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p.121
마르크시스트든 파시스트든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진보 진영 내부에도 남성 중심 논리가 관통한다. 성폭력도 발생할 수 있다. 나는 '운동권' 남성이 '일반' 남성보다 성폭력을 많이 저지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깊은 은폐 논리와 조직 보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운동 사회에서 성폭력이 빈발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p.122
인류가 발명한 제도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것은 전쟁이고 그 다음이 가족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 연구자는 뺨 한 대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남편에게 맞았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성폭력 신고율이 2퍼센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은 언제나 축소 보고된다.
p.124
나는 가정도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인간 사회인 이상, 폭력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대로 가정에는 폭력이 없을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정폭력의 발생 기제라고 본다. 폭력으로 평화로운 가정이 깨져서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도 (남성 중심적) 가정이 깨지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p.126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당연히 정치이고 역사라고 여겨진다.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폭력, 미국의 이라크 침략 등 남성이 남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억압이고 이에 대한 저항은 투쟁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개인적 문제이건나 집안일, 혹은 기껏해야 '격렬한 로맨스'로 간주된다. 여성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 피해자가 여성일 때, 피해는 언제나 사소화된다. ... 가정폭력은 피해가 명백히 가시화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한다. ... 그들의 고통은 가족의 문제가 되거나, 자녀의 고통이 강조될 때만 부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왜 참을성이 없을까')
p.16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보다는, '누구의 아내'일 때 정상성을 획득하고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다. 때문에 여성에게는 사회적 시민, 노동자로서 정체성보다 아내, 어머니 등 성역할 정체성이 우선시되며, 여성의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은 성역할로 환원된다. ... 가정은 남성의 입장에서 공적인 곳과 달리 경쟁이나 권력 관계, 노동이 없는 평화로운 안식처로 여겨진다(물론, 이것은 신화이지 현실이 아니다). 때문에, 가족은 비정치적인 공간이어서 법이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여기서 법은 남성 젠더를 상징하기 때문에, 법이 집안에 들어오게 되면 한 집안에 두 명의 남성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집안의 가부장인 남성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의 실제는, 공적인 영역의 시각에서 사적인 영역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때문에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에서는 폭력과 강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왜 떠나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여성의 삶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p.162
남성에게 집은 프라이버시의 공간이지만, 여성에게 집은 노동의 공간으로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집에서 나와 공적인 노동을 할 때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p.170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이유조차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논해지지 않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여아 낙태는 여아의 생명권과 어머니 여성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성비 불균형으로 '남자들이 장가 못 간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신대 문제는 피해 여성의 인권이 아니라 민족의 수치를 중심으로만 논의된다. 가정폭력의 해결책 역시 피해 여성의 공포나 고통의 해결보다는, 남성 중심적 가족 유지를 더 강조해 왔다. 문제의 원인이 대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p.171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 간 성폭력, 성 전환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권 침해이고 성폭력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사유재산권' 침해-가 된다. ...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다른 남성의 '가임 가능한 부녀자'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p.177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몸을 주체의 소유물로 보는 관점에서는 몸은 마음이 아닌 어떤 것이며, 몸은 영혼, 이성, 마음의 배반이자 감옥으로 간주된다. 몸은 존재를 담아두는 보관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페미니즘 역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남성이 가정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것이다. 즉,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은 근대 자유주의 남성 논리를 비판하기보다, 기존의 논리에 여성도 포함시켜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는 여성의 삶에 기반을 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여성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p.178
정의(justice)로서 평등한 인권은 같아짐(same)이라기보다는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 양성 평등한 인권은,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양성 평등은 남성이 여성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은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남성은 그만큼 '사적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남성 중심의 같음을 의미하는 '양성 평등' 이념은, 여성들에게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의 두 영역에서 이중 노동을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이것이 소위 '차이와 평등의 딜레마'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과의 차이를 주장하면 남성 사회는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같음을 주장하면 사회적 조건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성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양성 평등을 "여자도 군대 가라.", "숙직해라."로 이해하는 것이다.
p.179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두 발로 걷는 비장애인에게 동일한 조건에서 달리기 경쟁을 하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인권운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인권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인권 개념을 문제시, 재구성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인권의 운동' 과정이기도 하다. 인권운동은 인권 개념의 운동을 낳고, 동시에 새로운 개념은 인권 운동을 발전시킨다.
p.213
만약 내가 탈 성매매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여성주의자인 나의 주장이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당사자', '민중 여성'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권위를 갖는 것은,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절대화하려는 일부 여성주의자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에서, 나는 1980년대 중산층 출신 운동 진영의 '민중 판타지'를 떠올렸다. '어디에도 없는' 민중의 목소리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내세움으로써(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 그 자신은 '민중'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하기의 위치를 선점하고 관념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경쟁하며 관계를 파괴하는 경우가 숱했다.
'약자의 큰소리(tyranny of minority)'는 불행과 고통이 심각할수록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p.214
여성주의 사유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p.217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감정 노동, 관계 유지를 위한 노동을 면제받는다.
특히, 한국의 중산층 남성들은 근대화 역군, 새마을 운동적 인간, '회사 인간'이다. 이들은 과다한 업무로 인해 같은 남자들하고만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낸다. 가장 큰 문제는, 남자들이 그 많은 시간을 남자들과 보내면서도 그들 내부에서 친밀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여성에게만 그것을 전가, 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갈망하면서도, 여성에게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배운다. '진짜 인생'은 남자들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의 일생 중, 여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기간은 연애할 때가 유일하다. 결혼하면 남자들이 돌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정희진, '멜로드라마의 남성 연대', 이프2004 겨울호)
p.218
사회는 남성의 성 구매 이유를 '성욕 해소'라고 주장하지만, 실상 많은 경우 남성의 성 구매는 보살핌받고 싶거나, 본인의 노동과 고뇌로만 가능한 인간 관계를 손쉽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공적'인 곳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서 남성은 국가나 자본의 형태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며, '사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가족, 이성애 관계, 성매매에서는 관계성을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감정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성매매 '근절'이 '불가능'하지만, 여성주의 정치의 최후, 절대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남성의 의식과 무의식, 그들의 24시간을 혁명하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남성 젠더 문제다.
p.10
일반적으로 대량 학살이나 집단 성폭력 같은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은, 고통을 겪은 자신과 고통을 말하는 자기 사이에서 분열한다. 자신의 고통을 믿지 못하는 청자를 위해 자기 경험을 조절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 자체도 상처지만,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상처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commitment)하는 실천인 것이다.
p.11
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여성주의에 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p.12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편안할 수는 더욱이 없다. 다른(alternative)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empower). ... 여성주의는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남성의 경험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불일치한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갈등 없이 수용된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
p.40
어떤 면에서 부르주아 지식인 남성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옹호하는 '좌파'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력, 남성의 주체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상대화해야 하는, 자신을 후원하는 '아버지'를 버려야 하는,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전이인 것이다.
p.41
그럴 때마다, 나는 "주체는 타자의 인질"이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말을 상기하면서 흠칫 놀라게 된다. 남성은 여성에게 의존한다. 타자(여성) 없이 주체(남성)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p.43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