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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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과 표지만 보고, 조용히, 고즈넉하게, 쓸쓸히, 오롯이, 가만히, 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한때는 당연하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마치 꿈같은 단어들. 그래서인지 책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무거운 첫 장을 넘겼을 때, 그 안에는 또 다른 내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했기에 놀랐고, 반가웠고, 슬펐고, 끝내는 고마웠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 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연산홍이 붉은 물을 올리고 있다고, 등이 굽은 아버지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일하러 갔다고,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깊은 밤에 식구들은 하염없이 잠이 들고,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솔 하나를 떠올리며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노란 민들레가 대견하게 꽃을 피우며 새벽을 부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질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언어를 꺼내지 못한 실패자가 된 나는 필사 노트를 펼쳐 시집의 한 페이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천천히 베껴 써 내려갔다. (본문 중에서, 42-43쪽)

그녀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던 시간들 끝에 시가 있었다. 시를 읽고 쓰는 사람 모두가 시인이라면, 그녀는 마땅히 스스로를 '시인'이라 칭해도 좋았지만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시로 차올라있었다. 그런 때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3년 전부터는- 복잡한 가정사로 동생의 두 아이를 돌보게 됐고, 거기에 더해 집안일도 완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너 편하라고 내가 나가서 일하는데."라고 말했다. 그게 얼마나 섭섭한 말인지, 엄마 스스로가 잘 알면서도 그랬다. 그렇게 그녀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지는 와중에도 시를 올려다보았으나,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시를 쓰는 대신 유리창을 닦았고, 화장실을 청소했고, 싱크대를 정리했다. 집안을 살뜰히 보살피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어떤 미션을 치르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치우고 쓸고 닦았다. 그 일들은 앞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 어제 했던 일은 오늘 또 새로운 미션이 되어 돌아왔다. 매일매일 거르지 못하는 일인데다 거를 수도 없는 일의 무한 반복. 그 사이에서 그녀의 언어들은 생기를 잃어갔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와 마침내 노트와 연필을 마주했을 때는,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였다. 피어나는 꽃잎도, 흩날리는 바람결도, 스산하게 비치는 달빛도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을 테다. 그런 것들을 오롯이, 고즈넉하게, 가만히 음미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지치고, 지겹고, 지긋지긋한 나날들이었으니까.

그랬던 그녀가, 시를 쓰기로 했다. 내려놓지 못할 것 같았던 것들을 내려놓자, 꿈같던 단어들이 현실이 되었다. 그래, 그녀는 진작 그래도 좋았다. 엄마도 아니고 이모인데, 마흔 살이 많은 나이도 아닌데, 아직 그녀 안에서는 시가 차오르고 있는데- 못할 이유도 없었다. 며칠간 마음껏 잠을 자고, 시를 베껴 쓰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뜨거워졌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아 힘들었던 날들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위로가 됐다. 그녀가 쓴 시라면, 단박에 깊은 데까지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밤에는 그녀가 다시는 시집을 덮지 않기를 바라본다. 어딘가에서 그녀가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도 뭔가 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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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동네서점
배지영 지음 / 새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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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작은 서점을 꿈꾸고 있다. 많은 책을 취급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한 권 한 권 더 의미 있는 진짜 작은 서점. 그 안에서 책을 사랑하는 이웃들과 어떤 방식으로라도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뭐가 됐든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품고만 있다. 서점을 열자니, 그것도 '작은 동네 서점'을 열자니- 여러 가지 현실적인 질문들이 뒤따를 수밖에 없고, 그 질문들에 아직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책을 팔아서 월세는 낼 수 있는 거야?', '인터넷 서점을 어떻게 이기려고?', '요즘 누가 책을 읽긴 읽나...'하는 것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물음표에 나는 금세 눈만 꿈뻑거리게 된다.

그래서인지- 낯선 도시에 이르면 동네 서점에 들르게 된다. 작은 서점에서는 주인장의 취향이 서가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규모가 꽤 있는 서점에서는 어떻게 인터넷 서점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감탄한다. 일단 감탄은 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지방의 소도시라 할지라도, 인터넷 서점은 2-3일이면 집 앞으로 책을 배달해 주니까. (게다가 요즘 인터넷 서점의 굿즈는 얼마나 매력적인지!) ... 이 책의 씨앗이 된 '작가가 함께하는 작은 서점 지원 사업' 역시 지역의 동네 서점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작가'라는 직업이 낯선 지방 소도시에서는 동네 서점에 작가가 상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전환이 될 테니까.

