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크릿 -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
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 살림Biz / 2007년 6월
평점 :
가부장제, 자본주의, 전쟁과 무기가 가득한 지상에 태어난 아가들이 땅과 끊어져 생기를 잃고, 꿈을 접으며, 부모를 가슴 깊이 원망하고,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십대와 젊은이로 자라난다. 게다가 한국의 입시교육 속에서는 가슴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아는 능력이 퇴화되고, 유연했던 몸이 굳듯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감지하기 어려워진다. 학교 의자에 앉아 있는 십대의 얼굴을 보라. 이들 중 누군가는 폭력을 저지르고, 남을 지배하려고 들며, 혹은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로부터 지배 받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가. 그리고 한때, 역시 그런 아이들이었던, 공허하고, 외롭고, 외부적인 가치를 따라 사는, 불안하고 허망한 어른들에게는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 어른들은 정말 성장했는가. 배울 것을 정말 제대로 배웠는가. 사랑이나 기쁨, 감사를 알고,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가.
<시크릿>은, 사람이 존재의 원천적인 기쁨과 사랑을 느끼고, 태어난 존재 그대로 환대 받으며, 이 삶을 풍요롭게 누리고 창조하고, 자유를 만끽하며, 우주로부터 부여 받은 천재를 마음껏 펼치도록 지원하는 책이다.
역사적으로 지배자들은 두려움과 죄책감, 수치라는 감정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계급에 복종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래야만 위계적인 피라미드 구조와 그 상층부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가치에 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잘못됐다고 심판하고,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것을 목격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층부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과 자리를 놓고 다툰다. 비교하고 경쟁함으로써, 본래 자기에게 깃든 아름다움과 천연의 에너지들이 퇴색되고 잊힌다.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무한한 잠재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기쁨과 사랑과 감사와 같은 감정을 충분히 느낌으로써, 그와 동조하는 높은 주파수대의 에너지를 끌어당겨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물현하는 원리이다. 법칙의 적용과정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하고,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으며,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 때 기꺼이 받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긍정적인 에너지와 접속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정적인 생각이 침입할 때 그것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전환하는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로서의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어떻게 감사하고 심상화하는지 등, 미국에 거주하는 '비밀' 달인들의 실제적인 체험들과 이론들에 근거해 가르쳐주고 있다.
이 책의 가치는 우열, 비교, 경쟁이 등등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그야말로 지배적이 될 수 없는 틈새, 장을 상상하고 확장하는 데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역사적으로 소수 1%만이 독점했던 비의적인 지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는 그 자체로 방대하고 풍요롭기 때문에, 저마다 그 독특하고 고유한 소원, 가슴의 소리에 응답해준다. 그만큼 우주는 퍼 쓰고 퍼 써도 모자라지 않고 흘러넘치는 자원과 에너지로 편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원하는 존재는 지배적 가치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며 우주이다. 한 사람들에게는 꿈과 소원만으로 이 현실을 돌파하는 잠재력과 무한한 힘이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에 대한 자기의 응답이자 책임으로 귀결된다. 이 책은 미국적인 역동성과 목적지향성이 굉장해서 에너지가 과잉되고 숨이 막히기도 하나, 누구나 끌어당김의 법칙을 쉽게 이해할 만한 단순미가 있고 비밀을 실험해보고 싶은 모험심을 고무하고 독려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혹,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등한시했던 기쁨, 사랑, 감사를 새롭게 배우고 느낌으로써, 이 삶을 받아들이고, 삶과 주변 사람들을 새롭게 보는 영혼의 혁명을 체험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꿈 꾸리라.
일견 자기계발서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에 편승함으로써 정치적 보수주의와 타협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런데 끌어당김의 법칙은 경쟁과 결핍의 주파수에도 또한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한다. 그래서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 총수라 해도 반드시 풍요로운 가슴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노동자를 탄압한 내력이 있는 한국의 기업가들이 왜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강남 사람들이 선망은 받아도 왜 존경 받지 못하는가. 왜 '졸부'라는 말이 나타났겠는가.
끌어당김의 법칙에 근거해 진보주의의 실제적인 에너지 흐름의 패턴을 고찰해볼 때, 평화를 키우는 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로 살고 운동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힘사, 비폭력 정신과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그렇지 않은가. 너의 태도는 평화롭지 않다고, 폭력적이라고 누군가를 향해 직접적으로 야단친다면, 그 사람의 가슴이 과연 동할 것인가. 진정 연민이 생길 것인가. 서로 평화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상대는 귀를 닫을 수 있다. 아주 깊이 성찰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비난부터 들으면 반감부터 올라와 일상의 전쟁이 일어날 공산이 커진다. 이런 반사적인 주고받기는 사실 어디에서나 벌어진다. 관계 속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그것에 동조하는 우주 에너지와 접속돼 살아갈 때 내가 있는 터전부터 꿈의 장소로 변모한다. 예수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천국이 당신들 사이에 있다고 들려줬듯이.
참고로, 감정에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에 이견을 덧붙인다. 감정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어떤 느낌이든 그 뒤에는 자신이 바라는 Need(욕구) 에너지가 연결돼 있다. 그래서 언뜻 부정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의 끝을 따라가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느낌은 욕구의 신호이다. 그래서 표피적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진다고 해도, 잠재의식이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라면, 그 긍정적인 사고와 감정은 힘이 없다. 모든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것들이 진실로 가리키는 욕구들을 온전히 듣고 공감할 때, 핵심적이고 반복적인 비난의 목소리가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로 변성될 수 있다. 이 욕구와 가치의 힘이 <시크릿>에서 말하는 '에너지' 이다. <시크릿>의 원리를 더 구체적이고 더 쉽게 일상속에서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필요하다면, 마샬 로젠버그 박사가 저술한 <비폭력대화>와 비폭력대화(공감대화) 과정을 추천한다. 비폭력대화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들을 동등하게 소중히 여기면서 자기의 가치를 추구하고, 느낌과 욕구, 의도를 자각하며, 무의식에 뿌리 내린 비난 어리고 심판적인 메시지를 알아차림으로써 그것들을 진정한 바람으로 전화하고, 삶의 생생한 맥락 속에서 서로 기여하고 기여 받은 것에 대해 자기와 뭇 타자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탁월한 사상이자 기법이다.
덧말.
생각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방법론은 지향의 얼굴이다. 명상법과 명상, 종교수행법과 종교, 비폭력대화법과 아힘사의 관계처럼. 단순하고 쉬울 수록, 실은 방대한 지식이 집적돼 있고 실천하기 어려울 수 있다. 꿈을 그리는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면 더욱. 우리 사회는 꿈을 그리지 못하게 하니까. 그래서 물음이 많아진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이미 양자물리학과 다른 저서들에서 많이 다뤘는데, <시크릿>이 이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총합하는 단순성과 오프라 윈프리쇼에서의 소개, 역동적인 비주얼 마케팅을 접하고 사람들이 공명을 일으킨 덕분. 그야말로 문자보다 이미지가 속도가 빠르고 교류가 직접적이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들의 의식이 어떤 임계치에 다다르고 있는 징후로 보인다. 결핍, 욕망, 경쟁, 우월, 질투, 강탈이 아니라 사랑, 기쁨, 감사, 믿음, 허락, 진실, 풍요, 바람과 근원 등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리로 옮겨가는 있다는.
책 자체의 공명력은 그다지 흡족하지 않았다. 번역된 한국어 단어의 본래 영어 단어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진 적도 있고. 차라리 몇 년 전 읽었던 힉스 부부의 동화 <사라>가 더 근본적이고, 더 편안하며, 신뢰가 가고, 정답다. 무엇보다 재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