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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ㅣ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평점 :
#1.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첫 장면에서 벤(니콜라스케이지 분)은 "아내가 떠나서 술을 마시게 된 건지, 술을 마셔서 아내가 떠난 건지 모르겠다"고 읊조린다.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진 기억 너머로 어렴풋이 존재하는 아내가 불현듯 떠오른 것은, 그의 삶이 다해가고 있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오늘, 어쩌면 내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벤은 오늘도 술을 마신다. 오늘의 기억이 흐릿해진 기억의 저 너머로 흘러가도, 언젠가의 기억이 선명하게 지금-여기에 나타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기억이란, 본래 선형적인 것이 아니니까.
#2. 점으로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에서 점과 점이 서로를 잇는 2차원의 세계로. 그보다 자유로워진 3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보다 늘 한 차원 아래만을 감각할 수 있는 우리 존재들은 4차원의 세계에 살면서도 3차원의 세계만을 감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5차원, 6차원, 어쩌면 11차원쯤의 세계가 있다고 할지언정 우리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5차원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면, 오늘의 R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3. R은 기억을 잃었다. 사고였는데- 사고 당일뿐만 아니라 여러 날의 기억이 사라졌다. 예고 없이 나타나는 장면들에 R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저리치지만 좀처럼 깨어날 수 없었던. 맥락 없는 기억의 조각들에 R은 맥없이 풀려버리고 만다. 이어지지 않는 낱장의 그림도, 잘 그러모아 놓으면 언젠가 온전한 한 장의 그림이 될까. R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기억할 뿐이었다.
연락처에 저장된 어떤 번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진과 메모가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R은, 모르는 R을 상상해야 했다.
R은 생각보다 더 R을 모르고. (본문 중에서, 13쪽)
기억은 언젠가의 R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장면들일 텐데, 그때 존재했던 R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R이 아닌 R을, 또다시 R이 지켜보는 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는 알고 지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시 뒤돌아보게 한다. 차라리 그들의 기억도 사라지고, 엉켜버렸다면. 그랬다면- 오늘의 혼란은 없었을까.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 나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저 사람들의 기억이 모두 섞여서 어떤 순간을 굳이 만들어내야 하는 거라면,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억에 동의할 수 있을까.
#4. 그럼에도 우리는 익숙한 세계로 기억을 데려다놓고자 한다. 감각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로 흩어져 버린 기억을 끌어당겨 익숙한 3차원의 시공간 속에 묶어둔다.
우리는 언제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을까요?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다는 발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말로 들리네요. 현실에서 마냥 발을 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공중에 붕 떠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실은 현실이죠. 리얼이즈저스트리얼. 리얼이즈팩트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팩트이즈팩트는 아니고요? 그렇게 되면 말장난에 불과하죠. 무엇이든 무엇으로부터 무엇에 지나지 않아 무엇도 되지 못하는 무엇에 불과한, 그 현상 혹은 상태를 현실이라고 대답해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본문 중에서, 121쪽)
리얼이즈저스트리얼,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엉켜버린 R의 낯선 세계가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종류의 자유로움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싶다. 감각하고자 했으나, 쉬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들의 세계는 흩어지고 사라졌기에 '그것인 채로' 괜찮았다. R도 R을 모르겠다는데, 어떻게 내가 R을 짐작할 수 있겠어-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억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R은 내가 그를 알기를 바랐을까. 이해할 필요도, 이해될 필요도 없는 세계는 멀리- 그러니까 5차원이나 6차원쯤에 있어서, 그 거리만큼 서늘하고- 서글프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