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소설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안고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때로는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그리고 이 소설 <토우의 집>의 경우처럼- 개인은 세상과, 혹은 국가와 갈등하기도 한다. 소설은 시간적 배경을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단서를 그러모아볼 때- 70년대 즈음이 아니겠나 싶다. 큰 길 곁으로 골목마다 차곡차곡 집을 지어 살던 어느 마을- 큰 길 가까이에는 번듯한 나무가 정원에 들어선 큰 집들이 있었고, 산을 따라 난 길로 올라갈수록 좁고 허름한 집이 나왔다. 소설의 주인공 '원'이네는 그 중턱 우물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다. 원이네가 우물집으로 이사 들어오던 날, 사람들은 흘긋흘긋 원의 엄마를 보았다. 부동산 서류에 사인을 하는 필체하며, 옷차림이- 우물집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우물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까. 누구에게나 말하기 어려운 사정 하나쯤은 다 있을 테니까, 하는 얕은 생각으로 그들이 왜 우물집에 세 들어 살아야 했던지에 대해 한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더랬다.

그러던 사이, '원'과 우물집 둘째 아들 '은철'은 친구가 된다. 은철은 형인 금철을 따라 즐기던 넓이의 모험과 높이의 모험 대신 원과 함께 '스파이'가 되기로 한다. 마을의 비밀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자, 그간 들을 일도 없었고 별다른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원과 은철의 시선으로 쓰인 이 소설은 이따금씩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과부가 된 엄마와 사랑방 손님의 연정이 여섯 살 난 옥희의 시선 너머에 있어 더욱 애틋했듯- 이 소설 <토우의 집> 역시 원과 은철의 순진함을 빌려 나아간다. 아이들은 새로이 마주하게 되는 소소한 사실들에 놀라고, 괜히 억울해하며-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모르고' 사람들을 저주한다.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 거야?'하는 그 나이에서 겪는 가장 억울한 일들은 저주가 되어 뱉어졌다가도, 죄책감으로 그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 정말 원의 아버지가 아저씨들의 손에 끌려가야 했을 때는- 또 원이네 자매들이 그 이름처럼 영(원의 언니), 원, 희(원이 동생처럼 아끼는 인형) 마을을 떠나야 했을 때는 마음 깊은 데까지 저릿해져왔다.


인혁당 사건이라는 말을 담은 적 없지만, 그 시대 그 즈음- 그런 일이 흔했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원이네 가족이 삼벌레 마을로 숨어든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대의 아픔은 아무리 꽁꽁 숨겨놓아도 자꾸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그런 점에서- 영화 <금지된 장난>이 자꾸 떠올랐다. 원과 은철의 이미지는 종종 미셸과 뽈레뜨에 겹쳐 보였다. 총을 든 병사를 등장시키지 않고도 전쟁의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했던 그 영화는, 시대의 아픔을 전면에 내놓지 않고도 우리 사회의 아픈 날들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 소설과 여러모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은철에게, 원에게- 서로는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한 번도 등장한 적 없지만, 그 제목에 쓰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토우'를 다시 돌아본다. 오래전, 권력을 가진 자의 무덤에 함께 묻히곤 했다는 토우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기도 했지만- 울고 웃고 즐기고 노동하던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솔직하게 표현한 모양새이기도 했다. 무덤의 주인공이 다음 세상에서도 현세와 같은 삶을 누리며 영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토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닥다닥 산기슭에 엉켜 붙어 삼벌레 고개라는 그다지 예쁘지도 못한 이름 사이에서도 사람 사는 냄새만큼은 고소하게 폴폴 났던, 그때의 그 계란 볶음밥 같은 것 아니려나. 힘든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버텨볼 만한 이유는 충분했더라고. 그러니, 그대들이여-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