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마일리지 제도 변경은 이제 5000점만 적립되면 5000원을 쓸 수 있는 시대의 도래를 가져왔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50000원 이상 주문해온 나로썬 매달 5000원의 보너스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모든 걸 다 계산하고 준비했고 실행했다고 여겼던 이번달 나의 쇼핑은 마일리지 4900점에서 종지부를 찍었으니, 과연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이제 숨은그림찾기를 통한 보충 뿐인 것이다. 괜찮아. 이제 겨우 50점 남았어. 저 책을 가지기 위해 남은 건 알라딘 게임 제작진의 빠른 업데이트 뿐이야. 하지만
도대체 언제 게임 업데이트는 이뤄진단 말인가. 아아 슬프다. 알라딘은 왜 쿠폰으로 제한 것만큼 마일리지 할인율을 적용해 나를 슬프게 하는 걸까. 차라리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누굴 탓하랴. 이게 다 나의 부족함때문인 것을. 그래서
아무튼 나머지 50점의 마일리지를 채워줄 알라딘 숨은그림찾기 게임의 조속한 업데이트를 기대하며 이 글을 남기는 것이다. 추가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적어보자. 어쨌든 이 페이퍼는 안톤 슈낙의 책을 걸고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허름한 버스 정류장에서 낡은 양복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 남성
일요일 오후의 늘어진 햇살
리플리에서 멧 데이먼이 불렀던 마이 퍼니발렌타인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말들
텔레비젼을 소리 없애고 볼 때 느껴지는 안스러움
평일 저녁 버스안에서 만나는 소년들의 사회적 눈빛들
소녀들의 마냥 부서지기만 하는 몽상들
... ... ...
그렇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슬퍼했다. 하지만 슬픔이란 뭐랄까... 고통을 수반하는 슬픔과 그렇지 않은 슬픔이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어떤 슬픔들은 인식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대부분의 고통들은 반응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칼에 찔리거나, 불에 데이거나, 사람에게 맞으면 그것은 슬픔이라기 보단 고통스런 반응이다. 슬픔은 고통이 지나간 후에 찾아오거나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허름한 버스 정류장에서 낡은 양복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 남성의 모습을 볼 때 나는 그것에 대한 기억으로써 (인식으로써)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슬퍼진다. 결국
안톤 슈낙과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공통점은 고통이 최소화된 선택된 슬픔이란 거다. 따라서 이건 정말 슬픈 거다. 왜냐하면 고통없는 슬픔이란 일종의 자기학대이거나 자기만족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절반 정도의 쾌락만 허락한다. 왜냐하면 치유라는 쾌락은 고통이 없으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950점에서 멈춰버린 나의 마일리지 스코어는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