이 책 <환상의 동네서점>은 그렇게 쓰였다. 군산 한길문고가 '작가가 함께하는 작은 서점 지원 사업'에 지원하면서 배지영 작가를 '상주작가'로 품게 된 것이다. 크아, 작가가 상주하는 서점이라니. 그것만으로 책을 사랑하는 동네 사람들이 서점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실 사업 이전에도 한길문고는 군산 사람들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데모 나갈 때 가방을 맡아주던 서점, 한없이 책을 읽고 있어도 눈치 주지 않던 서점, 용돈을 모아서 처음으로 사고 싶었던 책을 산 서점, 아무 때든 좋다고 공간을 내어준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군산 사람들은 저마다 한길문고에 대한 추억 한두 개쯤은 품은 채 살았다. 하지만 사업이 주는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쓰고 싶었던 사람들이 '쓰기 시작했다'는 것, 오래된 동네 서점을 넘어 한길문고가 군산 사람들의 '문화살롱'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빛을 받는 물체만이 색깔을 가진다.

서점의 빛은 독자들의 발걸음이 만들어준다.

독자들의 다정한 입소문도 서점의 빛이 되어준다. (본문 중에서, 30쪽)

 

'상주작가'가 된 배지영 작가는 한길문고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설레는 마음으로 '엉덩이로 책 읽기 대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면서(무려 서점에서!) 추억을 쌓았다. 독서모임과 에세이 쓰기 수업을 하면서는 읽고 싶고, 쓰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상주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은 쓰고 싶다는 욕망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이런 나도 괜찮을까'하는 조금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마음은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 사이, 누군가는 지역의 매거진에 연재를 시작했고, 다른 누군가는 브런치에서 상을 받아 출간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동네 서점이 낳은 작가들이 늘어갔다. 그 모든 게 신기했다. 사실은, 기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읽고 쓰며 다시 인생의 성장기에 들어선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에도 작은 씨앗들이 뿌려지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으샤으샤, 일상의 많은 일들이 읽고 쓰는 일을 후순위로 밀어내 버리지 않도록 내 마음에도 물을 잘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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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어 완역본) - 톨스토이 단편선 새움 세계문학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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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열두 살 되던 해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읽을만한 고전을 탐색해서 한참 읽을 때였는데, 이 책을 골랐던 것은- 그저 단편이었기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모르긴 몰라도 마치 이솝우화를 읽는 마음으로 읽었던 것 같다. 이야기에는 선명한 교훈이 있었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때의 내가 어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IMF로 국가 경제 위기 상황이었던 그 때 엄마는 집에 있던 금붙이를 '금 모으기 운동'에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몇 번이고 '아나바다 운동'에 대한 표어나 포스터를 그려내야 했다. 사실 몸으로 느껴지는 경제 위축 상황이랄 것은 없었지만- 세상은 내게 끝없이 지금이 '위기 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던 때였기에- 몇 돈 되지도 않는 나의 돌 반지를 모으면 우리나라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던 때였기에, 톨스토이의 이 착한 이야기들도 그저 하나의 신화처럼, 혹은 성경처럼 읽힐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야- 이 책을 다시 읽게 됐다. 하필 지금이 코로나 시국이라는 것이, 읽는 동안에도 왠지 마음 쓰였다. 하필 이 책을 다시 읽는 지금이 그때의 IMF와 계속해서 연관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저 우연일까. 아니라면, 이 이야기가 오늘의 내게 전하고자 하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이 순간에만 우리가 스스로를 어찌할 수 있기 때문이라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이 만난 그 사람이오.

왜냐하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상대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지.

오직 그것을 위해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라오.(본문 중에서)

 

