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A : English for Everyday Activities 일상표현 낭독편 Activity Book - 50일 영어낭독으로 원어민 되기 EEA : English for Everyday Activities 한글판
Lawrence J. Zwier 지음 / Compass Publishing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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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한다는 건 뭘까? 토익이나 토플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 CNN뉴스를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것? 원하는 정보를 영어로 얻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는 것?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 ... 사실 진짜 영어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영어를 공부했음에도 영어가 여전히 편하지 않은 나로서는 하나하나가 다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비즈니스 영어, 학술 영어, 일상 영어가 내게는 모두 따로따로인 셈.​


영어로 구글링을 하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지만, 아이와의 생활에서 영어를 자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막막함이 밀려들어왔더랬다. 아이와의 일상에서 영어를 쓴다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사실 '독백'에 가깝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영어를 오래 말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이것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 영어로 오래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표현의 수가 많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풍부한 에피소드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영어로 얼마나 길게 말할 수 있는가는 곧 스피킹 실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이 책 <English for Everyday Activities>는 'A picture process dictionary'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말 그대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순서를 따라 하나하나 영어로 말해보는 것을 위한 책이다. 예컨대 차를 한 잔 만든다면- 물을 끓이고, 티팟에 물을 붓고, 찻잎을 얼마간 넣은 다음, 그것이 우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찻잎을 걸러내고 설탕이나 우유를 곁들여 마신다는 것을 하나하나 영어로 말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평생 입밖으로 한번도 내뱉지 않아도 될 문장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을 돌이켜보고, 영어로 말해보는 것은- 실제로 그 행동을 일상 가운데서 만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상기되며 영어로 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게 된다.


또 하나- '이불을 정리한다'는 한 문장으로 끝날 일도 세심하게 단계를 나누어 다시 말해봄으로써(책에서는 11단계에 걸쳐 이불 정리하는 법을 설명한다) fluff up, pull, slip, smooth out, spread, tuck의 동작들을 구분하게 하는 점도 흥미로웠다.


워낙 오래된 책이기도 하고, 유명하기도 해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책이지만, 최근 activity book이 출간되면서 다시 한번 핫해진 EEA!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구판이라 오디오CD가 함께 있는데, 개정되고 나서는 앱을 소개해주는 것 같다(sound cloud/study booster). 강의도 있고, 최근 이 책으로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고, 액티비티북으로 보고, 듣고, 말하면서 복습까지 할 수 있으니 나만 잘하면 진짜 좋은 영어 교재!

본문 내용을 외워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부담감을 지워줄 것이 아니라,

한번이라도 더 꺼내보고- 한번이라도 더 말해보면서 즐겁게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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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어느 멋진 날
플뢰르 우리 지음, 김하연 옮김 / 키위북스(어린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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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클레망틴과 부모님은 할머니댁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빠는 클레망틴이 할머니댁에서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이 많이 되었나 봐요. 예의 바르게 말할 것, 식탁 위에는 팔꿈치를 올리지 말고- 특히 소란스럽게 굴면 안 된다고 가는 내내 주의를 주었죠. 클레망틴은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을 한 모양입니다.


클레망틴에게 할머니댁은 어쩐지 좀 따분하고 심심한 곳이에요. 할머니는 따뜻하게 클레망틴을 안아주셨고, 맛있는 음식도 준비해 주셨지만 그 모든 것이 클레망틴을 기쁘게 해주지는 못했거든요. 할머니댁은 정원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심심했어요. 정원 울타리에서 작은 구멍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아주 잠깐, 엄마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클레망틴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동굴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구불구불한 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다 보니- 그 끝에 놀라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소년이었죠. 둘은 금세 친구가 됩니다. 숲속에는 클레망틴이 처음 본 것들이 가득했어요. 도시 아이인 클레망틴에게 그건 그림책에서나 보던 세계였을 거예요. 쓰러진 나무 기둥 위에서 균형잡기 놀이를 해보기도 하고, 버섯을 따고, 동물 친구들도 잔뜩 만났죠. 브라키오사우루스까지도요! (그림책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를 꼭 찾아보세요!) 그게 끝이 아닙니다.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연못으로 들어간 친구를 따라가보니, 오색산호가 화려한 바닷속 세상도 만날 수 있었어요. 커다란 나뭇잎을 양 팔에 붙이고는 하늘을 날기도 했고요.



