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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소설의 제목과 표지만 보고, 조용히, 고즈넉하게, 쓸쓸히, 오롯이, 가만히, 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한때는 당연하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지는 마치 꿈같은 단어들. 그래서인지 책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무거운 첫 장을 넘겼을 때, 그 안에는 또 다른 내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했기에 놀랐고, 반가웠고, 슬펐고, 끝내는 고마웠다.
며칠째 읽고 있는 시집과 필사 노트, 흰 종이와 잘 깎은 연필 한 자루. 나는 차례대로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무엇이든 한 장을 채워야 잘 수 있다는 주문을 건 사람처럼 흰 종이를 노려봤지만 선뜻 연필을 쥘 수는 없었다. 연산홍이 붉은 물을 올리고 있다고, 등이 굽은 아버지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일하러 갔다고,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깊은 밤에 식구들은 하염없이 잠이 들고,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솔 하나를 떠올리며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노란 민들레가 대견하게 꽃을 피우며 새벽을 부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벙어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면 이 갑갑증이 좀 나아질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의 전공이, 마흔 살이라는 중압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조카들에게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나의 현실이, 내가 자처한 족쇄에 엉켜 탈출할 수도 없는 이 집이, 나에게는 육중한 관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언어를 꺼내지 못한 실패자가 된 나는 필사 노트를 펼쳐 시집의 한 페이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천천히 베껴 써 내려갔다. (본문 중에서, 42-43쪽)
그녀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던 시간들 끝에 시가 있었다. 시를 읽고 쓰는 사람 모두가 시인이라면, 그녀는 마땅히 스스로를 '시인'이라 칭해도 좋았지만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시로 차올라있었다. 그런 때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3년 전부터는- 복잡한 가정사로 동생의 두 아이를 돌보게 됐고, 거기에 더해 집안일도 완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너 편하라고 내가 나가서 일하는데."라고 말했다. 그게 얼마나 섭섭한 말인지, 엄마 스스로가 잘 알면서도 그랬다. 그렇게 그녀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너지는 와중에도 시를 올려다보았으나,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시를 쓰는 대신 유리창을 닦았고, 화장실을 청소했고, 싱크대를 정리했다. 집안을 살뜰히 보살피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어떤 미션을 치르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치우고 쓸고 닦았다. 그 일들은 앞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 어제 했던 일은 오늘 또 새로운 미션이 되어 돌아왔다. 매일매일 거르지 못하는 일인데다 거를 수도 없는 일의 무한 반복. 그 사이에서 그녀의 언어들은 생기를 잃어갔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로 나와 마침내 노트와 연필을 마주했을 때는,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였다. 피어나는 꽃잎도, 흩날리는 바람결도, 스산하게 비치는 달빛도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을 테다. 그런 것들을 오롯이, 고즈넉하게, 가만히 음미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지치고, 지겹고, 지긋지긋한 나날들이었으니까.
그랬던 그녀가, 시를 쓰기로 했다. 내려놓지 못할 것 같았던 것들을 내려놓자, 꿈같던 단어들이 현실이 되었다. 그래, 그녀는 진작 그래도 좋았다. 엄마도 아니고 이모인데, 마흔 살이 많은 나이도 아닌데, 아직 그녀 안에서는 시가 차오르고 있는데- 못할 이유도 없었다. 며칠간 마음껏 잠을 자고, 시를 베껴 쓰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뜨거워졌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아 힘들었던 날들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위로가 됐다. 그녀가 쓴 시라면, 단박에 깊은 데까지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밤에는 그녀가 다시는 시집을 덮지 않기를 바라본다. 어딘가에서 그녀가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도 뭔가 써낼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