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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상설 공연 민음의 시 288
박은지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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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의 기록자, 상실의 기록자

 

여름 상설 공연이라는 시집명에서 예상되는 것과는 달리, 이 세계는 1년 중 9개월 이상이 겨울로 뒤덮인 곳이다. 추위로 인해(원인) 국경 학교의 학생들은 수시로 꿈에 사로잡힌다.(짝꿍의 자랑, 짝꿍의 모래) 대부분의 시가 꿈속을 배경으로 하거나 꿈과 중첩되어 있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시 속에서 꿈이 등장할 때마다 그 배후에서 꿈꾸기를 추동하는 극심한 추위에 대해 자연히 떠올리게 되었다. , 이 시집의 각 시편들은 국경 학교에서 꾸는 꿈의 단편들이기도 한 것이다.

 

때때로 는 국경 너머로 달아나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떠나지 않으면서 이미 떠나간 이들과 상실한 이들을 성실하게 기록해나간다. 누군가 마을을 떠날 때마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발소리만이 마을에 남고, 그러한 발소리들이 으로 누적되어 폭설처럼 쏟아진다. ‘는 그 소리를 받아 적는 사람이다. 상실이 멈추지 않으므로 그의 꿈의 기록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와 짝꿍이 낭떠러지 아래서 이름을 줍는 것이나, “줍지 못한 이름이 없을 때까지 () 낭떠러지를 지고 살”(짝꿍의 이름)겠다는 다짐 또한 국경의 기록자로서의 화자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2. 국경 학교의 여름

 

물론 이 추운 국경 지대에도 여름은 온다. 모래가 부서지고 쌓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화자는 (모래)-미래(가능성)가 언젠가 소진되고 말 것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타인(짝꿍)과의 삶의 공유라는 약속을 통해 이내 미래에 대한 낙관이 가능해진다.

 

한편 이 여름이 찾아오는 방식이 흥미롭다. 누군가 사라지고, 그가 없는 빈집이 여러 사람들이 숨겨놓는 비밀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비밀이 그대로 집이 되는데, 이제 사람이라곤 없는 이 집이 그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는 수식을 입는다.(그렇게 여름) 앞서 봤듯 사람들이 떠나갈 때마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거세지는 것이라면, 역으로 여름은 새로운 사람의 방문 혹은 거주를 예비하는 시기라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 출발이 누군가의 사라짐이었다는 점은 어떤 무한한 순환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3. 나무에 묶인 시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았던 시는 몽타주였다. 계절을 한 번에 하나씩만 겪던 평범한 나무가 돌연 한 계절에 마음이 묶이면서 그에게 모든 계절이 뒤섞여 들어오게 되고, “모든 계절을 한 번에 살아 내게 되었다. 아마 나무는 어떤 사건을 겪고 난 뒤의 외상으로 인해 그 시점에 고착돼버린 듯하다. 페달을 힘껏 밟아도 강 위의 특정 지점에서 잠자코 있는 오리배처럼 내부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착된 반면, 외부 시간은 그런 개인 사정과 무관하게 마구 침범해오면서 나무를 더욱 거대하게 만들어간다. 이를 가리켜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라 해석한 해설도 무척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해설은 이러한 중첩적인 시선을 박은지 시인의 독특한 이미지 축조의 원천으로 본다.(128)

 

한편, 그러한 나무의 기분을 궁금해하면서 이어지는 질문이 흥미롭다. “성실한 것일까 어쩔 수 없는 것일까라니. 성실(의지 발휘)어쩔 수 없는 것(의지 발휘 불가능)은 너무나도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인상 깊었다. 마음이 묶인 나무처럼 냇가에 묶여서, 오래도록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이후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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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의 미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68
황혜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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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로 놓인 철거는 철거가 예정된 오래된 빌라에서 이전 거주자의 메모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래된 빌라에서 오래된 사체 한 구와

남은 문장들이 발견되는 아침에 관한 이야기

해는 또 떠서 오늘이고

문장들은 사라지는 중이고

방은 죽음 이후만을 보여주고 있다

 

연필 대신 베개를 품에 꽉 안고 있는 손가락뼈들

 

외롭지 않은 날에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발견된 사체가 메모의 작성인인 것으로 암시되는데, ‘오래되었다는 수식에 더해 불연속적인 메모의 내용들은 그가 고독사를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결국 연필을 내려놓고 베개를 끌어안고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 그의 생애가, 그가 무수히 남겨놓았던 희망의 다짐들과 대조를 이루며 깊은 절망감을 자아낸다.

