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
김수정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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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애호가라 하기에는 멋쩍은 면이 있지만,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 앞에 서서 그간 만나왔던 이야기나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도 좋아하고,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어떤 그림이 불현듯 겹쳐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유럽을 여행하면서는 일정 중에 미술관만큼은 빼놓지 않고 꼭꼭 눌러 담았더랬다.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물론이고, 현지인만 찾을 것 같은 작은 미술관에도 들렀다. 그렇게 그림 사이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그림들이 좋았다. (사실 작품들 만큼이나 미술관을 산책하는 유럽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좋았다) 일상 가운데서는- 좋아하는 작가의 특별전이 열리면 다이어리에 표시해 두었다가 챙겨보곤 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볼지 모르는 작품들이라 여행 중에 부러 찾아갔을 때보다 더 마음이 갔다. 사실 그마저도 그렇게 열심히는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에라도 당장 갈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상에서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에는- 그마저의 미술관 산책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워킹맘이라는 일상의 무게에 조금씩 밀려나던 일이 코로나를 맞으면서 사회적 이유가 덧대어져 더 멀어졌다. 작품 사이를 산책하던 일도,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는 어떤 관람객의 뒷모습을 보던 일도 오래된 추억처럼 흐릿해져가던 찰나였다. 그러던 중에 읽은 이 책 <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는 기꺼이 내 방으로 미술을 불러들였다. 책장을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 저자가 미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가 사랑하는 미술을 우리 모두의 일상에 선물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폭신한 것인지도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아주 말랑말랑하게 누구나 쉽게 미술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이드 한다. 오르세 미술관이나 테이트 모던 등 유명한 미술관들의 공식 SNS 계정을 팔로우하는 것부터, wikiart를 브라우저의 시작 페이지로 설정해 두는 것(매일 오늘의 작품을 선정하여 보여준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갤러리를 검색하는 법이나 지금 하는 전시들을 찾아보는 법, 핸드폰을 활용해 가볍게 디지털 드로잉을 해보는 것까지- 저자는 아낌없이 자신만의 '미술을 가까이에 두는 법'을 소개한다.


책을 읽다 보니, 코로나도 워킹맘도 모두 핑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품을 대면했을 때 오는 위압감이랄지, 감동이랄지 하는 것들은 디지털로 쉬이 대체될 수 없는 무엇이기는 했다만- 디지털로 만났기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방식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나만의 색으로 그림을 채워본다던가, 뉴욕에 있는 그림과 파리에 있는 그림을 나란히 띄워두고 감상하는 것, 고화질의 작품을 다운로드해 500%로 확대해 작품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것 등등) 미술관에 가기 어렵다고, 보고 싶은 전시가 너무 멀다고 속상해할 것 없이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나만의 미술 루틴을 만들어야겠노라고 생각했다.



책이 소개한 많은 팁들 중 구글 'Art&Culture' 앱이 특히 좋았다. 매일 다른 주제의 아티클을 읽을 수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작품을 활용한 인터랙티브(작품을 활용해 직소퍼즐을 맞추게 한다던가, 컬러링을 하게 한다던가)도 흥미로웠다. 컬러를 선택하면- 그 컬러가 주로 쓰인 많은 작품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방식도 재미있다. 작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장소에 대한 이야기랄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아 예술 전반의 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마주치고, 자주 바라볼 것. 그러는 사이- 자연스럽게 나만의 미술 루틴이 쌓여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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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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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솔직히는, 책 뒤표지에 쓰인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갖춘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책을 읽기도 전에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단어들의 의미까지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미션처럼 느껴졌다. 그런 부담감 때문인지, 처음 몇 장은 지독하게도 안 읽혔다. '병풍'이 함축하고 있는바는 무엇인가. '사과밭'은, 또 '아버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또렷해질리 없었고, 그래서 그냥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오히려 뭔가 선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더랬다.

소설 <달에 울다>는 전에 읽어본 적 없던 독특한 외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시의 행과 같은 문장이 대여섯씩 이어져 한 문단을 구성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런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시'같기도 하고, '소설'같기도 한- 아니 어쩌면, '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한 이 이야기는 그래서 '시소설'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나 보다.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닌 이 독특한 텍스트는 너무 이완되지도, 너무 긴장되지도 않은 채 선연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표제작인 <달에 울다>는 아버지가 죽인 이웃집 남자의 딸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한 줄로 압축된 이야기 안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눈을 감아도 강하게 자극해오는 불빛 사이로 오직 소년만이 할 수 있는 순애보적 사랑이 비쳤을 때는- 그 어떤 순간과도 비견할 수 없이 영화적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늘 영화 같지만은 않아서, 대개의 순간 느리고- 지리멸렬하게 흘러만 간다. 사람들은 떠났고, 시간은 많이도 흘렀지만-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세상의 속도가 그만은 비켜간 듯- 오도카니 그 자리에 남아 그때를 계속해서 어루만진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결여가 생기더라도 더 이상 고립되지 않는다는 듯이.

