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사회 -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단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
수전 프라인켈 지음, 김승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수도 없이 사용하는 '플라스틱(plastic)'이란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plassein'인데, '주물하다' 혹은 '형태를 만들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그리스 어원이 형용사나 동사로 쓰일 수는 있지만 명사로 쓰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마치 어떤 사물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플라스틱은 천연물질과 달리 특정한 성질을 갖지 않는다.

 

나무나 돌, 금속이나 광물 등의 천연물질은 원래부터 특정한 성질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이를 보면 대충 그것의 가공법이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나무를 보면 톱과 대패를 떠올리고, 돌을 보면 망치와 정을 찾는다. 우리는 금이 녹슬지 않는다는 걸 알고, 다이아몬드는 가장 단단하다는 것도 안다. 이렇듯 천연물질은 그 자체의 특성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우리는 그 물질과 관계를 맺는다.

 

반면에 플라스틱은 이런 내재적 특성이 없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으로 만든 다양한 포장재들은 각기 성질이 다르다. 강도·내구성·투명성·유연성·탄력성 등이 다 천차만별이고, 별다른 설명 없이 플라스틱 자체만 봐서는 우리가 그것의 쓰임새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물론 각 플라스틱을 만들 때에 어떤 특정한 성질을 부여하긴 하지만, 그건 '가소성(plasticity, 다양한 변신 가능성)'의 활용이지 본질적 특성이라고 할 순 없다.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플라스틱은, 인류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든 변신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한다. 신은 각각 고유의 특성을 지닌 천연물질을 창조했지만, 인간은 오직 가소성만을 가진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플라스틱 덕분에 인류는 비로소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후 수십 년간 사람들은 플라스틱에 열광했고, 결국 우리는 지금 플라스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플라스틱 사회 -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단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
수전 프라인켈 (지은이) | 김승진 (옮긴이) | 을유문화사 | 2012 | 원제 Plastic (2011)

 

우리는 아침에 플라스틱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플라스틱 변기 뚜껑을 열며 하루를 시작한다. 칫솔은 물론이고, 치약 튜브와 뚜껑 역시 플라스틱이다. 샴푸, 폼클렌징, 바디워시, 로션 등등 다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다. 전기 주전자와 냉장고 손잡이, 반찬통과 주걱, 빵 봉지와 쓰레기통.. 주방에서는 그냥 플라스틱이 아닌 걸 찾는 게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우리의 일상복 중 상당수도 플라스틱 섬유이고, 가전제품은 대부분 플라스틱이며, 자동차 내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의 스마트폰을 비롯한 컴퓨터. 만약 플라스틱이 없었다면 도대체 컴퓨터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온종일 우리는 스마트폰을 쓰고, 일하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컴퓨터를 사용한다. 점심을 먹고 계산할 때 손에 드는 신용카드도 플라스틱이며, 버스나 지하철 손잡이도 그렇다. 가방이나 신발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게 많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누르는 전등 스위치도 플라스틱이다. 하루의 끝, 우리는 다시 플라스틱 매트리스에 눕는다.

 

현실적으로, "플라스틱에 전혀 닿지 않은 채로 일상생활을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미국의 저명한 과학 저널리스트 '수전 프라인켈(Susan Freinkel)'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실험'을 통해 자신이 플라스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플라스틱 사회(원제 Plastic: A Toxic Love Story, 2011)]를 쓰게 되었고,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도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단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다.

 

저자는 플라스틱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가기 위해 여덟 가지 물건을 골라서 각 한 챕터씩 총 8개 주제로 이 책을 구성했다. 이 물건들을 통해 수전 프라인켈은 플라스틱의 역사와 문화, 플라스틱 물건의 제조 과정, 플라스틱을 둘러싼 정치적 사안들, 인조 합성물질이 건강과 환경에 끼치는 영향,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플라스틱을 제조하고 처분하기 위한 노력 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1. 머리빗 - 플라스틱의 역사와 문화적 격변

 

빗은 인간이 사용해 온 가장 오래된 도구에 속하고,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은 어느 것이든 빗의 재료로 사용했다. 수많은 천연물질들이 빗의 재료로 사용됐고, 당연히 각 물질의 내재적 특성 및 재료 공급상의 제약이 뒤따랐다. 이는 곧 '희소성'을 뜻했고, 그와 동시에 사회계층을 구분했다. 19세기 말 최초의 인조 플라스틱 등장은 소비의 대중화와 문화적 민주주의를 이끌었으며, 20세기 초반 전 세계의 실험실에서는 진입 장벽을 낮춘 각종 '신물질'들이 쏟아져 나왔다.