누군가 다가와 혼자 사냐고 묻는 의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 질문을 "보살피는 체온"(9)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을 심정이 이 문장 앞에 오래 서 있도록 했다.

 

맨 마지막 문장의 독특함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싶다.

외로운 날에/썼다거나 외롭지 않은 날에는/안 썼다고 하지 않고 가능/불가능짐작으로 이 문장을 구성했을까.

이 문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데, (1) 우선은 화자가 이전 거주자의 쓴 것을 긍정적인 성취로 인식하는 듯한 암시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있어 쓰기를 가능케 한 조건은 외로움이었으므로, 그의 쓰기를 일반론에서의 성취와 마냥 등치할 수 없는 곤경이 독자에게 주어진다.

어쩌면 이는 이 시집의 화자들이 하기라는 수행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2) <겨를의 미들> 속 화자들에게 뭔가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었다 죽을 나무만을 골라 심었다

그 바람이 스치자 밤마다 부러졌다

 

해놓고 변명을 하기보다는 변명을 위해서라도 해야지

변명을 만들어놓으면 하게 되겠지 나는 너무 하지 않으니까

저문다

 

해도 안 해도 있어도 없어도 그 자리에서 턴테이블은 회전한다

기록된 음악이 재생되며 시제時制를 지운다

― 「변명의 자리의 변명의부분

 

죽을 나무만을 골라 심”(58)는 기이한 행동은 변명을 위해서” ‘하는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변명의 내용이 어차피 죽을 나무였다일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이 시의 내적 논리에 의하면 평소에 너무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하기라는 행위로 견인하기 위해 변명이 동원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하기(심기)’는 변명할 일을 만들지 않을 실천이 되지 못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변명 자체의 목적이 된다.

, 이 화자는 변명을 하기 위해 변명의 내용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마치 나무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듯이. 그래서 섣부른 낙관에 기대기보다는 나무의 죽음 이후에 너무 슬퍼하지 않을 안전장치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이.

 

그렇다면 나무의 죽음은 있을 것이자 화자의 믿음의 내용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있을 것에 대한 믿음은 이미 있는 것(일어난 것)’을 재배치하면서 화자들이 이동하도록(걷도록) 추동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 시세계는 있는 것/없는 것’(존재론)보는 것/못 보는 것’(인식론), ‘있는() /있을 것’(실현/미지칭 예정형)이라는 너무나도 상이한 층위의 논리들을 마구 뒤섞는데, 믿음 및 그로 인해 추동되는 행위가 그러한 이분법을 초과하는 제3의 항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때, 거의 모든 시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걷는 화자들은 비록 인식은 불가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리라 믿어지는 것에 도달하고자 기꺼이 이동을 계속한다. , “있을 무엇 때문에 있는 무엇이 움직이려고 해본다.”(겨를의 미들, 낮의 증거, 극성)

 

믿음의 내용을 미리 만들어두고서 그 내용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로 움직이는 모습은 언뜻 운을 시험해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가보면 펼쳐질 것이 있다는 것을 아직 믿습니까(극성, 강조는 인용자)라는 질문이 암시하고 있듯, 존재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의 장거리 경주(철거)아직도 멀기만 한 채 필사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끝까지 따라가보(극성)는 최선의 하기이다.

그렇기에 믿음이라는 말은 불충분할지도 모른다. “너 백 살 때까지 내가 생일 축하해줄게(성동혁에게)라는 약속에서 드러나듯, 의지에 가까운 믿음인 것이다. (해당 시의 첫 연에서) 무성히 죽음이 번지는 가운데에서도 기꺼이 백 살을 기약하는 그러한 의지가 이들의 믿음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다. 아래 시에서는 느닷없는 꿈으로 인해 한 것과 안 한 것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마구 뒤섞인다. 정신을 치고받는다는 말도, 그 동기가 서로를 삭제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깊은 파문을 남긴다. “나는 나를 나와 빠르게 나눌 수 없는 사람(되레)이라는 언급이 암시하고 있듯, 결국 화자의 분리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만 같다.

