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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지음, 임지호 옮김 / 경당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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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의 고민을 깊이 들으며 그 소리의 파장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도착하는 곳은, 하나의 문 앞이다. 그 문제들이 연애이든, 학업이든, 취업이든, 업무이든, 가족관계이든, 내용들은 다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을 반영해 주다보면, 그들의 입에서 마지막쯤에 나오는 것은 꿈의 실현, 삶의 목적, 소명, 존재, 영성, 깨달음, 구도 등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그 문 앞에서 손잡이를 더듬는다. 더 숲으로 들어가야겠지. 혹은 밤 속으로, 어둠 안으로. 

   <아티스트 웨이>. 가끔은 이런 책이 우리 아이들과 청소년들, 대학생들에게 배부되는 교과서였으면 좋겠다. 학교에 <삶의 예술>, <창조성 회복> 등의 이름을 단 수업이 마련된다. 한 학기 동안 청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홀로, 자기 자신과 만나고 신성을 입는 의례와 같은 충만한 여행을 떠나고, 내면의 소리와 음악을 받아 적는 모닝 페이지를 작성한다. 수업 시간에는 둥그렇게 모여 앉아, 시험 보고 점수와 등수를 매기기보다 신뢰와 격려, 협력 가운데 서로의 꿈을 나누고, 그 꿈을 물질로 변형하는 경이로운 비법들을 풀어놓는다.

  이런 아이디어가 공교육기관에서는 어렵더라도, 대안교육기관에서는 시도해볼 수 있지 않는가? 대학에서도 이런 강좌가 개설되면 어떨까?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에서는? 대학에 이런 동아리를 창설한다면? 존재의 근본으로 가닿으면서 쓸모 있는practical 장이 자라나는 세대와 또 자라다 만 세대들에게 필요하다. 물리적인 공간과 제도권의 편입이 통합돼 이런 수업이 정착돼 퍼진다면 바람직하겠으나, 나는 그런 미래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재료가 없기 때문에 창조적인 실험이 가능해지므로. 이 책에서도 권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창조성 회복 서클을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혼자서. 내가 나눔의 센터이므로.

 

  나는 2년 전엔가, 어떤 고민을 털어놓으러 온 연극 공부하는 친구에게 이 책을 넌지시 소개한 적이 있었다. 헤어질 때, 슬쩍. 무언가를 제안한다는 건, 어느 때는 침해로 다가가기에, 딱 한 번 내비치고 바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두 달 전, 그 친구의 후배를 한겨레센터 <비폭력대화> 강좌에서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이 책을 소개시켜 줘서 무척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는가. 연극 공부하는 그 친구가 나로부터 이 책을 소개 받아 읽고는 자기 후배에게 소개를 해준 것이었다. 또 그 후배는 이십대 후반에 무용으로 미국유학을 떠난 자기 오라버니에게 이 책을 소개해주고 말이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나에게까지 되돌아왔다. 때마침, 나는 이 책을 재독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꿈의 타래를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문득, 밤 속에서 빛이 고요해지지 않는가.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 듣는가. 아주 살짝 꺼냈을 뿐인데, 그것을 핵처럼 가슴에 품고 가 발아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재능과 가능성을 억누르고 사는지 안다. 그들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여자면 여자라서, 남자면 남자라서.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지원과 인정, 사랑이 필요했을 텐데,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사회도, 국가도, 그럴 수 있는 터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였을 때, 이 땅은 과연 살 땅이었는가. 어릴 때는 양육자가 가장 가까이서 아이들의 창조성의 발현을 가로막는다. 왜 그러할까? 양육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비난 받을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들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역사라든지, 치부라든지. 창조적인 작업의 소재는 거의 모두가 억압의 폭로, 진실임을 인류는 집단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창조성은 언제나 가장 첫 번째로 제거될 비소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내내 흐르는 메시지인 창조성을 무한정 후원하는 <신>은 어른들이 주조한 사회적 억압과 자기불신을 초월하는 성소이자 성좌이다. 신성한 보호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으며, 억압체제로서의 규율이 아니라 내부의 폐선 속에서 묻혀 있는 꿈의 질서를 자율적으로 생성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신은 <여기>이다. 신을 사는 여기에서 때로 울겠지. 보물 상자를 열었을 때 그 보석빛이 눈동자의 망막을 환을 그리며 되비칠 때.