굵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민 것도 문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병풍이 흔들리고 심하게 기운다. 이어서 맞은편을 향해 푹 쓰러진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빛도 어둠도 없고,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내 숨소리뿐이다. 잠시 후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훨씬 멀리서, 10년 후쯤의 지점에서 만개한 꽃을 단 사과나무 한 그루가, 또는 대여섯 그루가, 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그 모두가 확실하게 보이기 직전에 몸을 뒤척여 쓰러진 병풍에서 등을 돌린다. 조금 전까지 마을 하늘에 떠 있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본문 중에서, 114-115쪽)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조롱을 높이 매달고>에서는 열심히만 살았던 인생의 전반기를 매듭짓고 M 마을로 돌아온 남자가 등장한다. 오랫동안 열심히, 혹은 건성으로 밖을 내다보는 와중에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M 마을은 이미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고, 그가 거기에 산다고 해서 금방 속세로 바뀌지도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생의 후반기는 잠만 자면서 보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M 마을에서라면- 파도 소리, 바다 냄새, 산들바람, 단단한 지반, 산과 들에 가득한 상큼한 공기, 그 밖의 삼라만상이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었다. 가벼웠던 마음은, 풍화되어가는 M 마을과 함께 점점 녹슨다. 바닷바람 때문인가, 이미 속세를 오래 경험한 그의 지난날 때문인가. 첫날의 산뜻한 기분은 온데간데없다.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거기에 있어야 했던 남자와

대단한 결심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속세를 향해 떠나는 남자.

그리고 다시, <달에 울다>의 첫 페이지를 읽는다. 이야기의 처음 몇 장이 왜 그렇게 안 읽혔던지- 작가가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이미지는 무엇이었던지- 두 사람이 남긴 긴 그림자를 한참이나 보고 난 지금에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두 눈이 멀어 광대한 강변 일대에 쏟아지는 푸른 달빛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때가 꼬질꼬질한 그의 오체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있다. 팽팽한 현의 떨림은 미적지근한 밤 기운을 자극하여 봄을 증폭시키고, 병풍 옆의 초라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있는 소년의 아직 두부처럼 어린 영혼에도 깊이 스며든다. (본문 중에서,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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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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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안고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때로는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그리고 이 소설 <토우의 집>의 경우처럼- 개인은 세상과, 혹은 국가와 갈등하기도 한다. 소설은 시간적 배경을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단서를 그러모아볼 때- 70년대 즈음이 아니겠나 싶다. 큰 길 곁으로 골목마다 차곡차곡 집을 지어 살던 어느 마을- 큰 길 가까이에는 번듯한 나무가 정원에 들어선 큰 집들이 있었고, 산을 따라 난 길로 올라갈수록 좁고 허름한 집이 나왔다. 소설의 주인공 '원'이네는 그 중턱 우물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다. 원이네가 우물집으로 이사 들어오던 날, 사람들은 흘긋흘긋 원의 엄마를 보았다. 부동산 서류에 사인을 하는 필체하며, 옷차림이- 우물집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우물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까. 누구에게나 말하기 어려운 사정 하나쯤은 다 있을 테니까, 하는 얕은 생각으로 그들이 왜 우물집에 세 들어 살아야 했던지에 대해 한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더랬다.

그러던 사이, '원'과 우물집 둘째 아들 '은철'은 친구가 된다. 은철은 형인 금철을 따라 즐기던 넓이의 모험과 높이의 모험 대신 원과 함께 '스파이'가 되기로 한다. 마을의 비밀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자, 그간 들을 일도 없었고 별다른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원과 은철의 시선으로 쓰인 이 소설은 이따금씩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과부가 된 엄마와 사랑방 손님의 연정이 여섯 살 난 옥희의 시선 너머에 있어 더욱 애틋했듯- 이 소설 <토우의 집> 역시 원과 은철의 순진함을 빌려 나아간다. 아이들은 새로이 마주하게 되는 소소한 사실들에 놀라고, 괜히 억울해하며-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모르고' 사람들을 저주한다.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 거야?'하는 그 나이에서 겪는 가장 억울한 일들은 저주가 되어 뱉어졌다가도, 죄책감으로 그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 정말 원의 아버지가 아저씨들의 손에 끌려가야 했을 때는- 또 원이네 자매들이 그 이름처럼 영(원의 언니), 원, 희(원이 동생처럼 아끼는 인형) 마을을 떠나야 했을 때는 마음 깊은 데까지 저릿해져왔다.