 

결혼을 한 적 없는데 희미한 기억으로는 분명히 그러한데 이혼하는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에는 오늘의 아침인지 미래의 아침인지 결혼을 한 적이 있었는지 헤어진 것들의 해진 자락을 붙잡고 있는 나만 모르는 것들이 마지막인 듯 필사적으로 끝자락 어디쯤 붙잡고 에워싼다

 

아는 얼굴들이 성별을 지우면서 섞이고 아는 남자와 남모르게 알던 남자가 다투듯이 오로지 한 남자가 되기 위하여 서로를 삭제하려고 정신을 치고받으며 이 여자 앞에 혼자 서려는 것이다

()

 

이혼하는 아침에는

같이 일어나지 않거나

같이 밥을 먹지 않거나

같이 섞었던 것들을 하나씩 따로 공들여 떼어내면서

낳았던 것들도 주워 담으면서

엄마,아빠,처럼 들렸던 목소리들도 훈육하듯이 냉정하게 멀리하면서

한 적 없는 사정과 거듭하는 배란과 결혼과 동침과 이혼과 계속해서 돌고 도는 나만 모르는 것들이 설레는 것들도 차단한다

― 「이혼하는 아침에는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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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 - 안미린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564
안미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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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림에서 꾸는 하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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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말들 아케이드 Arcade 13
백지은 지음 / 파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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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CRITSSAY’라는 단어가 표지에서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파란 아케이드 시리즈의 다른 평론집들은 표지에 ‘CRITICISM’이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크릿세이란 읽기(크리틱)’쓰기(에세이)’의 결합이자 읽기의 수행성으로 열린 쓰기”(9)라 할 수 있다.

 크릿세이인 만큼 수록된 글들이 길지 않으며 무엇보다 정말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문학 작품에 더불어 여러 시사적 이슈, 방송 프로그램, 정책 현안, 정치인들의 행태 등이 함께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점 또한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전 저서들인 <독자 시점>이나 <건너는 걸음>에서 저자는 현상의 기저에 은폐되어 있는 기성 권위의 욕망과 폭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무비판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의 당위성을 되물으며 비판적 각성을 촉구하곤 했는데, 이번 책에서는 그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논점을 흐림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저자의 강점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독서의 즐거움을 더한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을 6개의 키워드로 추려내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여가며 몇 자 리뷰를 적어보고자 한다.


1. 신성화의 기만

 초반부에는 동물을 인간 중심의 의미화로 사고 체계에 포섭해온 관습이 지적되는데, 이것이 가능해진 한 원인이 전능자의 창안에 있다는 해석은 흥미롭다. 어쩌면 이는 신성화의 발명이라 해도 무관할 텐데, 그로 인해 인간도 신성시”(28)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동물 착취의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유사한 문제의식이 김숨 소설 분석에서도 발견된다. 남편은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구원의 당위성을 들먹이지만, 이러한 신성화는 실은 일방적 헌신과 의무를 요구하는 격하에 가까우므로 기만이라 할 수 있다. 실은 구원이 가능한 자로 아내를 격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물론 격상도 대상화이고 폭력이다) 그 구원을 받아 마땅한 자기 자신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남편이 거론하는 그 당위성의 역방향은 결코 성립하지 않으며 아내의 경우에는 구원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은 위계의 문제이므로.


2. 불운 불행

 뒤이어 불운과 불행을 엄밀히 구분하며 소외계층이 왜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정연하게 짚어낸다. 불평등에 관한 논의가 거론되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없어서가 아니라 불평등의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 사회 구성원의 삶이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53)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일 수밖에 없음을 함께 지적한다.


 불행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이 어떻게 폭력성을 은폐하며 개인을 보호의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지가 치밀하게 사유되고 있는데, 특히 어느 한 개인에게 내재된 약점이 절대 불행의 귀속 사유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80)


 “우리 사회의 불행을 개인들 내부에 유폐하지 않고 외부 구조의 폭력을 환기할 수 있도록한다는 점에서 안보윤의 소설은 중요하게 거론된다. 죄책감이 윤리적 덕목으로서 어떻게 요청되는지를 함께 짚어낸다.


3. '중립'의 기만

 다소 길지만 중요한 대목이라 옮겨보기로 한다.

이 무거운 마음은, (사회 구성원의) 무지와 무심에 대한 하나의 태도이자, 그 자체로 불식간에 무지와 무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역할까지 하고 만다. 섣불리 다수의 책임을 규탄하는 계몽적인 태도나 다수를 무조건 가해자로 돌리는 손쉬운 태도 양쪽을 경계하면서도, 겉으로 중립을 가장한 무지와 무심이 실은 사회적 폭력의 일부 혹은 그 원인임을 깨닫고 기억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56)

 (입장 정립을 위해 다각도의 검토를 거치며 고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중립은 아무 입장도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또 다른 의사표현이라는 점에서 허울 좋은 명목에 불과하다. 이렇듯 무지할뿐더러 무심하기까지 한 중립은 실은 동조로 기능할 때가 훨씬 많고, 그렇기에 사회적 폭력의 재생산에 일조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편 3부의 제목은 무지한 무시의 말이다. 무시에서 무지가 비롯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무지하니까 무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 무지한 무시의 말이 이중적인 비하의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124쪽에서 실제 사례를 들어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4. 태만함의 대타항으로서 문학

 우선 저자가 문학적인 것문학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보자.


