결심 끝에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몇 달간(아니 사실은, 거의 일 년 반 동안) 급여가 나오지 않았고,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이러다가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화판에서 나와버렸다.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에(사실은 아주 좋았던 기회에) 영화과에서 시간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영화를 계속해보라고 말해야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처지에 놓이게도 되었었다. 그 묘했던 아이러니의 순간들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마주하니 입안이 텁텁했다.

하지만 그 텁텁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금세 웃었고, 또 짠해 하다가- 아휴, 하고 같이 한숨 쉬고 에이 뭘, 하고 툴툴 털어내 버렸다. '왜 꼭 우리는 이기려고만 하는가.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져야 하는가. 다 같이 승리할 수는 없는가.'하는 문제 제기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온라인 게임에는 있다.'하는 다음 문장에서 푸핰, 그렇지! 하고 웃어버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웃음 뒤에는 무언가가 있다. 가족의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중년의 가장이 있고, 내년에도 계속 쓸 수 있을까-하는 20년 차 소설가의 고민이 있다. 그래, 그러니까 여기에는 '실존'의 문제가 담겨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그래 싸락눈도 꾹꾹 힘을 모아 뭉치면 단단해지지, 나는 왜 이제까지 그것이 그냥 녹아 없어지도록 보고만 있었던 걸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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