인혁당 사건이라는 말을 담은 적 없지만, 그 시대 그 즈음- 그런 일이 흔했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원이네 가족이 삼벌레 마을로 숨어든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대의 아픔은 아무리 꽁꽁 숨겨놓아도 자꾸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그런 점에서- 영화 <금지된 장난>이 자꾸 떠올랐다. 원과 은철의 이미지는 종종 미셸과 뽈레뜨에 겹쳐 보였다. 총을 든 병사를 등장시키지 않고도 전쟁의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했던 그 영화는, 시대의 아픔을 전면에 내놓지 않고도 우리 사회의 아픈 날들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 소설과 여러모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은철에게, 원에게- 서로는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한 번도 등장한 적 없지만, 그 제목에 쓰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토우'를 다시 돌아본다. 오래전,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에 함께 묻히곤 했다는 토우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기도 했지만- 울고 웃고 즐기고 노동하던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표현한 모양새이기도 했다. 무덤의 주인공이 다음 세상에서도 현세와 같은 삶을 누리며 영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토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닥다닥 산기슭에 엉켜 붙어 삼벌레 고개라는 그다지 예쁘지도 못한 이름 사이에서도 사람 사는 냄새만큼은 고소하게 폴폴 났던, 그때의 그 계란 볶음밥 같은 것 아니려나. 힘든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버텨볼 만한 이유는 충분했더라고. 그러니, 그대들이여-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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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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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첫 장면에서 벤(니콜라스케이지 분)은 "아내가 떠나서 술을 마시게 된 건지, 술을 마셔서 아내가 떠난 건지 모르겠다"고 읊조린다.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진 기억 너머로 어렴풋이 존재하는 아내가 불현듯 떠오른 것은, 그의 삶이 다해가고 있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오늘, 어쩌면 내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벤은 오늘도 술을 마신다. 오늘의 기억이 흐릿해진 기억의 저 너머로 흘러가도, 언젠가의 기억이 선명하게 지금-여기에 나타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기억이란, 본래 선형적인 것이 아니니까.


#2. 점으로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에서 점과 점이 서로를 잇는 2차원의 세계로. 그보다 자유로워진 3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보다 늘 한 차원 아래만을 감각할 수 있는 우리 존재들은 4차원의 세계에 살면서도 3차원의 세계만을 감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5차원, 6차원, 어쩌면 11차원쯤의 세계가 있다고 할지언정 우리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5차원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면, 오늘의 R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3. R은 기억을 잃었다. 사고였는데- 사고 당일뿐만 아니라 여러 날의 기억이 사라졌다. 예고 없이 나타나는 장면들에 R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저리치지만 좀처럼 깨어날 수 없었던. 맥락 없는 기억의 조각들에 R은 맥없이 풀려버리고 만다. 이어지지 않는 낱장의 그림도, 잘 그러모아 놓으면 언젠가 온전한 한 장의 그림이 될까. R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기억할 뿐이었다.


연락처에 저장된 어떤 번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진과 메모가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R은, 모르는 R을 상상해야 했다.

R은 생각보다 더 R을 모르고. (본문 중에서, 13쪽)


기억은 언젠가의 R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장면들일 텐데, 그때 존재했던 R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R이 아닌 R을, 또다시 R이 지켜보는 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는 알고 지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시 뒤돌아보게 한다. 차라리 그들의 기억도 사라지고, 엉켜버렸다면. 그랬다면- 오늘의 혼란은 없었을까.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 나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저 사람들의 기억이 모두 섞여서 어떤 순간을 굳이 만들어내야 하는 거라면,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억에 동의할 수 있을까.

#4. 그럼에도 우리는 익숙한 세계로 기억을 데려다놓고자 한다. 감각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로 흩어져 버린 기억을 끌어당겨 익숙한 3차원의 시공간 속에 묶어둔다.


