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의무를 묻는다 - 살아가면서 읽는 사회 교과서
이한 지음 / 뜨인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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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무를 묻는다. 제목이 참 당차다. 사실 김해에서 열리는 제3회 전국 인문학 읽기 전국대회 지정도서 중 하나다. 그렇지만, 역시 4권 중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이기도 했다. 나머지 책들이 플라톤의 국가를 풀어쓴 것(플라톤의 국가,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다), 철학을 다룬 것(철학, 삶을 만나다), 역사와 철학을 결부시킨 것(시비를 던지다)이라서, 좀 딱딱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어, 그러고 보니 이번 대회 책 제목들은 하나같이 동사로 끝나네?). 물론 결정적으로는 동아리에서 무작위 지정을 하는 가운데 지정을 받았다. 내가 기장이긴 하지만,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도는 부기장을 하고 있는 친구가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책은 상당히 얇고, 술술 읽히는 편이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가볍지는 않다보니 생각보다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읽는 사회교과서> 시리즈 중 하나로, 전작인 전대원 선생님 저의 <나의 권리를 말한다>를 잇는 책이다.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역시 따로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다.

솔직히 다 읽고 난 후기를 말하자면 조금 묘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 이상으로 조금 두루뭉술하게 표현된 부분도 있다. 의무를 묻는다고는 하는데, 의무라고 해놓고 딱 떨어지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점이 조금은 아쉽다. 또 구성방식의 차이라고나 할까, 사례를 중심으로 해서 주제별로 책을 엮어갔던 <나의 권리를 말한다>와 달리 <너의 의무를 묻는다>에서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물론 이 역시 ‘주제별로 엮었다’라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없다. 나아가 어떤 것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딱 떨어지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나의 권리를 말한다>에 비해 흡인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분명히 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아무래도 대회 출전 도서다보니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정직한 독서’ 그리고 ‘정독’을 기반으로 한 열린 토론, 이 김해의 인문학 읽기 대회 취지이기도 해서, 그 취지에 맞게 여러번 자세히 정확하게 읽는 것에 초점을 맞출까 한다. 사실 이 대회를 참가하면서 정독과 속독, 다독과 재독이라는 오래된 고민에 다시 빠져들었다. 사실 국어사전의 서술도 그렇고, 속독과 다독에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 문명화된 시대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부실한 독서라는 이야기다. 나도 일면 동의하기는 하지만, 역시 그러한 내용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과정에서, 물론 이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읽기 시작한 책은 아니었지만, 유시민씨의 <청춘의 독서>와 김상욱씨의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를 보면서 조금은 답을 찾기도 했다. 아차, 이 글의 주제는 재독과 정독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할 기회가 있으리라.

이 책은 의무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한 일반론적인 접근이 꽤 많다. 물론 그것은 모두 의무와 결부되어 설명된다. 정확히는 1장에서는 의무의 정의, 2장에서는 의무를 지켜야하는 이유 중 하나로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대하라’, 3장에서는 의무와 권리의 관계, 4장에서는 정치(참정의 의무라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5장에서는 사회의 정의로움, 그리고 시민 불복종, 6장에서는 공동체로서의 의무, 7장은 의무를 지켜야하는 이유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 생각보다 당연한 이야기들처럼 보인다. 내가 가장 포인트를 잡았던 것은 ‘시민 불복종’에 관한 부분.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 정의롭지 않을 때, 이를 의도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악법도 법이다’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민주사회의 제대로 된 시민은 악법에 불복종할 의무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오호라, 국가의 입장에서 상당히 싫어할 만한 이야기다. 우리나라도 수많은 악법이 존재해왔던 국가인 만큼,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썩 좋아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법치주의를 확대 해석하여 ‘법이 곧 사회의 질서’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 불복종의 의무는 과연 우리가 어떤 자세로 민주 사회를 살아가야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일깨운다. 불완전한 사회에서 우리는 법을 따를 의무가 있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불완전한 사회를 ‘완전히 정의롭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그 사이의 사회’로 정의하고 나서 이렇게 답한다.

“……실마리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법의 절차나 내용이 사람을 불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그 부담이나 이득이 불공정하게 돌아간다는 점이 분명하다면, 이때 법은 불복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시민 불복종의 요건으로 첫째, 단순한 이익의 문제가 아닌 부당한 일에 대해서만 그 정당성이 성립된다. 둘째, 공개성을 가져야한다. 셋째,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성실한 호소가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가능한 합법적 수단이 사용된 뒤에 최후의 방법으로서 사용되는 수단이어야한다. 라는 내용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법을 어떤 때 지켜야하고, 어떤 때 불복종해야하는 것인가. ‘법은 법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저자는 법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강조한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고려했을 때는 힘을 가진 자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를 기준으로 판단하였을 때는 다릅니다. 어떤 준칙에 힘이 부여되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그것을 따라야 할 근본적 이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으로 ‘법’을 인정하는 것은 법이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생각도 비슷하다. 법이 법이라서 정당성을 가진다면,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끌고 가는 존재가 된다. 사회가 법에 질질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다. 법은 성전이 아니다. ‘진리를 담기 위해’ 싸워온 흔적이고, 그 결과물이지만, 완전한 진리를 담고 있을 수는 없다. 이는 법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다. 오히려 법은 ‘도구’고 인간은 ‘목적’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는 법이 절대성을 지닐 수 없는 이유임과 동시에 법에 불복종할 분명한 권리와 의무의 근거다.

