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로 간 스파이
이은소 지음 / 새움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남조선에 남아 하나의 임무를 더 맡게 된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다. 훈련은 충분히 받았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여기 사람들은 어떤 말을 쓰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여러모로 낯선 이 땅에서 혼자 느끼게 될 그리움, 애틋함, 정 같은 것은 모르며 살도록 감정 억제 훈련까지 받았다. 덕분에 어떤 훈련도 임무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임무는 조금 달랐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인민군도 무서워한다는 중2를 상대하는 것. 그녀는 '임해주'라는 이름으로 남조선의 영어 선생님이 된다.

 

해주의 시선으로 본 한국은 이상하다. 스물네 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 도덕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이기주의자, 질서도 규칙도 예의도 본분도 협동도 모르는 아새끼들이 득실득실하다. 학생은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멀쩡한 음식들이 삽시간에 음식 쓰레기가 되어간다. 학생들이 교실을 떠나고 나면, 교사는 교실을 말없이 청소한다. ... 남조선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해주는 매일같이 당황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이상한' 이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해주의 감정을 들었다 놓는다. 그렇게 '당혹스러움'으로 깨어난 해주의 감정은 걷잡을 수없이 말랑해져 간다. 그저 임무 수행의 대상이었던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이기 시작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보조자 역할을 해주던 강석주는 어느새 내 편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다. 거기에 시가 한 편, 두 편 얹어진다.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읊었던 시들은 강석주의 따뜻함을 타고 해주를 녹인다.

그렇지만 한순간도 주어진 임무를 잊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던가'라고 묻는다면 그 역시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학교에서의 해주는, 임무만 성공하면 언제라도 떠날 방관자이면서도 아이들에게 꽤나 적극적인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주어진 각기 다른 두 개의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해주는 당혹스러움을 점차 지워간다. 그러니까, 좀 더 진심으로 '임해주 선생님'이 되어 갔던 것이다.

 

"좋아요. 전투입니다."

나는 7반 모여, 소리치고 강석주의 명치에 물풍선을 던진다. 7반대 8반, 물풍선 전투를 한다. 소나기 폭탄에, 물풍선 폭탄에 전투는 점점 치열해진다. 아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는다. 하지만 아이들이 웃는다. 진짜 웃음을 짓는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른다. 즐거워서 함성을 지른다. 아이들을 옥죄는 고삐도 코뚜레도 편자도 안장도 밧줄도 없다. 아이들은 자연이다. 본연의 모습으로 웃고 떠들고 뛰고 소리 지르고 던진다.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제 심장을 가격하는 물풍선에도, 제 몸을 적시는 빗물에도 행복해한다. 아이들은 재미에 기쁨에 자유에 흠뻑 젖는다. (221쪽)

 

해주와 석주, 그리고 두 사람이 맡은 반 아이들의 물풍선 전투는 이긴 편도 진 편도 없이, 한 편의 아름답고도 즐거운 축제로 끝났다. 에너지를 모두 쏟아 웃고 떠들고 뛰고 소리 지르고 던진 다음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전투라 명명되었지만, 결코 전투가 아니었던 그것은 그저 함께 있음으로 완성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해주와 석주는 평생을 지배했던 사상과 신념이 '아주 조금은'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해주는 질서도 규칙도 예의도 본분도 협동도 모르는 아새끼들에게서 '자유'를 발견해낸다. 모두들 자기 이익만을 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도 꼭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는 있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바꾸어준 시선에, 해주는 '이상했던' 남조선을 '무질서하고 시끄럽지만 예쁘다'라고 되뇌게 된다. 그런 해주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 역시 생각이 많아진다. 가볍게 시작했는데, 그 끝에는 남과 북이라는 분단 상황에 대해, 진짜 교사와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탈북민에 대한 편견들에 대해서.

덧.

1.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이야기가 내내 맛깔나게 읽혔다. 이은소 작가님의 전작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도 그랬는데, 이 소설 역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우리는 진짜 같은 민족입니까? 우리는 진짜 같은 편입니까? 국제 정세, 남한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적입니까?"(본문 중에서, 270쪽) ... 해주가 미처 묻지 못한, 그 질문이 오랫동안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