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82)

보관함에 자꾸 쌓이는 책들을 좀 털어내보려고 한다(머릿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이 벌레들!). 이번에 다룰 책들을 뭉뚱그리자면, "곤충들의 도서관에서 세계의 명작들을 읽으며 내면의 침묵에 빠져들다가 끝내 국경을 넘어 중세로 달아나버린 한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되겠다(이 이야기에 캐스팅되지 않은 책들은 또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럼, 먼저 '전략의 귀재들, 곤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제일 먼저 꼽을 책은 토마스 아이스너의 <전략의 귀재들, 곤충>(삼인, 2006). 원제는 'For Love of Insects'(하버드대출판부, 2005)이고 원서의 표지는 국역본의 표지와 같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파리 종류인 거 같다. 국역본의 제목은 다소 튀는데, 같은 제목이더라도 '곤충, 전략의 귀재들'이라고 배치하는 게 보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아이스너 교수는 코넬대학의 석좌교수인데, 동물행동학과 생태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아주 작고 놀라운 곤충의 세계. 반세기 동안 우루과이, 호주, 파나마, 유럽, 북아메리카 대륙을 넘나들며 관찰하고 실험하여 발견한 곤충들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고. 특히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곤충들의 생존 전략, 진화에 승리한 비밀을 해독해내는 과정과 연구 순간순간을 포착한 원색 사진들이 돋보인다"고 한다.

568쪽 분량에 책값도 5만원에 육박하지만, 사실 이 정도 설명뿐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한데, 역시나 세계적인 개미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이 책은 프랑스의 위대한 곤충학자 파브르를 계승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유능하고 열정적이며,박학다식하고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가 반세기 넘는 시간을 곤충에 투자한 노력의 산물이다"라는 최상급의 추천사를 쓰고 있지 않은가? 흔한 말로 '강추'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더 눈길을 주는 수밖에(참고로, <파브르 곤충기>는 아직도 완역되지 않은 듯하다. 분량이 방대하긴 하지만).

거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의 정복자 - 곤충>(다른세상, 2005)의 저자 메이 베렌바움이 거들기를 "곤충학의 세계에도 초인적인 영웅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토머스 아이스너일 것이다. 톰은 화려한 업적을 쌓아오면서 곤충이 화려한 색상이나 기이한 돌기, 아주 고약한 분비물을 지닌 이유를 수도 없이 밝혀냄으로써,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과학자들의 기를 꺾어왔다. 이 책에서 그는 재치 넘치는 문체와 입이 떡 벌어지게 멋진 사진들을 통해 흥미진진한 과학의 세계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곤충과 그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정도 밀어주는 분위기라면 소장용 도서로 꽂아두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원색 사진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니까 초등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도 유용할 듯싶다. 어른이야 곤충을 '사랑할'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두번째 책은 책벌레들의 전당, 도서관에 관한 것이다. 로널드 맥케이브의 <도서관, 세상을 바꾸는 힘>(이채, 2006)이 그것인데, 딱히 이 책에 주목해서라기보다는 그간에 도서관을 표제나 주제로 해서 나온 책들을 이 참에 호명해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령, 얼마전에 출간된 최정태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2006)이 소장가치로는 더 앞선다. 도서관의 역사를 다룬 책들도 있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미궁 같은 도서관의 모델의 되었다고 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관한 책도 눈길을 주어볼 만한 책이다.

원제가 'Civic Librarianship: Renewing the Social Mission of the Public Library'(2001)인 신간은 '도서관과 사서의 위기 극복을 위한 철학적 고민'이란 부제를 갖고 있으며, "책은 미국 공공도서관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펼치며 도서관 사서들이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커뮤니티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시민사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미국 공공도서관 역사를 짚어가며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의 새로운 공공도서관의 청사진을 이야기한다"는데, 순전히 미국적 상황과 처지에 관한 내용일 듯하지만 '기적의 도서관' 건립운동 등에서 촉발된 도서관에 대한 관심과 여론을 보다 체계화/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 보인다.

아마도 도서관 사서들의 연수교재용으로 딱 알맞아 보이는데, 이 '공적인 책'에 따분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들의 풍광을 잠시 훔쳐보아도 좋겠다(저자는 러시아 도서관들을 훑어볼 포부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공부가 절로 될 만하지 않는지?.. 

 

 

 

 

그럼, 우리의 아름다운 (가상의) 도서관에서 무슨 책들을 읽어야 할까? 최근에 나온 따끈따근한 고전 명작들은 어떻겠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학사에서나 자주 접하던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1811-1972)의 <모팽양>(열림원, 2006)이다. <미라 이야기>(열림원, 2006) 같은 청소년물이 지난 7월에 출간되기도 했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 고티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다(이런 유미주의 작가로 가장 유명한 이로는 영국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있다).

작가 고티에가 고작 24살 때 발표한 작품이라는 <모팽양>은 "관습적인 성역할을 넘나드는 여주인공을 통해, 사회적 성정체성인 젠더(gender)를 치열하게 성찰한 작품"으로 "주인공 '모팽 양'의 실제 모델은 17세기의 남장 여가수이자, 후에 모팽 부인이 되는 '마들렌 도비니 양'이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존심이 높았고, 기사복을 입고 다녔으며, 결투를 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봤을 때도 다소 '전복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듯한데, "이 작품은 1835년 출간되어 발자크, 위고의 극찬을 받았고, 당시의 프랑스의 고전비평과 부르주아 신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특히 동시대 공리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아름다움의 무용성을 극단적으로 주창한 서문은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니 작가의 나이는 잠시 잊어주는 게 좋겠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버티고, 2006)도 최근에 나온 작품이다. 한데 엄밀히 말하면 이미 출간됐던 작품이다. 지난 1990년에 나온 중앙일보사의 소련동구문학전집 중 한권으로 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함께 묶여 있었던 것이다. 중앙일보사판은 역자가 이윤기씨로 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국내 최초의 체코어 완역본"이라는 건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흐라발은 쿤데라와 함께 체코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하다. 안면이 좀 있었던 체코출신의 한국 유학생은 대단한 작가라고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적이 있었다.