 

  마지막으로 창조성 회복에 방해가 되는 검열에 대한 대응방법을 두고 약간 다른 의견을 보탠다. 저자는 그 겸열 대상에 X자를 표시하거나 욕을 함으로써 그것에 대항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런 방법은 초반에는 힘을 발휘한다. 내가 휘둘리는 대상이 아니라 휘두를 수도 있는 주체로서의 역량을 재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가슴 깊이, 창조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물었을 때, 가슴으로부터 들려온 답신은 <용서하라>였다.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해서는, 수긍하면서, 적막 속에 머문다. 묵언한다. 나는 입안 가장 끝에 자리한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고 금을 더 캐야 한다. 나는 아직 흘릴 눈물이 더 많다. 

 

※ 내가 아는 선에선, 저자처럼 <아티스트 웨이>에 따라 한국에서 ‘창조성 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사가 한 명 있다. 뮤지컬/영화 배우이자 밴드보컬인 김성진씨가 그인데, 창조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http://cafe.daum.net/allcre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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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 살림Biz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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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제, 자본주의, 전쟁과 무기가 가득한 지상에 태어난 아가들이 땅과 끊어져 생기를 잃고, 꿈을 접으며, 부모를 가슴 깊이 원망하고,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십대와 젊은이로 자라난다. 게다가 한국의 입시교육 속에서는 가슴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아는 능력이 퇴화되고, 유연했던 몸이 굳듯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감지하기 어려워진다. 학교 의자에 앉아 있는 십대의 얼굴을 보라. 이들 중 누군가는 폭력을 저지르고, 남을 지배하려고 들며, 혹은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로부터 지배 받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가. 그리고 한때, 역시 그런 아이들이었던, 공허하고, 외롭고, 외부적인 가치를 따라 사는, 불안하고 허망한 어른들에게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 어른들은 정말 성장했는가. 배울 것을 정말 제대로 배웠는가. 사랑이나 기쁨, 감사를 알고,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가.

  <시크릿>은, 사람이 존재의 원천적인 기쁨과 사랑을 느끼고, 태어난 존재 그대로 환대 받으며, 이 삶을 풍요롭게 누리고 창조하고, 자유를 만끽하며, 우주로부터 부여 받은 천재를 마음껏 펼치도록 지원하는 책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자들은 두려움과 죄책감, 수치라는 감정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계급에 복종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래야만 위계적인 피라미드 구조와 그 상층부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가치에 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잘못됐다고 심판하고,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을 목격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층부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과 자리를 놓고 다툰다. 비교하고 경쟁함으로써, 본래 자기에게 깃든 아름다움과 천연의 에너지들이 퇴색되고 잊힌다.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무한한 잠재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기쁨과 사랑과 감사와 같은 감정을 충분히 느낌으로써, 그와 동조하는 높은 주파수대의 에너지를 끌어당겨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물현하는 원리이다. 법칙의 적용과정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하고,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때 기꺼이 받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긍정적인 에너지와 접속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정적인 생각이 침입할 때 그것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전환하는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로서의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어떻게 감사하고 심상화하는지 등, 미국에 거주하는 '비밀' 달인들의 실제적인 체험들과 이론들에 근거해 가르쳐주고 있다.

  이 책의 가치는 우열, 비교, 경쟁이 등등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그야말로 지배적이 될 수 없는 틈새, 장을 상상하고 확장하는 데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역사적으로 소수 1%만이 독점했던 비의적인 지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는 그 자체로 방대하고 풍요롭기 때문에, 저마다 그 독특하고 고유한 소원, 가슴의 소리에 응답해준다. 그만큼 우주는 퍼 쓰고 퍼 써도 모자라지 않고 흘러넘치는 자원과 에너지로 편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원하는 존재는 지배적 가치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며 우주이다. 한 사람들에게는 꿈과 소원만으로 이 현실을 돌파하는 잠재력과 무한한 힘이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에 대한 자기의 응답이자 책임으로 귀결된다. 이 책은 미국적인 역동성과 목적지향성이 굉장해서 에너지가 과잉되고 숨이 막히기도 하나, 누구나 끌어당김의 법칙을 쉽게 이해할 만한 단순미가 있고 비밀을 실험해보고 싶은 모험심을 고무하고 독려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혹,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등한시했던 기쁨, 사랑, 감사를 새롭게 배우고 느낌으로써, 이 삶을 받아들이고, 삶과 주변 사람들을 새롭게 보는 영혼의 혁명을 체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꿈 꾸리라. 

