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상설 공연 민음의 시 288
박은지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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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의 기록자, 상실의 기록자

 

여름 상설 공연이라는 시집명에서 예상되는 것과는 달리, 이 세계는 1년 중 9개월 이상이 겨울로 뒤덮인 곳이다. 추위로 인해(원인) 국경 학교의 학생들은 수시로 꿈에 사로잡힌다.(짝꿍의 자랑, 짝꿍의 모래) 대부분의 시가 꿈속을 배경으로 하거나 꿈과 중첩되어 있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시 속에서 꿈이 등장할 때마다 그 배후에서 꿈꾸기를 추동하는 극심한 추위에 대해 자연히 떠올리게 되었다. , 이 시집의 각 시편들은 국경 학교에서 꾸는 꿈의 단편들이기도 한 것이다.

 

때때로 는 국경 너머로 달아나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떠나지 않으면서 이미 떠나간 이들과 상실한 이들을 성실하게 기록해나간다. 누군가 마을을 떠날 때마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발소리만이 마을에 남고, 그러한 발소리들이 으로 누적되어 폭설처럼 쏟아진다. ‘는 그 소리를 받아 적는 사람이다. 상실이 멈추지 않으므로 그의 꿈의 기록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와 짝꿍이 낭떠러지 아래서 이름을 줍는 것이나, “줍지 못한 이름이 없을 때까지 () 낭떠러지를 지고 살”(짝꿍의 이름)겠다는 다짐 또한 국경의 기록자로서의 화자를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2. 국경 학교의 여름

 

물론 이 추운 국경 지대에도 여름은 온다. 모래가 부서지고 쌓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화자는 (모래)-미래(가능성)가 언젠가 소진되고 말 것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타인(짝꿍)과의 삶의 공유라는 약속을 통해 이내 미래에 대한 낙관이 가능해진다.

 

한편 이 여름이 찾아오는 방식이 흥미롭다. 누군가 사라지고, 그가 없는 빈집이 여러 사람들이 숨겨놓는 비밀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비밀이 그대로 집이 되는데, 이제 사람이라곤 없는 이 집이 그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는 수식을 입는다.(그렇게 여름) 앞서 봤듯 사람들이 떠나갈 때마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거세지는 것이라면, 역으로 여름은 새로운 사람의 방문 혹은 거주를 예비하는 시기라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 출발이 누군가의 사라짐이었다는 점은 어떤 무한한 순환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3. 나무에 묶인 시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았던 시는 몽타주였다. 계절을 한 번에 하나씩만 겪던 평범한 나무가 돌연 한 계절에 마음이 묶이면서 그에게 모든 계절이 뒤섞여 들어오게 되고, “모든 계절을 한 번에 살아 내게 되었다. 아마 나무는 어떤 사건을 겪고 난 뒤의 외상으로 인해 그 시점에 고착돼버린 듯하다. 페달을 힘껏 밟아도 강 위의 특정 지점에서 잠자코 있는 오리배처럼 내부 시간은 순차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착된 반면, 외부 시간은 그런 개인 사정과 무관하게 마구 침범해오면서 나무를 더욱 거대하게 만들어간다. 이를 가리켜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라 해석한 해설도 무척 흥미로웠다. 더 나아가 해설은 이러한 중첩적인 시선을 박은지 시인의 독특한 이미지 축조의 원천으로 본다.(128)

 

한편, 그러한 나무의 기분을 궁금해하면서 이어지는 질문이 흥미롭다. “성실한 것일까 어쩔 수 없는 것일까라니. 성실(의지 발휘)어쩔 수 없는 것(의지 발휘 불가능)은 너무나도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인상 깊었다. 마음이 묶인 나무처럼 냇가에 묶여서, 오래도록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이후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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