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쓰던 네이버 블로그나 최근 들어 둥지를 튼 야후 블로그하고 알라딘 서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무래도 책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첫번째 리스트는 다행히? 구매리스트가 있었다. 이게 없었더라면 난 아마 책을 중복해서 사면서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 리스트가 서재를 꾸미는 데 기초공사를 해주었다. 두번째 작업은 교보에 있는 구매리스트를 어떻게 옮겨올 것인가 하는 것과, 내가 산 책 또는 이미 가지고 있는 책과 아직 가지지 못했거나 읽지 못한 책을 리스트로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거다.
리스트 만들 때 나나름으로 범주란 걸 만들었는데 흡사 보르헤스가 읽었던 중국사람 사전 같은 리스트지만, 어쨌든 지금 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내겐 편리한 리스트. 그러나 요즘처럼 기억력이 꽝인 상태가 앞으로는 점점 심해질 것이 틀림없는 터에, 읽고 싶은 책과 이미 만들어놓은 범주들이 겹치는 부분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가 문제다.
(발견했다. 코멘트 다는 란이 있더라. 아직 안 산 책 또는 안 읽었음 하고 표기해놓으면 되겠구나^^)
아침부터 책과 서재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내가 지난 삼십년동안 살았던 세계는 마지막 5년간을 제외하고는 책과 저자들 사이에서 헤엄치기였구나 하는 새삼스런 느낌이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건데, 시인이란, 자기 시의 생산자이자 남의 시의 독자이며, 시인들의 세계에 시인이 아닌 독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비평가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엄밀히 말해 시를 읽지 않는다. 이명원의 말처럼 시라는 도구를 통해 자기자신을 은폐하면서 드러내려는 또 다른 종류의 글쟁이들일 뿐. 시를 읽는 것, 남의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쓰는 사람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쓰기라는 배고픈 일이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을 지배할 것이라는 막막한 예감에 눈물났던 적이 있다.
배고픔. 난 한때, 정신의 곤궁과 영혼의 궁핍을 육체적 고통으로 착각한 일이 있다. 그래서 살이 쪘다. 아니다. 육체적 고통에 몰두하면 정신이나 영혼의 문제는 덜 중요하게 여길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착각은 적어도 80% 정도는 유용하다. 몸이 아프거나 몸을 혹사하면 정신을 사용할 기회가 즐어든다. 일단 절대시간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 자신에게서 내면이 요구하는 허기와 갈증을 외화시킬 기회를 거듭 빼앗는다 해서 그 배고픔이 사라지나?
옆으로 살짝 샌다. 서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도서관을 헤엄치는 착한 물고기가 된 느낌이다. 이게 한때 나의 꿈이었지. 책을 좋아하는 친구 두어 명과 창이 큰 방에 둥글고 큰 탁자에 둘러앉아 같은 책을 읽으며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에 커피향 속에 앉아 조는 꿈.
평생 졸면서 살아놓고서 또 조는 것이 꿈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