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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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린. "그 밤 처음으로 진정한 나 자신을 보았다. 한창 변화하는 삶의 진통을 겪고 있는 작은 인간. 내 평생의 예금, 그리고 총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 제대로 된 등산을 했던 경험이 문득 떠오릅니다. 단풍구경이라 했는데, 올라가는 동안은 단풍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더군요. 정상에 올라가서야 아래를 내려다보며 알록달록한 나무들을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었어요. 내 몸이 불편하면 아름다운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다는 걸 알았던, 그래서 즐겁게 살려면 체력이 있어야한다는 결론을 냈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여기 한 여자가 있어요. 그녀는 계속, 어딘가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전쟁터를 지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지난한 삶을 사는 중이에요. 헉헉대는 숨과, 다리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 대신, 최대 한계까지 지저분한 몸과 집, 그리고 꾹꾹 눌러 담은 분노에 눈이 가려져서, 주변은 보이지 않아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인정받아본 적 없고, 친구도 없으며, 비뚤어진 자기애와 공중에 뜬 자존감이 그녀를 구성하고 있어요. 스물네 살이나 되었지만, 그녀 안의 어린아이는 그대로 그녀를 비춥니다. 제대로 돌보지 않은 인격은,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그녀는 자기 세계 안에서 살아요. 살아남기 급급해요. 겉보기 평온한 그녀. 불만없이 환경에 순응하는 듯한 그녀. 하지만 곧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기말적 풍경이 그녀 안에서 휘몰아칩니다.

 


  소설의 절반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그녀는, 그녀가 일하는 교도소에 새로 부임한 아름답고 능력있는 교육국장 리베카를 만나 '전환'을 맞습니다. 사랑, 혹은 경애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을 처음 만나, 알에서 깨어 처음 눈맞춘 동물을 엄마로 여기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매달리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죠. 대체로 짐작하시겠지만, 리베카는 그녀가 꿈꾸는 대로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의 표상일 뿐. 사실 저는 읽으며 리베카를 만난 게 사실 아일린의 상상입니다, 라는 결말이어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리베카는 전형적으로 이상적이며, 이상을 가진 금발머리 미인이거든요. 전형적이라 비현실적이었고,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아일린 빼고 다른 이들은 모두 부조리 영화 혹은 세기말 청춘 성장물 영화에서 따온 듯한 대화와, 태도를 지니고 있어요. 오히려 괴상한 상상 속에서, 과도한 자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 아일린이 가장 현실에 발디딘 캐릭터같았어요. 때로 그녀마저도 영화의 한 캐릭터같기는 했죠. 이 소설이 여든이 넘은 아일린 본인이,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며 서술한 형식이라서, 과거의 자신을 마치 영화처럼 기억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위기-절정 상황을 지나, 마지막 장면에서 넘치는 생명력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그 텁텁한 현실과, 단단한 자의식 껍질을 순간 잊고 넘치는 생명력을 마주해요. 감동받죠.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껴요. 정신을 압박하던,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의 부침이 일소 해소된 그 순간 마주한 생명력은, 그녀를 비로소 현실에 데려다놓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신성하기까지 하다는 것..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벗어나고 나서야, 그 신성함을 알아봅니다. 이 깨달음은, 희망일까요?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름다움과 전율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 전율은 금세 사라집니다. 덮는 순간,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같은 서술이 묵직하게 남기 때문이에요. 책장을 덮으면, 그녀는 결국 그 순간의 깨달음과 환희를 마음 어딘가 간직한 채, 그저 살아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증거는 그녀의 삶을 서술한 그 일주일을 기억하는 그녀의 시각 전체에요. 그곳에 있는 것보다는 잘 살아냈겠지만, 그녀는, 그녀 삶 자체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반전입니다.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깨달음의 환희는 늘 우리를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그저.. 그녀일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기나긴 조소. 아일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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