찬양이든 비판이든 오직 한 가지 의도, 그 의도만을 선포할 목적으로 쓰인 글을 라고 부를 수는 없다.”(115)

무엇에든 매몰된 인식으로는 말의 위의를 살릴 길이 없고, 말의 위의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문학적인 것이다.”(117)

반성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비웃음을 당해도 창피함조차 없는 듯 보인다. 태만함에 대한 죄책감도 조롱에 대한 수치심도 없는 그런 비문학적인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활개 치며”(117)

 이러한 서술을 통해 편협함이 문학적인 것의 정반대에 놓여 있음이 분명히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편협함은 다른 방식의 사유는 전혀 하지 않겠다는 오만함과 태만함에 근거해있다. 태만하기에 오만하기까지 한, 혹은 오만해서 태만한 태도는 절대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문학의 반대말은 태만함이다. 이때 태만은 자기반성이나 쇄신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으면서 상투화된 권위의식에 영합해버린 낡아빠진 감각을 통칭한다.


 사유가 한 가지 방향으로 제한된 것만이 문제인가. 그렇게 고착된 사유 체계가 특정 계층의 사리사욕을 공고히 하는 데 복무하는 경우가 더 문제다. 문학은 그러한 욕망을 은폐하기 위해 계속하여 신성성과 권위를 부여받으며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의도 아래 호명되고 또 호명된다.

에서는 문학적인 것이 반성, 부끄러움, 죄책감 등과 연결되는 감각임을 역으로 도출해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잘 부끄러워하며 더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옳지 않은 일에는 정당하게 분노를 표하며 살아야 한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삶을 살아갈 때의 신념과도 결코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5. 웃음의 혐오학

 약자 조롱이 기본값이 되는 한국식 개그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공모로서의 웃음’(공범 의식)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웃음을 주고받은 축이 합의한 관념 쪽에서 배제한 누군가가 있, 그때 웃지 않은 누군가가 모욕감을 느꼈다면, 그 배제는 혐오와 차별에 가까운 것”(136)이다. 이처럼 개그가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기능한다면 그건 웃음이라는 동의를 통해 특정 관념에 면죄부를 덧씌워주기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어떤 개그가 내면화하고 있는 사회적 관념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파악하면서 경솔하게 동의해버리지 않는 태도가 요청된다. “웃음이 조성되는 경우 웃음보다 동의가 먼저 문제되어야 한다”(136)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또 우리는 정당한 분노나 요청의 표현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곤 한다. 공모하는 웃음(=혐오)이란 모든 것을 얼마나 쉽게 일축해버리는지. 특히나 어떤 문제를 지적하면 그 문제가 아니라 지적한 사람이 특별히 예민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이지 않은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정당한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갖은 모욕과 수모를 기꺼이 감수한 일이 있는 분들에게 특히 큰 위로가 될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평의 최종 지향은 결국 삶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그래서 내가 이 분의 비평을 특히 좋아해왔구나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리고 결코 수혜자로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저자처럼 질문해보자. 이게 웃긴가? 왜 웃지?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웃어버림으로써, 웃도록 유도함으로써 도대체 어떠한 배경과 맥락을 짓뭉개고 있는지(142) 수시로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는 혐오의 습관은 진의를 고민하려 하지 않는 태만한 감각 구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6. ‘비평가로 살기

 저자는 비평 행위와 비평가를 구분한다. 비평 행위는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이미 일상생활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비평가로 살기 위해서는 비평가로서 살고 있다는 자의식”(250)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평 대상에 대한 관심, 감상, 공부가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이렇게 촉발된 감각과 사유를 반드시 글로(글이 어렵다면 다른 무엇으로든)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산출)


 비평가는 두 단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서술이 그래서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쓰는 행위를 통해 다시 경험하고, 더 잘 경험하게 되는 것이 비평가인 것이다. 과연 읽고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창조된다.(251) 머리말에서 읽기(크릿)경험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었다면, 쓰기(세이)는 쓰기 행위가 끝난 뒤에 효과로서 당도할 주체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백지은의 평론을 읽을 때마다 통쾌함과 개운함을 느끼곤 한다. 간혹 어딘지 미심쩍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어떤 현상을 지탱하고 있는 문제적인 내부 구조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그의 글을 읽으면 그 원인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로를 받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에 지지받는 경험은 참으로 값진 것이다. 나 또한 어떤 지지를 건네는 독서를 이어가야 할 것이고.