 

플라스틱의 출현에는 오랜 세월 자원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수많은 발명가와 혁신가들의 노력이 있었고, 플라스틱은 인간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풍부함을 누리게 해주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플라스틱의 원료는 대부분 석유와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며(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제와 석유화학업체의 이해관계), 플라스틱의 급격한 확산은 인류의 심사숙고 끝에 결정된 게 아니었다. 그저 2차 세계대전과 베이비붐이 기폭제가 된 거였고, 결과적으로 물건의 범람과 낭비적 문화를 불러왔다.

 

2. 의자 - 플라스틱 디자인 윤리와 극단적 효용성

 

의자는 인류와 가장 친밀한 가구이면서, 또한 무척 많은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야 하는 가구다. 역사적으로 의자는 각 시대와 문화를 반영했고, 예술 표현의 장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의자는 가구 디자인계의 애베레스트 산이었으며, 창조적인 영혼들은 형태와 기능을 결합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탐구하면서 좋은 의자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도전했다. 플라스틱의 출현 이후 이러한 혁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신물질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뤄졌다.

 

 [플라스틱 디자인 역사에 길이 남은 판톤 의자와 루이고스트 의자. ⓒ Pantonstolen, Kartell]

 

현대 디자인이 지향하는 평등주의(좋은 디자인은 비용이 많이 들 필요가 없어야 하며, 가장 평범한 일상의 물건도 아름다울 수 있다)와 '마야 원칙(가장 앞서 가면서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MAYA, most advanced yet most acceptable)' 등은 새로운 플라스틱 의자에 한 차원 높은 목적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이런 디자인 윤리가 극단적 효용성(플라스틱의 장점을 극대화한 대량 생산)에 압도 당하면서, 혁신적이었던 일체 주조 의자는 결국 싸구려 플라스틱 물건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3. 프리스비 원반 - 플라스틱의 생산 방식과 열악한 노동 환경

 

프리스비(던지기 놀이용 원반)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장난감이었고, 1957년 시장에 나온 이후로 1억 개도 넘게 팔렸다. 이 유명한 플라스틱 장난감도 요즘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플라스틱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신물질'들의 다양한 기능이 알려지면서 개발된 제품이다. 종전 이후 원료 비용이 낮은 플라스틱(화석연료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베이비붐을 타고 현대 장난감 산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값싸고 가볍고 유연한 신재료들은 업계의 이윤폭을 크게 높였고, 플라스틱 산업의 급격한 발달과 함께 생산량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산업과 동일하게 '가격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 장난감 다섯 개 중 네 개는 중국에서 제조되고 있다. 특히 장난감 업계는 긴 노동 시간과 적은 임금으로 악명이 높은데,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잔혹할 정도로 고단하다. 에어컨도 없는 공장에서 쉴새없이 돌아가는 플라스틱 사출성형 기계의 뜨거운 열기로 프리스비 원반은 만들어지고, 장난감 피크 시즌에 맞추기 위해 노동자들은 몇 주일을 쉬는 날 없이 하루 10~14시간씩 일한다. 잘 사는 나라의 거대 업체들이 싼 가격에 플라스틱 상품을 계속 공급할 수 있는 것은, 못 사는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이 강요되기 때문이다.

 

4. 링거백 - 현대 의학의 기적과 플라스틱의 역설

 

서양의학에서 의료 행위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링거백(체액의 대용으로 쓰이는 생리적 식염수를 담은 용기)과 혈액백은 원래 유리병 형태였지만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었고, 이의 해결을 위해 '폴리염화비닐(PVC)'이라는 특정한 플라스틱을 이용하게 된다. 그 시작은 미 육군이 한국전쟁 중에 새로운 PVC 혈액백을 사용한 것이었고, 이후 다양한 의료용 액체를 담는 용기와 튜브의 제조에는 유리 대신 PVC가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하지만 폴리염화비닐은 '악마의 수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우리의 건강과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PVC는 분자 구성에 염소가 필수적인 물질인 탓에 제조 과정에서 유독한 염소 기체에 노출될 우려가 있고, 소각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강력한 발암물질 중 하나인 다이옥신이 방출된다. 현대 의학의 기적은 대부분 플라스틱 덕분에 가능했는데, 이를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행위 자체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의료 장비 제조에는 수많은 화학물질이 첨가되고, 우리는 병원에서 수많은 플라스틱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사회가 보여주는 이득과 위험, 바로 그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5. 라이터 -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회성 플라스틱 문화와 자연 환경

 

플라스틱의 시대는 일회성의 시대이기도 하다(오늘날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절반은 '일회용품'에 사용된다). 플라스틱은 사람들이 집에서 만들거나 고칠 수 있는 물질이 아니고, 재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많지 않다. 플라스틱 라이터는 한 번 쓰고 버리는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인데, 다 쓴 이후에는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고 연료 때문에 재활용하기도 힘들다(결국 어쩔 수 없이 잠깐 쓰고 버리는 쓰레기가 된다). 플라스틱 라이터는 전혀 지속 가능하지 않은 목표, '내구적이면서도 버리기 좋은' 물건의 전형이다.

