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가 오지 않는 저녁
김영 지음 / 비엠케이(BMK)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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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소설들은 대체로 보호자가 부재하거나 생활동반자과의 갈등을 겪고 있는 가정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적절한 돌봄이 필요한 미성년자, 노인, 장애인을 빈번히 다루기도 하지만, 사회적 구조 문제를 고발하거나 시정하는 데 집중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물들이 '계몽'되는 과정을 그릴 필요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초점화자들은 이미 그런 문제가 자신의 잘못도 책임도 아닌 걸 알고 있다. 물론 이는 체념적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영이 그리는 인물들에게선 구조의 문제가 자신의 소관 밖이라는 어떤 산뜻함마저 느껴지니 말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해도 자신이 바로잡힐 이유나 책임은 없으니까."<노아의 방주>) 소설 속 저소득 계층들은 공공기관이나 복지 혜택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생활의 기술이나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처세술에도 익숙-능숙하다.


오히려 김영이 주목하는 것은 개별 인물들의 적나라한, 때로는 추잡하기까지한 욕망이다. 그리고 이 욕망이 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무기처럼 다루는 기술과 만날 때 김영 소설의 탁월한 서사적 전략이 빛을 발한다. 대표적인 예가 <아르바이트>다.


<아르바이트>는 전직 외교관이며 재력가이지만 혼자서 거동이 불가한 '강 노인'의 수발을 들게 된 '내'가 맞닥뜨리는 곤혹을 그리고 있다.

동정심을 유발하여 자신을 씻기도록 유도하는 강 노인은 정말로 기저귀 안이 짓물러 있어 누군가에 의해 씻겨져야만 하는 돌봄 대상인 동시에 젊은 여자의 손길에 쾌락을 느끼고자 하는 성욕이 강한 남성이다. 그는 '나'에 의해 씻겨지면서 두 가지 욕구를 만족스럽게 충족시킨다.

더 나아가 그는 '나'에게 자신을 위해 포르노 테이프를 틀어줄 것과 옆에서 함께 앉아 있을 것을 대가로 거래를 제안한다. 포르노 테이프를 같이 보면 돈을 주겠다며(금액은 차차 올라 '골드 바'에까지 이른다)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동참시키는 것이다.("학생, 같이 봐요. 나랑 같이 비디오를 보면 내가 돈을 주지. 한 편에 만 원, 어때요?")


강 노인은 내내 '나'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이미 그런 제안을 한 순간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어쩌면 자신까지도 포섭하고 있는 강 노인의 "비릿하고 니글거"리는, "흐리면서도 끈적끈적한 눈빛" 속에서 그의 음담패설을 바로 옆에서 들으면서 극악무도한 '아르바이트'를 수행한다. 골드 바를 생각하며 견디는 '나'의 모습은 교묘한 다층적 위계에 굴복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떤 게임의 보스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오픈 게임>의 뇌성마비 장애인 '달팽이'는 어떠한가? 그는 장애성이 숨겨질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남성적인 에너지"를 부러 과시하며, "성추행범으로 잡혀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성적 욕망의 과잉 상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호감을 표하는 '달팽이'에게 "우월감과 동정심"이 섞여 찾아간 '여자'에게 '달팽이'는 혀로 그녀의 나이만큼에 해당하는 수의 종이학을 접어준다. 결의에 차서 꿋꿋이 그 고행과도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달팽이'의 긍지는 그 자신에게는 "오르가슴에 이른 표정"으로, 여자에게는 곤혹스러운 "블랙코미디"로 그려진다. 여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연민도 아니고 회피도 아닌 심정"이 되다가 "그냥 그가 너무 늙었다는 생각"에 이른다.


인간의 여러 욕구들은 어떤 각도에서는 숭고하고, 어떤 각도에서는 추하고 더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 김영 작가는 인간 생의 면면에 대해 깊이 관찰한 시선을 소설에 녹여 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끈하게 표백되지 않는 돌봄과 축축하고 불쾌한 욕망을 표출하는 대상이 '사회적 약자'일 때의 곤혹에 대해서 치열하게 매달리는 보기 드문 작가다. 이 작가의 시선이 지금 우리 문단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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