이 책이 담고 있는 열세 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표제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이 하나님께 받은 질문과 같기도 한 그것은) 사람들 속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들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너무나도 근본적이어서,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들에 톨스토이는 천사의 입을 빌려 대답한다. "내가 깨달은 것은 각 사람은 자신에 대한 돌봄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살아 있다는 것이다. ... (중략)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이 제 자신을 위해 어찌할까 궁리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44쪽)" 생각해보니 늘 그랬다. 어머니에게는 아이들의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게 허락되지 않았고, 부자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불투명한 것이었다. 부자에게 필요한 것이 산 자를 위한 부츠인지, 저녁 무렵 죽은 자를 위한 실내화인지 명료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아무리 똑똑하거나 부자인 사람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밖에 없음을- 오직 이 순간에만 우리가 스스로를 어찌할 수 있을 뿐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세상은 맑아진다. 불투명한 미래가 아니라, 선명하게 보이는 지금을 함께 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빵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오늘 먹을 빵은 이미 충분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이 빵을 남겨두어야 할지 고민한다. 빵을 나누어주고 나면, 내일 굶게 될까 봐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치의 빵을 저장해두면, 이번에는 모레 굶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결국 우리는 아무리 충분한 빵을 가졌더라도 빵을 나누어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빵이라는 것이, 영원불변한 무엇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러다 오늘과 같은 위기 상황을 만나면, 그제야 주위를 돌아본다. 아무리 개인주의, 성과주의 사회라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 묶여 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제 이야기'나 '사람에게 땅이 많이 필요한가?', '노동, 죽음, 병'같은 텍스트가 유독 의미 있게 읽혔던 것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앞만 보고 달려나가느라, 혹은 더 높은 곳이 더 좋은 곳일 거라고 막연하게 믿어왔던 날들에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매시간 죽음이 도사리는 환경에서라야- 우리는 각 개인에게 유일하게 합리적인 일은 합치와 사랑 가운데 각자에게 주어진 해와 달과 시와 분을 즐겁게 보내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야 다시, 처음의 질문이 남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 안에는 무엇이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 그 질문에 우리만의 대답을 찾아가는 동안, 이 어지러운 시국도 끝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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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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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가족이 둘러앉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야기는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무 어릴 때여서 기억의 한 조각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그때는 오로지 부모님의 기억만으로 생생하게 피어난다. 매번 같거나 비슷한 레퍼토리이지만 그 이야기를 한 번 더 듣는 것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부모님 기억 속의 어렸던 내가 여전히 생생한 존재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기억도 자주 꺼내 들여다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게 마련이니까. ... 그 이야기의 끝에 이 소설 <침묵 박물관>을 읽었다.

어쩐지 묵직하게 느껴진 '침묵 박물관'은 아직 세워지지 않은, 하지만 곧 세워질 박물관이었다. 이야기는 박물관을 세우고자 하는 '노파'와 그녀의 수양딸인 '소녀', 노파의 집에서 이런저런 일을 봐주던 '정원사'와 함께 박물관 기사인 '나'가 침묵 박물관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노파가 박물관을 위해 내어놓은 것은 아주 오랫동안 모아온 누군가들의 유품이었다. 딱 한점인 그것은 한두 번 입은 옷이라든가, 옷장에 모셔두기만 한 보석이라든가, 죽기 사흘전에 맞춘 안경이라든가 하는 것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내가 찾는 건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야. 그게 없으면 살아온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는 그 무엇. 죽음의 완결을 영원히 저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지.(본문 중에서, 47쪽)"라는 그녀의 말속에서 이상한 자부심과 단단한 결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노파가 모아온 유품을 정리하고, 보다 오래 보존하기 위한 약품 처리를 하고, 노파의 이야기를 수집해 전시장에 내어놓을 준비를 한다.

유품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구술된 것은 아니지만, 노파의 단호한 음성, 세심한 소녀의 몸짓, 맡은 바를 성실하게 해내는 정원사의 뒷모습 같은 데서 그네들 모두의 삶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마구간이 '침묵 박물관'으로 변모해갈 때- 그 공기의 순환이 그들이 그때 거기, 함께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도 누군가는 삶을 마감했다. '나'는 노파의 명령에 따라 유품을 수집하러 나선다. 늙은 의사의 '귀 축소 수술 전용 메스'는 그의 탐욕을 집약한 것일 테고, 무엇을 유품으로 정해야 할지 몰라 살해장소에서 다급하게 뜯어낸 '풀 한 포기'는 그녀가 세상에 내민 마지막 손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삶이 어땠는가를 되짚어보려고 애쓴다.

그러고 보면 '유품'이란 것은 절대로 당사자가 정할 수 없는 것.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숱한 물건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보다 더 의미 있었는지를 그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이 정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곧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의 문제. 기억 속에서 죽은 이는 여전히 살아있고, 심지어 재창조된다. 마치, 노파의 오래된 이야기처럼.

시대별로 구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유품은 그 안에서 동등하게 전시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건 아니건, 그것은 침묵 박물관 안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값비싼 보석도 단지 원자 결합에 불과하고, 징그러운 하등생물도 아름다운 세포 배열을 갖고 있음을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온 세상이 그의 삶이 하찮았다고 할지라도 침묵 박물관은 그가 그저 이 세상에 존재했음에 의미를 둔다.

