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75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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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生, 저마다의 기억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름을 떠올린 것은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의 대화에서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는 제 나이 답지 않게 꽤 오래된 영화를 좋아했는데 특히 영국 웨일스 출신의 안소니 홉킨스 배우를 흠모했다. 그의 추천으로《양들의 침묵(1991)》,  《가을의 전설(1994)》, 《조블랙의 사랑(1997)》《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2005)》을 보았고 이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아우라에 나 역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가즈오 이시구로 이름이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 즈음인데, 안소니 홉킨스의 《남아있는 나날(1993)》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한 번 보라고.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이나 혹은 보고 나서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함께 읽어 보라고 했다.  영화와 소설을 겹쳐 읽으면 쓸쓸한 정서가 온 몸으로 스며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아직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이었는데, 일본인의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이 영미권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가 추천한 영화 《남아있는 나날》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 하나는 확실히 남았을 무렵. 2017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가즈오 이시구로라고 했다.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로부터 그의 이름과 소설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도 어디선가 밝혔지만 나는 조금 독특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표작은 가장 나중에 읽고 그의 세계관을 형성해가는 주변 작품들부터 읽어야 했다. 그래야 작가의 대표작이 어떻게 견고하고 두터운 문학적 의식의 지층을 딛고 만들어진 것인지,  그런 것들을 조금 더 진실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예를 들어 영국 서머싯 몸 작가의 대표작 《달과 6펜스》를 읽기 전에 《인간의 굴레에서》, 《면도날》 등의 작품을 먼저 읽어보는 식이다. 물론 대표작에 대한 생각과 판단은 저마다 다르므로, 어떤 순서로 작품을 읽어야 할지 정답은 없다.

 

처음으로 접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고 나서, 올 해 봄 읽었던 모옌 작가의 《개구리(2009)》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두 책은 공통된 주제를 놓고 상반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위해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다.”라고 주인공 오노가 회상하는 것처럼, 두 책 모두 믿는 바를 향해 최선을 다해 행동한 개인들에 대해 말한다.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에 적극 협조했던 고모에 대해 다룬 《개구리》와, 일본 제국주의가 확장되어가던 20세기 초 일본 정부를 선전하는데 일조했던 예술인들의 삶을 다룬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적어도 주제 측면에서는 같은 지점을 향해 접근해간다. 이러한 개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주관적인 것이라 믿음은 개인적으로 자유가 허락되어 있고, 스스로 믿는 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삶을 만들어나갔을 뿐이다. 개인의 삶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을 수 없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 《개구리》가 쉴 새 없이 앞으로 전진해 나간다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현재보다 더 많은 과거를 담아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개구리》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같다면,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메멘토(2000)>과 유사한 방식으로 서사를 구조한다. 오노를 둘러싼 사람들. 그의 두 딸들.  사위. 옛 제자. 친구들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오노를 대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제국주의에 호응했던, 그리고 그것을 꽤 자랑스러워 하는 또 다른 오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무엇이 남았을까.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 부역에 대한 기억으로 고뇌하는 예술인의 모습. 아니다.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작가는 기억에 투쟁하는 개인에 대해 계속 그려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끈질기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에 대해 분투해온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단지 좋은 작가가 아니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http://blog.naver.com/marill00/221355987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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