클레망틴! 클레망틴!


클레망틴의 모험은 엄마, 아빠의 목소리로 끝나고 맙니다. "다음에 또 만나자."라는 클레망틴의 인사말에서 아쉬움과 충만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헐레벌떡 할머니 댁으로 돌아온 클레망틴의 옷가지에는 작은 나뭇가지들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할머니처럼요.


그나저나- 오늘 만났던 그 친구는 누구일까요?


어쩌면, 할머니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덧.


1. 클레망틴은 여우입니다. 숲속에서 만난 친구는 사람이고요. 저는 이 배치가 조금 낯설면서도 재미있었어요. 우리는 흔히 인류가 문명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물들은 자연 속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이 그림책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전복시킨 셈인데- 그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클레망틴이 낯선 세계로 들어와 남자아이를 만나고부터는 엄마, 아빠가 클레망틴을 부를 때까지 글 없이, 그림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두 인물의 언어가 달랐기 때문일까요? 그 세계에서는 언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3. 클레망틴이 만나는 새로운 세계에서- 클레망틴은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가, 깊은 바닷속을 탐험하기도 하고, 나뭇잎 두개로 새처럼 날아오르기도 합니다. 정말 마법같은 순간이었겠죠? 여러분이 만약 클레망틴이었다면, 그 가운데 어떤 순간이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으세요? 그 가운데 하나만 해볼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요?


4. 그나저나- 그 남자아이는 누구죠? 할머니는 그 아이와 이미 친구인 걸까요?


5. 면지가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만날 때는 앞 면지와 뒷 면지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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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시작하는 아트 테라피 - 그림으로 마음의 안부를 묻다
주리애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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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술은 왜 필요할까. 사람들은 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아름답게 쓰려고 할까. 오일 파스텔도, 캘리그래피도, 컬러링도 트렌드가 된지 오래지만- 왜 그것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더랬다. 이 책의 저자 주리애는 그림을 감상하고 그리는 행위가 '자기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는 데서 의미 있다고 했다. 느끼고 집중하다 보면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내면이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 동의했지만, 행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막상 스케치북을 펼치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왠지 모를 미련이 남아 수채화 물감이며 아크릴 물감, 오일 파스텔, 색연필에 한가득 욕심을 냈다. 그렇게 쓰지 않은 미술 재료가 쌓여가던 참이었다.


서랍 속 오래된 물감들을 생각하다가, 아이와의 미술놀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됐다. 2차원에 갇혀 있던 나의 시도들과는 달리 아이에게는 훨씬 더 다양한 재료들을 제안하고 있었다. 아이는 커다란 옹기토를 쓰고 싶은 만큼 덜어내 커다란 조각상(?)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클레이로 색을 자유롭게 섞어보기도, 재활용품 상자에서 꺼내온 몇몇 물건들을 활용해 자기만의 친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 사이의 온도차를 느끼니 새삼 나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나에게는 좀 더 다양한 재료를 허락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나에게 책상 위에서만 할 수 있는 활동만을 허락했을까. 나는 왜 나에게 좀 더 커다란 캔버스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것(그러니까 아이가 쓰는 2절지에 그림을 그린다거나, 이런저런 재료들을 자유롭게 탐색해 보는 것)에 (사실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내가 나에게 한 번도 쥐여주지 못한 그것들을 내 아이에게 쥐여줌으로써 대리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어쩌면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나와 달리 아이의 거침없는 움직임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 <혼자서 시작하는 아트 테라피>는 낯설지 않으면서도 낯설었다.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재료들은 대개 이미 우리 집에도 있는 것들이었고, 아이와 함께 활동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루나 나뭇조각, 플레이콘 같은 꾸밈 재료를 매일 같이 만지면서도 그것을 나만을 위해서 써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를 위해 준비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것들을 나만을 위해 써보는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만들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덧붙이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책이 제시하고 있는 우울과 불안, 관계와 성숙은 현대인이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할 테마다. 난 괜찮은데? 우울하지 않은데? 싶지만, 가만 돌아보면 괜찮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나는, 나만 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오직 나만이 살뜰하게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내 마음의 모양새가 어떤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괜찮겠지, 나는 괜찮잖아-하고 이성이 먼저 말해버려 괜찮지 않다고 말하지 못했던 내 마음의 목소리를 이제라도 들어보자. 그 가운데 '일단 시작하고 보는' 미술활동은 따뜻한 마중물이 되어줄 것이다. 색은, 우리의 움직임은, 그림은- 의외로 힘이 아주 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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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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꾱꾱꾱꾱꾱꾱, 아- 진짜 재밌다. 그런데 무엇이 어떻게 재미있었던지 글로 써보려니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 부분을 다시 읽었다. 정신없이 페이지를 타고 넘어온 사이 흘러들어온 재미는 군데군데 붙여둔 플래그를 타고 한 번 더 전해져왔다. 지릿지릿했다. 실로 거의 처음 느껴보는 어떤 감정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박상'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덕질하듯 작가의 인터뷰를 여럿 찾아보았는데, 그때마다 꾱꾱꾱낄낄낄하는 이상한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예테보리 쌍쌍바 꼭 읽어야지!)