다만 저자의 의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시민 불복종에 따른 범법자를 처벌하지 않거나 처벌을 가볍게 해야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조금 위험한 생각이지 싶다.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다면 ‘시민불복종의 범위’를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시에 처벌되지 않는 시민 불복종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되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민불복종이 반드시 정당하다고 정의될 수 없고, 불복종이 정당한지 판단에 걸리는 시간 역시 현실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책이 말하는 ‘의무’의 밑바탕은 바로 이 질문으로 만들어져있다. 고3 학생이 고민하기엔 꽤 무거운 주제다. 답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고등학교까지의 제도권 교육으론 답을 내기가 어렵다. 아니, 학부과정을 밟더라도 어려울지 모른다. 어쩌면 대학을 졸업하고, 내 계획대로 대학원을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게 될지라도, 그 답을 명쾌하게 구해낼 수 없을 수도 있다. 구해내더라도, 그 답대로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주변 분위기 때문인 영향이 있겠지만, 내가 가진 사상은 비급진적인 진보주의다. 내가 중도라는 말을 상당히 좋아하지만, 역시 중도 진보라는 ‘어정쩡한’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아 선뜻 중도 진보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러나, 역시 살아가면서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은, 내가 진보주의자인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은 학생답게(?) 진보적인 경향이 강한데, 실제로 생활은 보수적인 모습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커서 어떻게 될지에 대한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급히 읽느라, 꼼꼼히 읽지 못한게 아쉽다. 재독할 기회가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재독해보면서 다시 찾아봐야겠다. 과연 그가 생각하는 의무란 무엇인지,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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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i강의교재 윤혜정의 언어영역 개념의 나비효과 강의노트 - 2011
윤혜정 지음 / 한국교육방송공사(EBSi)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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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가볍게 정리할 땐 좋습니다. 강의 없이 학교 부교재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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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정석 - 일반인을 위한
배상복 지음 / 경향미디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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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한권의 '정석'이다. 굉장히 실용성 위주로 구성되어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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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b 핵심기출 450제 고3 수리(나)형 (8절) - 2011
이지수능교육원 편집부 엮음 / 이지수능교육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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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고사에 맞춰서 미분, 적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참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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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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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났다. 스륵 스륵 넘어가는 책을 원했다. 친구가 읽고 있었던 책, <완득이>는 그런 조건에 딱 맞는, 더할나위없이좋은 책이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큰 울림은 없지만, 그만큼 가볍게 읽기 좋은 책. 물론 부쩍 많아진 판타지나 무협 소설처럼 흘러가듯이 읽는 인스턴트적인 경향이 강한 소설은 아니다. 뭐라고 해야할지, 어휘선택은 좀 어렵지만, 아마도 울림을, 또는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책이 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물론 생각보다 아프게 찔러오는 주제들이 있다. 청소년 문학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는, 성장과 결합된, 시사고발적인 경향이다. 청소년문학의 특성상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저자의 의도가 깔아져있으리라. 그런데 저자는 그곳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크게 보자면 결국 그러한 이야기도 이 사건의 흐름이다. 사회고발적인 성향을 성장으로 잘 덮어냈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넘치지 않는다. 성장소설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딱 채워넣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나는 가장 큰 이유는 웃음을 자아내는 문체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성은 이 소설을 일반화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문화가정, 장애를 가진 아버지, 삐딱한 주인공까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청소년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완득이'라는 캐릭터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오히려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학업에만 열중하는 학생들은 학교라는 체제에 반대하기를 포기한 것이 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무엇이건 노력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돌을 던질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완득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가 많은 학생들이 가슴속에 조금씩 가지고 있을 반항심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캐릭터는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캐릭터야말로 인기있는 소설의 조건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주인공인 '나(완득이)'도, 그의 여자친구인 '정윤하'도, 담임 '똥주'도, 심지어 '또라이'라고 언급되는 '혁주'까지도. 그리고 완득이의 삐뚤어진 성격 형성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물론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누구보다 완득이고, 그 다음으로 똥주다. 따뜻하지만, 따뜻함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랄까. 특히 완득이는 얼핏 불량소년 또는 아웃사이더와 같은 학생으로 이해되기 쉬운데, 그보다는 세상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방관 또는 관조를 택했을 뿐인 소년인 것이다.

그러한 캐릭터 속에 서있다 보면, 이러한 학교 생활을 해나가는 주인공이 부러울 정도다. 학업, 이라는 틀에서만 빠져나온다면 우리 인생은 어찌나 재미있던지. 그건 우리 모두가 동감하는 내용이 아닐까? 공부해야해, 라는 상황만 아니라면 누구나 학창시절이 가장 좋은 때라는 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에서 공부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학교는 그 어디보다 재밌는 놀이터가 될 수 있다. 물론, 과연 옥죄어오는 규제가 있을 때 그것을 피해서 즐기는 그 느낌을 살려낼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지만. 물론 그러한 의미에서 완득이가 학교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득이는 즐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청소년문학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욕설이 난무하는 책이다. 그 흔한 *표 처리도 안했다. 그냥 그대로,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별로 기분 나쁘지 않다. 잘 녹아들어있다. 그런 표햔들이 오히려 정감이 간다. 욕설을 의도적으로 배치할 경우 생동감이니 뭐니 여러가지를 얻을 수 있어 문학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라는 정형화된 설명은 뒤따를 필요도 없다. 그냥, 욕설이 아니면 어색하다. 욕설이기 때문에 나오는 그 느낌, 그 분위기, 어쩌면 '완득이'의 또다른 매력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완득이가 킥복싱을 시작한다거나, 그렇게 티격태격한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한쪽이 잘 해주면 한쪽이 차갑게 대하는 관계를 유지하다 이어지는 것,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는 것... 그 모두가 완득이의 성장의 과정이다. 완득이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왕따가 되어버린 정윤하 역시 완득이를 따라 성장하고, 마음을 열게되는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말은 조금 허망하다. 왜 갑자기 저렇게 끝? 이라는 생각도... 정윤하와 완득이가 순탄하게 잘 이어졌다는 점은 참 흐뭇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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