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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생물학 ㅣ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8
피터 벤틀리 지음, 김한영 옮김 / 김영사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보다 훨씬 빠른 진화를 거듭하여 훨씬 뛰어난 지능을 가진 디지털 생물체가 과연 더 이상 인간의 소유물이 되기 싫다고 무조건 우리를 공격할까? 구태여 우리가 그들과 숨막히는 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을 초탈해버릴 만큼 빠른 진화 과정을 겪고 있는 생물체는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도태되어버리거나 스스로 자살하지 않을까. 많이 안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니까. 나도 우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고 그 정답을 찾고 싶지만, 그 정답은 반드시 나이가 한참 들어서여야 할 것이다. 모든 걸 다 아는데 더 이상 살아야할 필요는 무엇이며, 세상을 초탈할 만큼 성숙했는데 더 이상 속세에 집착해야할 필요는 또 무엇이 있겠나. 그것은 어쩌면 내가 자살을 택한다는 것보다는, ET가 소년의 기억을 지우는 것처럼 그 사실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진실을 아는 즉시 죽게되는 매트릭스 속의 다른 인간들에 의해 죽게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고 난 후, 지하철 계단을 따라 올라와서 이 컴퓨터 검색실에 앉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몽롱해서 마치 '네오'나 된 것처럼 지나가는 일상 속의 얼굴들(떠들어대거나, 웃거나, 아무 생각 없거나, 머리나 만지작거리며 자기 옷에만 신경쓰거나 하는 얼굴들)이 한심하기 그지없었고, 그들과 나는 달랐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딘가에 또 있을 텐데 하면서 그들과 만나 이야기해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들었다. 그때 나는 '데미안'이 말했던, 이마에 표적을 단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제 겨우 일상의 나로 돌아왔다. 나는 영화를 보면 그 세계에 빠져 내가 거기 있는 것 같아, 갑자기 소름이 끼치고, 막상 영화가 끝나면 지금 이 세계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그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 외의 많은 사람들도 이럴 것이다. 아마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과 사방의 완벽한 사운드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진실을 알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