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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ㅣ 한길컬처북스 2
이부영 지음 / 한길사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1993년 첫 선을 보인 드라마 <엑스파일(The X-Files)>은 내게 다양하고도 지금까지 이어지는 깊은 흔적을 남긴 유일한 문학 작품이다. 이것을 문학으로 부를 수 있을지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생생한 인물, 단단한 서사, 끊임없는 긴장과 해소는 이것이 단순히 브라운관에서 재생되는 미디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문학 작품으로 만들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인 폭스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루비라는 여자 아이의 실종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멀더는 루비의 흔적을 찾으며 어릴 적 잃어버린 친 동생 사만다를 끊임없이 떠올린다. 결국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멀더는 루비를 찾지 못했다. 동료인 데이나 스컬리(질리안 앤더슨)는 멀더가 최면 상태에서 여동생 납치 당시를 회상한 녹음 테이프를 듣게 된다. 테이프에서 흘러 나오는 멀더의 목소리는 멀더 자신의 것이기도 했고,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멀더의 것이기도 했다. 엑스파일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다.
깨어있지 않은 사람이 깨어있듯이 말하고 감정을 토로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린다. 최면을 통해 엿본 무의식의 세계는 평소 자신이 의식하여 꺼내어 보이지 않은 다양한 인물과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게 되는데,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강렬하고 섬뜩하다. 표면에 드러난 자아를 뒤로 하고 조금씩 나의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여 들어갈 때 처음 만나는 것이 그림자라고 융은 이야기한다. 그림자. 깨어 있는 자아가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은 나의 열등한 인격이다. 자아로부터 배척 당해 무의식에 억압된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고 했다. 누구나 밝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빛이 있으면 반드시 어둠이 있는 법. 누구나 어둡고, 비열하고, 추한 모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며 그런 모습이 내게는 전혀 없다고 감추어버리는 것 역시 사람의 한 단면이라고 했다. 열등한 것들을 애써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을수록 현실 세계에서 그림자를 투사하여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했다.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 선생의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자아’로부터 진정한 자신의 실체인 ‘자기’에 이르기까지 만나야 하는 존재들을 차례 차례 다룬다. 가장 먼저 만나는 그림자, 그 다음에 만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이해하고 나면 비로소 자기에 도달할 수 있다. 올리버 색스의 심리학 책을 읽고 사람의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 3부작을 구입했던 게 6년 전이다. 당시에는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고 싶었나 보다. 시간이 여러 해 지났다. 시간이 여러 해 지났다고 그때에 비해 특별히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다만 몇 년 더 살다 보니 나는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고 세속적이지만 동시에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형이상학적인 성향도 꽤 많았다. 어느 하나로 나를 정의하기 쉽지 않았다. 어떤 사람으로 나를 규정하기에 나는 많은 것들이 적절히 섞여 있는 존재였다.
작가는 그림자를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라고 불렀다. 반려자. 짝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짝이라는 건 무엇일까. 하나가 아닌 하나와 하나가 쌍을 이루어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다. 이 둘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김수영이 하 …… 그림자가 없다, 라고 독백한 것과 달리 사실 그림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림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만 있을 뿐. 그림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거대한 그림자를 딛고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삶이 과연 건강한 걸까. 이부영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자아와 그림자, 밝음과 어둠이 합쳐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나를 찾는 길고 먼 여행의 첫걸음은 아마 내 안의 어두운 그림자에 청하는 최초의 악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닐까 싶다. 육 년을 기다려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 떨리는 마음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