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가족이 둘러앉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야기는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무 어릴 때여서 기억의 한 조각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그때는 오로지 부모님의 기억만으로 생생하게 피어난다. 매번 같거나 비슷한 레퍼토리이지만 그 이야기를 한 번 더 듣는 것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부모님 기억 속의 어렸던 내가 여전히 생생한 존재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기억도 자주 꺼내 들여다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게 마련이니까. ... 그 이야기의 끝에 이 소설 <침묵 박물관>을 읽었다.

어쩐지 묵직하게 느껴진 '침묵 박물관'은 아직 세워지지 않은, 하지만 곧 세워질 박물관이었다. 이야기는 박물관을 세우고자 하는 '노파'와 그녀의 수양딸인 '소녀', 노파의 집에서 이런저런 일을 봐주던 '정원사'와 함께 박물관 기사인 '나'가 침묵 박물관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노파가 박물관을 위해 내어놓은 것은 아주 오랫동안 모아온 누군가들의 유품이었다. 딱 한점인 그것은 한두 번 입은 옷이라든가, 옷장에 모셔두기만 한 보석이라든가, 죽기 사흘전에 맞춘 안경이라든가 하는 것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내가 찾는 건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야. 그게 없으면 살아온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는 그 무엇. 죽음의 완결을 영원히 저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지.(본문 중에서, 47쪽)"라는 그녀의 말속에서 이상한 자부심과 단단한 결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노파가 모아온 유품을 정리하고, 보다 오래 보존하기 위한 약품 처리를 하고, 노파의 이야기를 수집해 전시장에 내어놓을 준비를 한다.

유품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구술된 것은 아니지만, 노파의 단호한 음성, 세심한 소녀의 몸짓, 맡은 바를 성실하게 해내는 정원사의 뒷모습 같은 데서 그네들 모두의 삶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마구간이 '침묵 박물관'으로 변모해갈 때- 그 공기의 순환이 그들이 그때 거기, 함께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도 누군가는 삶을 마감했다. '나'는 노파의 명령에 따라 유품을 수집하러 나선다. 늙은 의사의 '귀 축소 수술 전용 메스'는 그의 탐욕을 집약한 것일 테고, 무엇을 유품으로 정해야 할지 몰라 살해장소에서 다급하게 뜯어낸 '풀 한 포기'는 그녀가 세상에 내민 마지막 손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삶이 어땠는가를 되짚어보려고 애쓴다.

그러고 보면 '유품'이란 것은 절대로 당사자가 정할 수 없는 것.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숱한 물건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보다 더 의미 있었는지를 그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이 정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곧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의 문제. 기억 속에서 죽은 이는 여전히 살아있고, 심지어 재창조된다. 마치, 노파의 오래된 이야기처럼.

시대별로 구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유품은 그 안에서 동등하게 전시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건 아니건, 그것은 침묵 박물관 안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값비싼 보석도 단지 원자 결합에 불과하고, 징그러운 하등생물도 아름다운 세포 배열을 갖고 있음을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온 세상이 그의 삶이 하찮았다고 할지라도 침묵 박물관은 그가 그저 이 세상에 존재했음에 의미를 둔다.

어쩐지 으스스 해지기도 했고, 섬찟해지는 순간도 적지 않았지만- 유품을 하나하나 다루는 동안만큼은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쓰레기통 속의 썩은 채소에서도 기적적인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경건해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늘 그랬다. 이미 사라졌을 어떤 것을 보존하는 공간. 그렇다면, 또렷한 흔적 없이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도- 어디에선 가는 기억되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침묵 박물관'의 묵직한 문을 슬며시 밀어본다. 누군가의 삶과 끈끈하게 유착된 유품들 사이에서,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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