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인과 바다 - The Old Man and the Sea 원서 전문 수록 한정판 ㅣ 새움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과 바다>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그다지 길지도 않은 소설이었는데-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운 노인처럼, 나는 완전히 늘어진 채로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고작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긴 일이 이렇게까지 고된 것은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그와 함께 커다란 물고기와 사투를 펼치고, 또 그가 상어에게 뜯기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함께 겪어야 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 경험은 실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모르던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그랬다. 이 경험과 감각이 너무 낯설어서 책을 덮고는 한참 동안 옆으로 치워 두었다. 이 낯선 경험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일전에 알고 있었던 것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서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들('뜻대로 안되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던가,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던가 하는 것들), 노인-물고기-바다가 상징하는 것들(많은 비평가들이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가장 풍부한 종교적 의미의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더랬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상징(?)은 노인은 성직자, 바다는 성모로 해석했던 것. 그 해석 안에서 마지막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헤밍웨이의 삶과 그의 작품들 등등의 것들이 모두 텍스트 안에서 자연스럽게 걷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읽어야 해'라는 (주입된, 혹은 교육된) 가이드가 사라졌을 때- (노인이 물고기와 그랬던 것처럼) 텍스트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사실,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의구심을 가졌던 것 같다. <노인과 바다>는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마치 한용운 선생님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곧 국가이고, 국가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읽었던 시간만큼- <노인과 바다>는 내게 상징의 범벅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치워내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나는 '살아있는 순간'과, 그러니까 생명의 순간과 마주칠 수 있었다.
무엇이 녀석을 요동치게 만든 걸까,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철사가 그의 거대한 언덕 같은 등에 씌워진 게 틀림없어. 확실히 녀석의 등은 나처럼 심하게 고통을 느끼지는 못할 테지. 그렇지만 그가 얼마나 크던지 간에 이 배를 영원히 끌 수는 없는 거야. 이제 문제 될 수 있는 모든 일이 정리되었고 나는 충분한 예비 다발을 가진 게야. 사내로서 더 바랄 게 없는 거지. "고기야." 그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 머물 거란다." (본문 중에서, 55-56쪽)
"물고기야," 그는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무척 존경한다. 그렇지만 오늘이 마쳐지기 전에 죽이고 말 테다." 우리 그렇게 되길 바라자꾸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본문 중에서, 57쪽)
낚시는 해본 적 없지만, 노인이 물고기와 보낸 시간은 내 손바닥이 저릿해질 만큼 실감 나는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물고기가 속도를 늦추었을 때, 그의 움직임이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졌을 때, 물고기가 잠깐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물고기가 어찌하려는지 알 수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물고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온전히 손에 감긴 낚싯줄에 의한 감각이었는데, 물고기와 더불어 바다 역시 요동치는 것이었으므로 그 사이에서 물고기의 움직임만을 알아채는 것은 굉장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물고기는 굉장히 컸다. 그를 굴복시키려 했다가는 외려 그에게 굴복당하고 말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인은 물고기를 굴복시키는 대신 설득하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물고기와 노인이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정성을 다해 무엇인가를 마주하는 경험,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하는 싸움. 상대가 넘어지면 자신 역시 넘어지고 말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합치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협상의 과정. 그것은 곧 (어떤 형태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했다.
녀석은 굉장한 물고기니 납득시켜야만 한다, 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녀석이 달아나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도 잇다는 것과 그 자신의 힘을 알게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녀석이라면 당장 모든 힘을 다해 뭔가 끝장날 때까지 달아났을 테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우리처럼 영리하지 않다. 비록 그들이 더 고결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본문 중에서, 66-67쪽)
여러 순간에서 움찔했다. 바다 위에서의 순간들은 때로 눈부시게 평화로웠고, 처절했고, 외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했던 감정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생명의 한 가운데서, 어느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마주할 때- 그것이 폭력적이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존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때문에 낚싯줄 하나로 커다란 물고기를 상대했으니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다!'라고 읽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공생에 가깝달까)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가 이토록 좋았던 것은, 그동안 내게 교육으로 '입력'된 알레고리들이 걷혔기 때문일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자연의 순간을 진실하게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드보일드하다는 헤밍웨이의 문장은, 추상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아 직접적인 감각적 경험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읽는 동안 수많은 고통과 잠깐의 쾌락을 맛봤다. 그리고 이를 사로잡는 엄청난 생동감에 압도되었다. 숨차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