 

가볍고 강한 플라스틱은 자연계에서는 저절로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인류가 이제껏 생산한 모든 플라스틱이 어떤 형태로든 아직도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전 세계 각지의 해변 조사에서 수거된 쓰레기의 내용물을 보면 플라스틱 쓰레기가 일관되게 60~80%를 차지한다. 플라스틱을 삼킨 동물은 지구 전역에서 발견되고, 결국 이들은 먹이사슬의 다음 단계인 우리 인간이 잡아먹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플라스틱 조각들이 전 세계 해변과 대양에 퍼지고 있으며, 이런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언제고 우리 밥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동물 사체 속 플라스틱. ⓒ그린피스, The 5 Gyres Institute]

 

6. 비닐봉지 - 플라스틱 관련 정책과 그 이면의 진실

 

현재 생산되는 총 플라스틱의 3분의 1 가량은 포장재에 사용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비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플라스틱으로 포장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걸 또 비닐봉지에 담아서 운반한다. 워낙 흔해서 우리는 비닐봉지가 제조공학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물건인지 종종 잊지만, 사실 비닐봉지는 방수가 되고 오래가며 깃털처럼 가볍고 자신의 무게보다 수천 배는 더 나가는 것도 거뜬히 담을 수 있는 굉장한 물건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플라스틱과 마찬가지로 비닐봉지의 제조와 폐기가 유발하는 악영향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골칫덩어리다.

 

그래서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하고 종이봉투를 쓰게 하는 법이 지구촌 곳곳에서 시행되었지만, 여러 연구 결과에서 확인해 주고 있듯이 종이봉투는 비닐봉지보다 더 심각한 환경 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벌목, 화학물질을 이용한 펄프화 공정, 강력한 표백, 많은 양의 물 사용 등등). 이는 플라스틱에 관한 잘못된 정치적 논쟁이 얼마나 문제의 핵심을 크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비닐봉지냐 종이봉투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일회용품에 대한 의존성을 줄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저 정치적으로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좀 오래 걸리고 더 복잡하며 다소 힘든 방향이더라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태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을 하는 게 중요하다. 단순히 비닐봉지를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이 물건의 사회적 비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봉지세(plastax)'가 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와 함께 사람들이 일회용품 사용하는 습관을 버리고 '재사용 가능한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니도록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 언제나 다른 그 무엇보다 진실에 바탕을 두고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는 것, 이게 어느 한 인간이나 물건을 악마화하고 혐오를 양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류에 도움이 되는 길 아닐까?

 

7. 페트병 - 플라스틱 재활용을 둘러싼 모순과 선순환의 진정한 의미

 

우리가 플라스틱 재활용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페트(PET,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병은, 실제로는 그다지 많이 재활용되지도 않고 재활용과 관련된 각종 모순이 한데 응축되어 있는 물건이다. 생수병에서부터 각종 음료수와 요리재료 등이 담긴 용기로 어딜 가나 흔하게 페트병을 볼 수 있지만, 매일같이 엄청난 양이 소비되는 이 물건이 과연 제대로 재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른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하여 과학 저널리스트 수전 프라인켈은 수많은 자료와 실증적인 취재를 통해서 제대로 정리해 준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발성에 의존하는 재활용 제도의 결함과 함께, 그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단일 수거 방식(유사한 재활용품들을 일단 하나의 통에 다 넣는다)이 결국 재활용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도 지적한다. 또한 '닫힌 고리 재활용 체계(플라스틱 병은 다시 플라스틱 병으로 만든다는 개념. 물건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자원의 필요량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환경적으로 최선의 방식)'와 '병 보증금 제도'의 도입과 운영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대표적인 생산자 책임 재활용 제도인 유럽의 '그린 도트(Green dot)' 시스템 로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진짜 쓰레기를 줄이려면 애초에 쓰레기가 만들어지는 원천에서 그 발생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재활용의 책임을 소비자에게서 생산자로 옮기는 '생산자 책임 재활용 제도(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EPR)'가 생겼다. 수명이 끝난 제품들을 수거하고 처리하는 비용을 생산자들이 책임지도록 하면, 처음부터 이들은 덜 낭비적인 물건을 만들게 될 것이다. 자사의 제품을 재활용하는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할 경우, 그들은 애초에 재활용이 더 용이하도록 제품을 디자인하고 재활용에 적합한 물질을 원료로 선택하게 된다. 이런 시스템은 자발성에 의존하는 재활용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근본적인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8. 신용카드 - 단순하지 않은 친환경 플라스틱 문제와 근원적 변화