어쩐지 으스스 해지기도 했고, 섬찟해지는 순간도 적지 않았지만- 유품을 하나하나 다루는 동안만큼은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쓰레기통 속의 썩은 채소에서도 기적적인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경건해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늘 그랬다. 이미 사라졌을 어떤 것을 보존하는 공간. 그렇다면, 또렷한 흔적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도- 어디에선 가는 기억되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침묵 박물관'의 묵직한 문을 슬며시 밀어본다. 누군가의 삶과 끈끈하게 유착된 유품들 사이에서,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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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간 스파이
이은소 지음 / 새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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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남조선에 남아 하나의 임무를 더 맡게 된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다. 훈련은 충분히 받았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여기 사람들은 어떤 말을 쓰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여러모로 낯선 이 땅에서 혼자 느끼게 될 그리움, 애틋함, 정 같은 것은 모르며 살도록 감정 억제 훈련까지 받았다. 덕분에 어떤 훈련도 임무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임무는 조금 달랐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인민군도 무서워한다는 중2를 상대하는 것. 그녀는 '임해주'라는 이름으로 남조선의 영어 선생님이 된다.

 

해주의 시선으로 본 한국은 이상하다. 스물네 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 도덕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이기주의자, 질서도 규칙도 예의도 본분도 협동도 모르는 아새끼들이 득실득실하다. 학생은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멀쩡한 음식들이 삽시간에 음식 쓰레기가 되어간다. 학생들이 교실을 떠나고 나면, 교사는 교실을 말없이 청소한다. ... 남조선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해주는 매일같이 당황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이상한' 이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해주의 감정을 들었다 놓는다. 그렇게 '당혹스러움'으로 깨어난 해주의 감정은 걷잡을 수없이 말랑해져 간다. 그저 임무 수행의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이기 시작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보조자 역할을 해주던 강석주는 어느새 내 편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다. 거기에 시가 한 편, 두 편 얹어진다.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읊었던 시들은 강석주의 따뜻함을 타고 해주를 녹인다.

그렇지만 한순간도 주어진 임무를 잊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던가'라고 묻는다면 그 역시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학교에서의 해주는, 임무만 성공하면 언제라도 떠날 방관자이면서도 아이들에게 꽤나 적극적인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주어진 각기 다른 두 개의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해주는 당혹스러움을 점차 지워간다. 그러니까, 좀 더 진심으로 '임해주 선생님'이 되어 갔던 것이다.

 

"좋아요. 전투입니다."

나는 7반 모여, 소리치고 강석주의 명치에 물풍선을 던진다. 7반대 8반, 물풍선 전투를 한다. 소나기 폭탄에, 물풍선 폭탄에 전투는 점점 치열해진다. 아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는다. 하지만 아이들이 웃는다. 진짜 웃음을 짓는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른다. 즐거워서 함성을 지른다. 아이들을 옥죄는 고삐도 코뚜레도 편자도 안장도 밧줄도 없다. 아이들은 자연이다. 본연의 모습으로 웃고 떠들고 뛰고 소리 지르고 던진다.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제 심장을 가격하는 물풍선에도, 제 몸을 적시는 빗물에도 행복해한다. 아이들은 재미에 기쁨에 자유에 흠뻑 젖는다. (221쪽)

 

해주와 석주, 그리고 두 사람이 맡은 반 아이들의 물풍선 전투는 이긴 편도 진 편도 없이, 한 편의 아름답고도 즐거운 축제로 끝났다. 에너지를 모두 쏟아 웃고 떠들고 뛰고 소리 지르고 던진 다음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전투라 명명되었지만, 결코 전투가 아니었던 그것은 그저 함께 있음으로 완성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해주와 석주는 평생을 지배했던 사상과 신념이 '아주 조금은'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해주는 질서도 규칙도 예의도 본분도 협동도 모르는 아새끼들에게서 '자유'를 발견해낸다. 모두들 자기 이익만을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도 꼭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는 있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바꾸어준 시선에, 해주는 '이상했던' 남조선을 '무질서하고 시끄럽지만 예쁘다'라고 되뇌게 된다. 그런 해주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 역시 생각이 많아진다. 가볍게 시작했는데, 그 끝에는 남과 북이라는 분단 상황에 대해, 진짜 교사와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탈북민에 대한 편견들에 대해서.

덧.

1.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이야기가 내내 맛깔나게 읽혔다. 이은소 작가님의 전작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도 그랬는데, 이 소설 역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우리는 진짜 같은 민족입니까? 우리는 진짜 같은 편입니까? 국제 정세, 남한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적입니까?"(본문 중에서, 270쪽) ... 해주가 미처 묻지 못한, 그 질문이 오랫동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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