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91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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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의 시어(詩語)

한 동안 문학 예술에 대한 책만 찾아 읽었더니 머리가 지나치게 말랑말랑해진 느낌이 들었다. 단지 느낌뿐이었나. 느낌이 고민으로 바뀐 건 얼마 전의 회사 선배와의 점심식사. 선배는 부동산과 주식에 관심이 많은 위인이었고 우리의 점심은 돈에 대해 이야기로 가득했다. 각자의 부의 증식 수단은 무엇인지, 돈을 얼마 벌었는지, 돈을 벌어서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선배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도 몇 년 후 꼭 강남에 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며 나에게 묻는다. “너는 돈에 대해서는 뭐 관심 없지?” 관심 없긴. 항산(恒産)해야 항심(恒心)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처럼 나 또한 돈에 매우 관심이 많다고 속으로 외쳤다. 외침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돈에 무지하고 관심 없는 서생으로 비추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말랑해진 머리를 딱딱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퇴근 길 교보문고를 찾았다. 이성을 상징하는 과학책을 읽어보자고 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어가 I 과학 코너에 들어가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그려진 책이 한 권 보인다. 올리브 색스의 타계 1주기를 맞아 발간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개정판. 재작년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렇게 사람의 신체가 작을 수 있고, 작은 것 안에 수 많은 물질과 정신이 담겨 있음이 놀라웠다. 아이가 조금 크고 안아서 재울 때 나의 작은 움직임이 아이의 머리에는 큰 충격으로 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 큰 파동이 되어 아주 작은 뇌 손상이 된다면 삶을 관통하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함은 끝없는 두려움을 낳았다. 올리버 색스의 책을 읽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주 작은 뇌 손상이 몸 전체의 기능에 영향을 끼치고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뇌가 건강하거나 혹은 뇌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 인지하고 나를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내가 나이기 위한 경계선이었다

나는 무엇이다 ...... 스스로를 해체하고 고민해서 규정하고. 규정한 나를 입으로 내뱉고 글자로 옮기고 나면 끝나는 걸까. 나라는 사람은 한 번 탄생되어 한 번 규정되고 나면 그 증명의 유효기간은 100년 정도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 번 고민하고 증명하고 나면 계속 고민하고 증명할 것만 늘어난다. 2년 전 잡지를 만들며 나는 글을 쓰고 생각을 건축하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정의했다. 이 다음에는 정해진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산이었다. 수 많은 나의 정체성 중에 글을 쓰고 생각을 건축하는 사람만으로 나를 단정하는 것에 대한 불만. 어떻게 해도 저들처럼 글을 잘 쓰고 정확하게 사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질투. 불만과 질투는 나의 삶을 나아가게 했다가도 다시 되돌려지는 것을 반복하게 했다. 선형이 아니라, 꼬일 대로 꼬인 회귀의 삶이 이어졌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나는 니체처럼 나 자신을 확정하여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끊임없이 불만과 질투 속에 살게 하는 것. 결코 완성될 수 없는 하루 이틀짜리 유효기간의 증명이 계속 이어지는 것. 그런 것이 나와 삶을 더 살아있게 한다. 김이듬 시인의 <말할 수 없는 애인>을 읽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증명을 시도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라는 단어는 어딘가 긍정적이다. 자기 자신을 끝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의 분투가 옳겠다. 시인은 어떤 사람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걸까.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친구로. 아니다.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두 가지. 여성으로서의 김이듬. 시인으로서의 김이듬. 김이듬은 두 가지를 손에 움켜 쥐고 움켜쥔 것을 계속 자기 몸에 밀어 넣는다. 몸은 잠시나마 밀어진 것들을 받아들이지만 유효기간이 끝나면 다시 내뱉는다. 그러면 시인은 또 다시 자신을 더듬고, 더듬은 시어를 몸 속에 밀어 넣는다. 끝없이 반복되는 치열한 분투. 어차피 녹아 없어질 운명을 알고도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처럼.


눈을 감고 눈을 상상해
폭설이 난무하는 언덕에 서 있어
두 팔을 벌려야 해
입을 쫙 벌린 채 눈덩이를 받아먹어
함박눈은 솜사탕만 할 거야
네게 한 번이라도 함박눈이 되었으면 좋겠어
눈발이 거세지고 조금씩 나는 파묻혀가고 있어
난 하얀 구릉이 되어 솜사탕처럼 녹아가네 

눈은 죽은 비라고 루쉰이 그랬나

네 얼굴에 내가 내리면
코가 찡하겠니?
나를 연신 핥으며 달콤해 아 달콤해 속살일 거니?
나를 베개 하고 나를 안겠지
우린 잠시 젖은 후 흘러갈 거야
너무 싱거운 거 같아 망설인다면
삽으로 떠서 길가로 던지겠지

- 김이듬 시인의 <함박눈>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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