 그런 한편 더 제대로살고 싶어진다. 부끄러움이 없게 살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그건 불가능할뿐더러 기만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더 잘 느끼고, 그걸 행동으로 분명히 책임져가면서 지금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무책임하게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정말로 그러한 힘이 있다.

 저자의 말대로 이 부끄러움과 분노는,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문학에 관한 어떤 지독한 편견을 해체하는 데 들인 정당한 값이어야만”(78)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 모두가, 당연하다고 승인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되물으며 각자의 삶에서 크릿세이를 실천해나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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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시 - 포스트휴먼 시대 시의 미래
공현진 외 지음 / 소명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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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아 문학장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문학의 유통과 소비 양상에서부터 문단 제도 변화 등에 관한 논의는 근 10년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코로나가 급박하게 앞당긴 비대면 시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속화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점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관계성을 (1)‘위기로 섣불리 재단하거나 (2)지나친 낙관주의적 전망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으로 접근할 때 간과할 수밖에 없는 맹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는 데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아 먼저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사유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전적인 논의들이 포스트휴먼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에게 닥친 위협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예각화되어 있었다면, 이 책은 '인간성'이 도대체 어떻게 조건 지어졌는지를 되물으며 그간 '주체'가 전유해온 권력과 위계의 문제를 폭로하고자 한다. 쉬운 예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두려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러한 가정에는 인간의 우월성과 견고한 자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한 기저에 은폐되어 있는 인간중심주의우월주의를 탈피하는 것에서부터 포스트휴먼 담론이 사유되어야 함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 ‘위협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가 아니라 자동화된 사유 체계 내에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보자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기술력이 아니라 인간의 폭주와 무절제이다.(이경수))

 

소통감정 이해가 오히려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진단은 성급한 해결 의지에 맞설 대안으로 제시된다. 인공지능과 인간 및 다른 종들이 어떻게 적절한 관계성을 맺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오히려 오늘날 시가 더욱 요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제시한 이경수의 1부를 시작으로,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인간중심주의 및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과 반성적 시각들이 이어진다. 특히 '비주체'에 대한 폭넓은 사유들이 책의 상당한 분량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1) 인간/비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과 물질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위험한 일들은 인간과 물질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설정하는 데서 발생한다”(77)는 공현진의 타당한 지적은 그간 인간의 우월성이 무비판적으로 전제되어온 점을 겨냥한다. 인간과 -인간을 사유할 때 보통 그려지는 관계도는 은연중에 권력 위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물질에게선 힘을 제거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2) ‘비인간의 해방을 근거로 들어 포스트휴머니즘을 마냥 낙관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 책은 적절한 사유의 장을 마련해준다. 아래 성현아의 지적은 인간/비인간으로 손쉽게 환치해버리는 관습적인 구획이 그 내부에서 인간자격과 특권을 획득하지 못한 존재들에게 어떻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가 도래하며 인간/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비인간에게 해방을 선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에 이미 포함되어 있던 비인간 존재들을 않고 다음 담론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한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비인간의 구분을 기계를 가진 인간의 계기가 없는 인간의 대결로 답습하는 차원에 그칠 수 있다.”(153)

 

가령 인공지능의 대체로 인한 인간소외라는 화두를 제시할 때, 인간범주 내부에서 명백히 발생하고 있는 복잡다기한 소외문제는 너무나 쉽게 간과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A는 인간P와 동등한 자격과 특권을 지닌 인간인가?) 즉 인간중심주의, 인간 우월주의를 탈피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내부에서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게 하는 젠더, 퀴어, 장애, 소득, 지역, 학력 등의 역학과 상관관계를 세밀히 살펴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예기치 못한 위협처럼 섣불리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어쩌면 책임을 어딘가로 떠넘기려는 태만과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대표 저자의 언급대로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축적물일 수밖에 없기에, ‘지금-여기를 올바르게 사유하고 적절한 토대를 구축해나가는 것만이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전망을 더욱 긍정적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미래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시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마치 예형된 피구라처럼이미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알 수밖에 없는 일 것이다. 미래의 시는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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