  일견 자기계발서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에 편승함으로써 정치적 보수주의와 타협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런데 끌어당김의 법칙은 경쟁과 결핍의 주파수에도 또한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한다. 그래서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 총수라 해도 반드시 풍요로운 가슴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노동자를 탄압한 내력이 있는 한국의 기업가들이 왜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강남 사람들이 선망은 받아도 왜 존경 받지 못하는가. 왜 '졸부'라는 말이 나타났겠는가.

  끌어당김의 법칙에 근거해 진보주의의 실제적인 에너지 흐름의 패턴을 고찰해볼 때, 평화를 키우는 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로 살고 운동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힘사, 비폭력 정신과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렇지 않은가. 너의 태도는 평화롭지 않다고, 폭력적이라고 누군가를 향해 직접적으로 야단친다면, 그 사람의 가슴이 과연 동할 것인가. 진정 연민이 생길 것인가. 서로 평화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상대는 귀를 닫을 수 있다. 아주 깊이 성찰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비난부터 들으면 반감부터 올라와 일상의 전쟁이 일어날 공산이 커진다. 이런 반사적인 주고받기는 사실 어디에서나 벌어진다. 관계 속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그것에 동조하는 우주 에너지와 접속돼 살아갈 때 내가 있는 터전부터 꿈의 장소로 변모한다. 예수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천국이 당신들 사이에 있다고 들려줬듯이.

  참고로, 감정에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에 이견을 덧붙인다. 감정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어떤 느낌이든 그 뒤에는 자신이 바라는 Need(욕구) 에너지가 연결돼 있다. 그래서 언뜻 부정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의 끝을 따라가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느낌은 욕구의 신호이다. 그래서 표피적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진다고 해도, 잠재의식이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라면, 그 긍정적인 사고와 감정은 힘이 없다. 모든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것들이 진실로 가리키는 욕구들을 온전히 듣고 공감할 때, 핵심적이고 반복적인 비난의 목소리가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로 변성될 수 있다. 이 욕구와 가치의 힘이 <시크릿>에서 말하는 '에너지' 이다. <시크릿>의 원리를 더 구체적이고 더 쉽게 일상속에서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필요하다면, 마샬 로젠버그 박사가 저술한 <비폭력대화>와 비폭력대화(공감대화) 과정을 추천한다. 비폭력대화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들을 동등하게 소중히 여기면서 자기의 가치를 추구하고, 느낌과 욕구, 의도를 자각하며, 무의식에 뿌리 내린 비난 어리고 심판적인 메시지를 알아차림으로써 그것들을 진정한 바람으로 전화하고, 삶의 생생한 맥락 속에서 서로 기여하고 기여 받은 것에 대해 자기와 뭇 타자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사상이자 기법이다. 
  
  
덧말. 


생각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방법론은 지향의 얼굴이다. 명상법과 명상, 종교수행법과 종교, 비폭력대화법과 아힘사의 관계처럼. 단순하고 쉬울 수록, 실은 방대한 지식이 집적돼 있고 실천하기 어려울 수 있다. 꿈을 그리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면 더욱. 우리 사회는 꿈을 그리지 못하게 하니까. 그래서 물음이 많아진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이미 양자물리학과 다른 저서들에서 많이 다뤘는데, <시크릿>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총합하는 단순성과 오프라 윈프리쇼에서의 소개, 역동적인 비주얼 마케팅을 접하고 사람들이 공명을 일으킨 덕분. 그야말로 문자보다 이미지가 속도가 빠르고 교류가 직접적이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들의 의식이 어떤 임계치에 다다르고 있는 징후로 보인다. 결핍, 욕망, 경쟁, 우월, 질투, 강탈이 아니라 사랑, 기쁨, 감사, 믿음, 허락, 진실, 풍요, 바람과 근원 등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리로 옮겨가는 있다는. 