소설은 서정과 서사 사이에서 오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묵직하지 않고 가볍다. 깃털만치 가벼운 자세로 줄타기를 하니 한쪽으로 달려간다 한들 쉬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정과 서사가 굉장히 팽팽한 상태에서- 당겨진 줄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만큼 가벼운 우리의 주인공이 신나게 뛰논다. 시각적으로는 꽤나 불안하고 긴장감 넘치는데, 내내 낄낄댈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느 쪽으로 내달리든 결코 줄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은 김밥집 아들 이원식이 헌책방에서 우연히 <조반니 펠리치아노의 빈티지 레시피 쿡북>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모험기다. 요리책인지 시집인지 알 수 없던 신비한 책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원식에게 요리의 세계를 열어주었으며, 끝내는 '삼탈리아'라는 오묘한 섬나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옆의 작은 섬나라 '삼탈리아'라고 해서, 한눈에 말장난인 것을 눈치챘지만- 소설 속에서 하도 섬세하게 삼탈리아를 소개해둔 탓에 나중에는 기어코 삼탈리아를 구글맵에서 검색해보기까지 했다. 없을 것 같지만, 아니- 사실은 어딘가에 진짜 있었으면 했던 나라, 삼탈리아. 그곳은 '시'가 주류문화이자 화폐가 되기도 하는 신기한 나라다.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농담 같기도 하고, 물질적인 것만 쫓는 우리 사회를 강하게 비트는 것 같기도 한 이 나라에서 우리는 원식과 함께 '시'가 무엇이든지, '시심'이 무엇이든지 되묻는다.



"여기선 시가 곧 돈이기도 한 건가요?"


"아니요. 때때로 시가 화폐처럼 통용되기도 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요. 절판되었거나 친필 사인본이라거나, 구하기 어려운 시집은 부자들의 재산 은닉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 같지만, 우리 서민들이야 돈이 없는데 택시를 탔을 때 좋은 시를 읽어주면 요금을 안 내도 되는 정도라오. 그러면 기사가 퇴근해서는 그 시를 또 술집에서 읊으며 공짜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거고." (본문 중에서, 76쪽)



삼탈리아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한국 시는 특유의 낯선 정서와 표현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 시인들이 여럿 언급되는데, 낯선 이들이 들려주는 우리 시가 고맙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어쩐지 미안해지기도 했다. 미안해지는 마음은 아마도 지구 반대편에서 소중하게 대접받는 시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는 홀대받고 있었기 때문일 텐데, 그러면서도 '시'는 과학이나 수학과 함께 자꾸만 '어렵다고 생각되는 영역'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원식의 모험기는- 내게는 '시'를 다시 꺼내오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음식이 궁극의 경지에 다다를 때, 나는 시를 가까스로 한 모금 맛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시와 요리가, 또 우리의 삶이 각각의 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바다에 몸 담그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몸도, 마음도 모두 배고프지 않아야 진정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 환상 속에서 신나게 헤엄치며 놀았다. 나는 헤엄치고, 원석은 소리 없이 웍을 돌리고, 이 소설을 쓰는 박상 작가는 내가 소설을 읽고 있는 이 순간, 어딘가에서 실시간으로 이 이야기를 내게 보내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가능할 것 같았다. 뭐 어때, 삼탈리아도 끝없이 전개된 환상에 불과한데- 나는 구글맵에 삼탈리아를 검색하고 말았는걸. 이런 이상한 생각을 실컷 하다가, 스스로 말도 안 된다며 검열도 하다가 작가의 말에 이르러 모든 상상의 경계를 풀고 말았다.



