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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ㅣ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평점 :
나는 몇 해 전 (2023년) 책을 읽으면서 나를 구성하는 레이어가 있다면, 문학적, 생물학적, 사회학적 이 세 종류의 레이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사거리 한 가운데 가만히 서 있다면 왼쪽 골목으로 나 있는 길은 문학적 레이어이고 오른쪽 골목으로 나 있는 길은 생물학적 레이어이고……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층적인 존재이다. 나는 문학적으로도 존재하고, 생물학적으로도 존재하고, 사회학적으로도 존재한다.
그런 생각과 함께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의 다음 대목을 음미해보자. “다양한 의미장이 존재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해석되어야 한다. 문학은 물리학이나 신경 과학 못지 않게 객관적이며, 진리 능력을 가진다. 심지어 물리학이나 신경 과학에 비해 마르셀 프루스트나 이탈로 칼비노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안목을 열어준다.” 어떤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레이어만으로는 어떤 존재를 모두, 정확히 읽어낼 수 없다는 의미다.
세계관, 레이어에 해당하는 개념을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이 책에서 대상영역, 정확히는 <의미장(Sinnfelder)>이라는 단어로 명명한다. 그는 존재 = 의미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의미장 존재론의 공식을 정리했다. 즉 특정한 의미장에서 그 대상이 등장되고 인식되고 소비될 때 그 대상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의미장은 하나가 아니며 (그 때문에 전체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 대상은 다양한 의미장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존재할 수 있다.
자신감 넘치면서도 도전적인 어투, 그러면서도 자신의 사상을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전개한다는 측면에서는 2015년 읽었던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이 떠올랐다. 동시에 어떤 존재를 다양한 의미장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존재는 막연히 상대적인 것만은 아니며 분명히 하나의 사실로서 정립한다는 점에서는, 얼마 전 읽은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과 연계하여 윤리학에 대한 고민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모두가 궁금해하는 이 질문에 대해 1) 구성주의의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즉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 2) 그러나 그 의미는 초월적인, 전체적인 개념으로서 단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무한대로 증식하는 매우 많은 개수의 의미다. 3) 의미가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대상에서 초점을 옮겨 대상이 드러난 대상영역 즉 의미장에 시선을 돌려보자. 이래저래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책인 것만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