책 자체의 공명력은 그다지 흡족하지 않았다. 번역된 한국어 단어의 본래 영어 단어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진 적도 있고. 차라리 몇 년 전 읽었던 힉스 부부의 동화 <사라>가 더 근본적이고, 더 편안하며, 신뢰가 가고, 정답다. 무엇보다 재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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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형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조금은 무색한 "시크릿"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9-21 01:32 
    시크릿 -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살림BIZ 전반적인 리뷰 2007년 9월 19일에 읽은 책이다. 어떤 책이든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없기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책은 아쉬움이 상당히 많은 책이다. 그것은 그만큼 국내나 미국에서 대형 베스트셀러라는 점이 부각되었고 각종 사이트의 많은 리뷰어들의 평점이 상당히 높았기에 그만큼의 기대감을 가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와 같은 책의 선경험이 있었기에 그만큼의 기..
 
 
 
인디고 아이들 - 새로운 아이들이 몰려오고 있다, 2006년 동아일보 선정 자녀교육 길라잡이 20선
리 캐롤 외 지음, 유은영 옮김 / 샨티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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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 나비, 인장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늘 새로운 선물을 이 지구에 한아름 갖고 온다. 여린 살결의 산타클로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이 가져오는 선물이 언뜻 보기에 가시가 콱콱 박힌 장미로 뒤덮여있다면?

  위계와 차별, 권위주의에 물든 세상을 뒤엎기 위해, 수평적이고 평등하며, 외부의 권위에 일절 기대지 않고, 자기 내부의 창조성과 내적 권위로 삶을 운영하는 존재가 대거 태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오라는 남색빛을 띠는데, '인디고'라고 불리운다. 이들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주 어리더라도, 이들의 눈에는 이미 스승으로서의 원숙함이 어려 있다. 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싸움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를 위한 빛의 파괴자. 쾅쾅! 답답한 명령과 딱딱한 한계를 때려부수고 그것들에 부딪친다. 보통, 교사라는 직분에는 기존 사회의 질서를 답습하고 축적된 문화양식을 전수하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특히 한국 같은 경우, 교사는 어찌 보면 얌전하고 윤리적이며 타인의 시선에서 크게 튀지 않는 정석적인 존재의 대표상이 되어 있다. 사라져가는 유교의 선비나 어르신상이 근대적 버전으로 투사되어 있는?

  그러나 이 싸움꾼 아이들은 이미 몇 년 더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새로운 앎과 윤리, 질서를 전파하러 왔다. 이 아이들이 어른들의 교사로 온 것이다. 아주 반항적이고 독창적이며 기겁할 정도로 독자적인 선생. 그래서 이런 아이들의 부모가 된 사람들은 매우 힘겨울 거라고 한다. 잘못 보면, 에너지 수위가 엄청나게 높은 이 아이들이 과잉행동장애로 분류될 수도 있어서, 이들을 심하게 억압하면 본래부터 지니고 온 가능성이 사장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른을 대하듯 이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도,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 합의와 대화를 통해 행동의 적정선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굳이 인디고 아이들에게만 이런 교육적 태도가 필요한 걸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빛을 데리고 오지 않는가?

  새로운 형태의 존재가 몰려온다는 것은 인류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인디고이든 아니든, 나이나 성별, 인종과 학력, 계급 등 차별적인 범주들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태어난 본연의 그 모습 자체로 숭고하게 대하는 태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상에 낯설게 온 아이들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 그들이 드러낼 빛과 색을 기대감 속에서 지켜보고 기다리며, 그것들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어른이라는 이유로, 부모라는 이유로, 선생이라는 이유로 아이들 위에 서고 그들을 통제하려고 하기보다, 우주가 보낸 소중한 빛알갱이들의 공간과 기꺼이 공존할 수 있는 겸손함과 공손함.

  이들은 고통이면서도 축복과 같은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우리 앞에, 지금 이 지구상에 나타나는 의미는 뭘까? 여러가지 중 떠오르는 것 한 가지. 우리 자신의 성장의 소원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인류가 그토록 바랐던 꿈의 지원자를 우주가 보내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남 눈치 보지 말고 개인이 받은 씨앗을 틔워 꽃을 피우는 꽃밭으로 일구는 데 협력하라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이들을 보면서 기억하라고. 세상을 거스르는, 그러나 이 세상 너머에서 진짜 조화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너 한 사람에게 부  여된 권능을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기로 약속했으며, 네 핵은 본래 어떤 색이었는가를. 너도 막 태어날 때는,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자, 완벽하게 새로운 자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선물이었다. 너는,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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