소설의 기똥찬 매력은 실용적인 책이 아니라는 점 같다. 소설은 그냥 허무한 지적 유희에 그쳤으면 좋겠다. 삶이 시시하고 무료해서 무식하게, 무모하게 아름다운 얘기나 하는 것이면 좋겠다. 다만 발견과 반성과 반추를 통해 정립되어 온 엄숙한 문학 이론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그냥... 좀 이런 녀석도 한 명쯤 있으면 어때. (작가의 말, 366쪽)



이렇게까지 말랑말랑해졌으니, 시를 읽어야겠다. 시를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준비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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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
정재영 지음 / Lik-it(라이킷)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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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부엌 싱크대 수전이 좀 이상했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자꾸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무래도 나사가 빠지거나 느슨해진 것 같은데, 싱크대 수전 나사를 어디서 조아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채로 한 달 정도를 지냈다. 그러다 지난 주말 아빠가 싱크대를 보시고는 바로 그 아래를 열어 힘을 몇 번 주신다. (읔, 읔 으으읔하는 효과음과 함께) 응? 단단해졌네?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기술자 아저씨를 불러서 해결하려다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금새 해결되다니! 심지어 공구 하나 없이! 손으로!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적잖게 생긴다. diy 가구를 조립하거나 전구를 가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전등을 설치할 수는 없는 나는 웬만한 일에 남편 손을 빌려왔다.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도착한 내 서재 간접조명만은 꼭 내 손으로 설치하고 싶어(매입형이 아니라 커튼 박스에 붙이는 형식이어서 나름 만만해 보였던 것이다) 창고 깊숙한 곳에서 드릴을 찾아 오기는 했지만, 태어나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드릴은 어떤 나사(?)를 어떻게 조립해야 쓸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살펴봐도 끝내 알 수 없었다.



동봉되어 있는 간이 드라이버를 사용해도 가구를 조립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전동 드라이버가 있으면 단 몇 초 만에 완전한 형태로 고정이 된다. 벽에 나사를 박을 수만 있다면 간접조명도 설치할 수 있고, 블루텍으로는 붙일 수 없는 무거운 액자도 마음껏 달 수 있게 된다. 전기 다루는 능력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마 식탁등을 바꿔 분위기를 바꿔볼 수 있겠지. 그러니까 공구는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아주 가까이에서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몰라도 너무 몰랐고, 특별히 알아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더랬다.


이 책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은 그래서 낯설었고,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아버지의 공구상을 얼떨결에 물려받은 저자는 공구상으로 살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그것을 모아 이 책 한 권에 였었다. 그래서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쪽은 공구상으로서의 삶과 그곳의 분위기 같은 것이고, 뒤쪽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거나 너무 멀었던 공구에 대한 이야기다. 콘크리트 벽에 나사를 박을 때 어떤 드릴을 써야 하는지, 임팩트 드릴보다 더 좋은 드릴로는 뭐가 나을지, 콘크리트 벽에 필요한 못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살면서 한 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지만- 저자의 글 솜씨에 빠져 나도 모르게 공구상 속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구상에게 물건을 사러 온 이들이 제품의 브랜드나 스펙보다는 자신의 기술과 생산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 축구 선수가 자신의 신체적 능력에 관심이 있지, 착용하는 유니폼의 재질을 잘 모르는 것처럼- 기술자는 그것이 어느 회사의 제품이건, 원하는 작업을 보다 수월하게 해내는 데만 관심을 둔다.


그 실용성, 혹은 장인 정신에 탐복하며 신나게 읽었다. 이제까지 나를 스쳐갔던 기술자 아저씨, 아줌마들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찢어지거나 울퉁불퉁한 도배를 뜯어내지 않고 말끔하게 보수해 주고 가신 아줌마, 살고 있는 집에 에어컨을 설치해 주고 가신 기사님들(어떻게 그렇게 빨리 천장을 뚫고 에어컨을 설치한 후, 감쪽같이 닫을 수 있는지!), 갑자기 들어오지 않는 전기를 뚝딱뚝딱 연결해 주고 가신 아저씨들까지. 흡사 마술사 같았던 그들의 손길 뒤에는 믹스커피 한잔 나눠 마시며 허허실실 웃을 수 있는 공구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놓인 공구들도 아름다워 보였다. 당장 (한 번도 안 써본) 드릴로 뭔가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나도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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