 

거의 모든 신용카드는 '독약 플라스틱'이라고 불리는 '폴리염화비닐(PVC)'로 제작된다. 가공하기 쉽고, 견고함과 유연함이 딱 알맞게 섞여 있으며, 평균 유효기간인 3~5년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내구적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신용카드 광고를 봐서 알겠지만, 이 네모난 플라스틱 카드는 그저 현금 대용이기만 한 게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도구다. 어떤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각종 제휴와 혜택의 종류에 따라 사회적 욕망 더 나아가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한다.

 

요즘처럼 '친환경'이란 말이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는 시대에는 신용카드를 만드는 재료도 친환경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신용카드 사용자들에게 '친환경 카드'라고 광고하며 주목을 끌고, 뭔가 개념 있는 소비자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다. 하지만 친환경 플라스틱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말 그대로 '정말 환경 친화적인가?'라는 기본적인 물음부터, '과연 마케팅의 목적을 제외하면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까지 여러 복잡한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친환경 플라스틱의 가장 대표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재생 가능한 원료' 또는 '천연재료'에 관한 부분도 사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친환경 플라스틱 중에는 식량작물을 활용한 경우도 많은데, 전 세계적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플라스틱을 만들기 위해 식량작물을 재배한다는 건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식량 가격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재배와 광대한 토지 점유, 어마어마한 양의 물과 화학비료 사용, 더 나아가 유전자 조작 이슈까지 더해질 수 있다. 이 외에도 제조단계의 화학첨가물이나 폐기시점의 생분해 정도도 친환경 플라스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정말 해법은 없는 걸까? 수전 프라인켈이 말하듯이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선택하고 꾸준히 노력할 수는 있다. 이는 우리 삶의 터전에서 지속가능성을 차츰 높이는 계속적인 '과정'의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플라스틱과 맺는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고(한 번 쓰고 버리면 곧장 쓰레기가 되는 일회성의 낭비적 플라스틱 감축), 애초에 사람들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도록 관련된 법과 규정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이를 위한 '정치적 실천'도 요구된다).

 

일상생활에서는 물건을 살 때마다 항상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하며, 과다하게 포장된 상품이나 재사용·재활용이 안 되는 제품은 구매를 보류하면 된다(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시장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상당 부분 플라스틱 섬유에 의존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 단기적인 최신 유행을 따라 저가격의 의류를 짧은 주기로 대량 생산하는 SPA 브랜드의 사업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값싼 플라스틱 장난감과 마찬가지로 낮은 원료비용 및 저임금 노동 하에서만 낭비적인 패스트패션은 존재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플라스틱 의류 쓰레기 역시 지구 환경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봐도, 어차피 일반적인 플라스틱은 화석연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하에서만 대량 소비가 가능하다. 화석연료라는 건 어쨌든 유한한 자원이고, 언젠가는 마구 사용할 수 없는 시대가 오기 마련이다(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화석연료의 혜택을 누린 기간은 무척 짧고 아주 예외적인 시기였으며 오직 한 번만 있을 수 있는 특별한 사건). 그래서 전 세계 국가들은 태양열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비율을 어떻게든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최근에는 재생에너지 생산 비용도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결국 장기적으로 화석연료는 꼭 필요한 상황에서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게 될 테고, 이는 플라스틱도 마찬가지다.

 

플라스틱처럼 유용하고 편리한 물질을 우리는 지금까지 마구 낭비해 왔다. 이 책에서 수전 프라인켈이 균형감 있게 지적하듯이, 플라스틱은 낭비되기엔 너무나 가치 있는 물질이다.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은 물질을 재사용하고 재활용했는데(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거의 쓰레기를 만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 플라스틱은 그러지 않는가? 이제 지구 생태계에도 한계가 왔고, 더 이상 '쓰고 버리는 문화'는 유지될 수 없다. 바로 이 순간 플라스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플라스틱 사회]를 읽고, 과연 미래의 플라스틱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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