우리는 언제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을까요?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다는 발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말로 들리네요. 현실에서 마냥 발을 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공중에 붕 떠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실은 현실이죠. 리얼이즈저스트리얼. 리얼이즈팩트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팩트이즈팩트는 아니고요? 그렇게 되면 말장난에 불과하죠. 무엇이든 무엇으로부터 무엇에 지나지 않아 무엇도 되지 못하는 무엇에 불과한, 그 현상 혹은 상태를 현실이라고 대답해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본문 중에서, 121쪽)


리얼이즈저스트리얼,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엉켜버린 R의 낯선 세계가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종류의 자유로움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싶다. 감각하고자 했으나, 쉬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들의 세계는 흩어지고 사라졌기에 '그것인 채로' 괜찮았다. R도 R을 모르겠다는데, 어떻게 내가 R을 짐작할 수 있겠어-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억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R은 내가 그를 알기를 바랐을까. 이해할 필요도, 이해될 필요도 없는 세계는 멀리- 그러니까 5차원이나 6차원쯤에 있어서, 그 거리만큼 서늘하고- 서글프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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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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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과 바다>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그다지 길지도 않은 소설이었는데-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운 노인처럼, 나는 완전히 늘어진 채로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고작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긴 일이 이렇게까지 고된 것은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그와 함께 커다란 물고기와 사투를 펼치고, 또 그가 상어에게 뜯기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함께 겪어야 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 경험은 실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모르던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그랬다. 이 경험과 감각이 너무 낯설어서 책을 덮고는 한참 동안 옆으로 치워 두었다. 이 낯선 경험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전에 알고 있었던 것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서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들('뜻대로 안되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던가,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던가 하는 것들), 노인-물고기-바다가 상징하는 것들(많은 비평가들이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가장 풍부한 종교적 의미의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더랬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상징(?)은 노인은 성직자, 바다는 성모로 해석했던 것. 그 해석 안에서 마지막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헤밍웨이의 삶과 그의 작품들 등등의 것들이 모두 텍스트 안에서 자연스럽게 걷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읽어야 해'라는 (주입된, 혹은 교육된) 가이드가 사라졌을 때- (노인이 물고기와 그랬던 것처럼) 텍스트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사실,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의구심을 가졌던 것 같다. <노인과 바다>는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마치 한용운 선생님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곧 국가이고, 국가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읽었던 시간만큼- <노인과 바다>는 내게 상징의 범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치워내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나는 '살아있는 순간'과, 그러니까 생명의 순간과 마주칠 수 있었다.

무엇이 녀석을 요동치게 만든 걸까,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철사가 그의 거대한 언덕 같은 등에 씌워진 게 틀림없어. 확실히 녀석의 등은 나처럼 심하게 고통을 느끼지는 못할 테지.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크던지 간에 이 배를 영원히 끌 수는 없는 거야. 이제 문제 될 수 있는 모든 일이 정리되었고 나는 충분한 예비 다발을 가진 게야. 사내로서 더 바랄 게 없는 거지. "고기야." 그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 머물 거란다." (본문 중에서, 55-56쪽)

"물고기야," 그는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무척 존경한다. 그렇지만 오늘이 마쳐지기 전에 죽이고 말 테다." 우리 그렇게 되길 바라자꾸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본문 중에서, 57쪽)

낚시는 해본 적 없지만, 노인이 물고기와 보낸 시간은 내 손바닥이 저릿해질 만큼 실감 나는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물고기가 속도를 늦추었을 때, 그의 움직임이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졌을 때, 물고기가 잠깐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물고기가 어찌하려는지 알 수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물고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온전히 손에 감긴 낚싯줄에 의한 감각이었는데, 물고기와 더불어 바다 역시 요동치는 것이었으므로 그 사이에서 물고기의 움직임만을 알아채는 것은 굉장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물고기는 굉장히 컸다. 그를 굴복시키려 했다가는 외려 그에게 굴복당하고 말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인은 물고기를 굴복시키는 대신 설득하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물고기와 노인이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정성을 다해 무엇인가를 마주하는 경험,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하는 싸움. 상대가 넘어지면 자신 역시 넘어지고 말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합치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협상의 과정. 그것은 곧 (어떤 형태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했다.

녀석은 굉장한 물고기니 납득시켜야만 한다, 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녀석이 달아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도 잇다는 것과 그 자신의 힘을 알게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녀석이라면 당장 모든 힘을 다해 뭔가 끝장날 때까지 달아났을 테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우리처럼 영리하지 않다. 비록 그들이 더 고결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본문 중에서, 66-67쪽)

여러 순간에서 움찔했다. 바다 위에서의 순간들은 때로 눈부시게 평화로웠고, 처절했고, 외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했던 감정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생명의 한 가운데서, 어느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마주할 때- 그것이 폭력적이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존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때문에 낚싯줄 하나로 커다란 물고기를 상대했으니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다!'라고 읽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공생에 가깝달까)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가 이토록 좋았던 것은, 그동안 내게 교육으로 '입력'된 알레고리들이 걷혔기 때문일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자연의 순간을 진실하게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드보일드하다는 헤밍웨이의 문장은, 추상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아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읽는 동안 수많은 고통과 잠깐의 쾌락을 맛봤다. 그리고 이를 사로잡는 엄청난 생동감에 압도되었다. 숨차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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