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
정재영 지음 / Lik-it(라이킷)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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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부엌 싱크대 수전이 좀 이상했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자꾸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무래도 나사가 빠지거나 느슨해진 것 같은데, 싱크대 수전 나사를 어디서 조아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한 채로 한 달 정도를 지냈다. 그러다 지난 주말 아빠가 싱크대를 보시고는 바로 그 아래를 열어 힘을 몇 번 주신다. (읔, 읔 으으읔하는 효과음과 함께) 응? 단단해졌네?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기술자 아저씨를 불러서 해결하려다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이었는데, 이렇게 금새 해결되다니! 심지어 공구 하나 없이! 손으로!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적잖게 생긴다. diy 가구를 조립하거나 전구를 가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전등을 설치할 수는 없는 나는 웬만한 일에 남편 손을 빌려왔다. 남편이 출장 간 사이 도착한 내 서재 간접조명만은 꼭 내 손으로 설치하고 싶어(매입형이 아니라 커튼 박스에 붙이는 형식이어서 나름 만만해 보였던 것이다) 창고 깊숙한 곳에서 드릴을 찾아 오기는 했지만, 태어나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드릴은 어떤 나사(?)를 어떻게 조립해야 쓸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살펴봐도 끝내 알 수 없었다.



동봉되어 있는 간이 드라이버를 사용해도 가구를 조립할 수 있기는 하지만, 전동 드라이버가 있으면 단 몇 초 만에 완전한 형태로 고정이 된다. 벽에 나사를 박을 수만 있다면 간접조명도 설치할 수 있고, 블루텍으로는 붙일 수 없는 무거운 액자도 마음껏 달 수 있게 된다. 전기 다루는 능력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마 식탁등을 바꿔 분위기를 바꿔볼 수 있겠지. 그러니까 공구는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아주 가까이에서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몰라도 너무 몰랐고, 특별히 알아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더랬다.


이 책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은 그래서 낯설었고,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아버지의 공구상을 얼떨결에 물려받은 저자는 공구상으로 살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그것을 모아 이 책 한 권에 였었다. 그래서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쪽은 공구상으로서의 삶과 그곳의 분위기 같은 것이고, 뒤쪽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거나 너무 멀었던 공구에 대한 이야기다. 콘크리트 벽에 나사를 박을 때 어떤 드릴을 써야 하는지, 임팩트 드릴보다 더 좋은 드릴로는 뭐가 나을지, 콘크리트 벽에 필요한 못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살면서 한 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지만- 저자의 글 솜씨에 빠져 나도 모르게 공구상 속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구상에게 물건을 사러 온 이들이 제품의 브랜드나 스펙보다는 자신의 기술과 생산성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 축구 선수가 자신의 신체적 능력에 관심이 있지, 착용하는 유니폼의 재질을 잘 모르는 것처럼- 기술자는 그것이 어느 회사의 제품이건, 원하는 작업을 보다 수월하게 해내는 데만 관심을 둔다.


그 실용성, 혹은 장인 정신에 탐복하며 신나게 읽었다. 이제까지 나를 스쳐갔던 기술자 아저씨, 아줌마들이 얼핏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찢어지거나 울퉁불퉁한 도배를 뜯어내지 않고 말끔하게 보수해 주고 가신 아줌마, 살고 있는 집에 에어컨을 설치해 주고 가신 기사님들(어떻게 그렇게 빨리 천장을 뚫고 에어컨을 설치한 후, 감쪽같이 닫을 수 있는지!), 갑자기 들어오지 않는 전기를 뚝딱뚝딱 연결해 주고 가신 아저씨들까지. 흡사 마술사 같았던 그들의 손길 뒤에는 믹스커피 한잔 나눠 마시며 허허실실 웃을 수 있는 공구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놓인 공구들도 아름다워 보였다. 당장 (한 번도 안 써본) 드릴로 뭔가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나도 오늘부터 공구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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