그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1965년 작인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체코를 배경으로, 독일에 점령당한 체코인들의 삶을 그렸다. 냉혹한 현실에 우스꽝스러운 등장인물들을 배치,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든다. 수습 역무원 흐르마는 소심한 성격의 스물두 살 청년. 여자친구와의 첫 경험에 실패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벽돌공의 도움으로 살아나 3개월 만에 근무에 복귀한다. 하지만 독일군에 점령당한 기차역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신호를 잘못 보냈다고 총살당할 뻔하고, 화물차량 가득 실려 오는 아사 직전의 불쌍한 가축들을 보아야 한다..."

해서, "파시즘에 저항하는 영웅적인 이야기이지만, 진한 휴머니즘도 내재되어 있다. 체코에서 영화화되어 196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으며(*영화의 스틸 사진들은 보시는 바와 같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소련, 동구 현대 문학전집'에 이윤기 씨의 영어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다(*여기 내용이 다 나오는군). 함께 실린 단편 '간이주점'은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 날, 결혼 피로연이 열리는 왁자지껄한 간이주점에서 목을 매고 죽은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곧 분량도 많지 않으므로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에 유쾌하게 다 읽을 만한 소설이겠다.

그리고, 또 우리에겐 <주홍글씨>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손(1804-1864)의 장편소설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문학과지성사, 2006). "사회주의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모인 남녀들의 다층적인 연애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 "1852년 발표되어 '호손의 형식 미학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번에 국내에 초역된 작품이라고.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 부근, 일군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고 '블라이드데일'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행복의 골짜기라는 뜻처럼, 처음 이 공동체 생활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고무적으로 펼쳐진다." 호손의 지명도를 고려하면 한번쯤 읽어둘 만한 작품이겠다.

 

 

 

 

네번째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내면의 침묵>(열화당, 2006)이다. 이번에 그의 에세이집 <영혼의 시선>(열화당, 2006)이 같이 출간됐다. 지난 여름에 출간된 평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유문화사, 2006)까지 갖춰놓으면, 게다가 좀 무리해서 사진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그는 누구인가>(까치글방, 2003)까지 마련해놓으면 국내 출간된 '브레송 컬렉션'은 일단 완벽하다 하겠다.

<내면의 침묵>이 먼저 눈에 띈 건 사실 표지로 쓰인 사뮤엘 베케트의 초상 때문이다. 말년의 베케트를 역시나 대가다운 솜씨로 포착하고 있는 사진이다. 혹은 아래와 같은 사진의 베케트.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다시 상기해보자면 올해는 베케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내에서는 이렇다할 기념 출판이 없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베케트를 표지로 한 브레송의 사진집이 그 아쉬움을 얼마간 달래준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그의 드라마 한두 편을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 한국어 베케트의 목록을 뒤적거려보지만 빈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기 이전에 베케트를 먼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책벌레가 어느덧 국경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다섯번째 책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 몇년전에 <국민이라는 괴물>(소명출판, 2002)로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저자는 근대 국민국가의 비판과 극복에 학문적 화두를 두고 있는 듯하다. '문화, 문명, 국민국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부제로 갖고 있는 이번 책에서도 "문명과 문화가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통합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들이 얽매인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예리하게 파헤친다"고 한다. 

요컨대, "문명과 문화라는 말은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며, 뛰어난 근대적 이데올로기임을 밝힌다. 따라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을 둘러싼 역사 또는 국민국가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문명, 문화라는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마저도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한다"는 걸 지적하는바, "책은 문화를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사문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문화의 대안을 모색한다."

이에 대한 임지현 교수의 추천사는 이렇다: "'서양'에게는 '동양'이자 '동양'에게는 '서양'인 일본, 오리엔트화되는 오리엔트이자 오리엔트화하는 오르엔트인 일본에 대한 니시카와 나가오의 날카로운 성찰은 비교문화 연구의 진경을 보여준다. 비교문화의 단단한 이론 틀 속에서 '일본적인 것' 혹은 '일본 고유 문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문화적 본질주의를 해체하는 그의 차가운 시선은, 좌우를 막론하고 '국민문화'의 회로 판에 갇혀 있는 일본 지식사회에 대한 엄정한 자기비판이다."(강조는 나의 것)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자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중요한 이론전 전거로서 참조한다. '오리엔탈리즘'을 주제로 한 국내서/번역서 몇 권을 같이 꼽아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은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의 표지로 쓰인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보통 다섯권의 책을 꼽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번엔 서양 중세사의 거장 조르주 뒤비의 책을 보너스로 더 집어넣는다.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생각의나무, 2006) 가 그것인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프랑스 아날학파의 거장 조르주 뒤비가 쓰고 백과사전의 명가 라루스 출판사가 출간한 책으로 그림과 지도로 보는 대 세계사 연감이다. 인간 역사의 파노라마를 520개의 사건으로 분류하여 편집 기술이 집약된 지도 위에 그 전개 상황과 개요를 새겨 넣어 역사 기술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책값이 12만원에 이르는 만큼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줌에 틀림없다! 아, 세계는 넓고 서민-책벌레로선 이 책값들을 벌기가 참으로 어렵도다!..

06. 0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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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프랑수아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두툼한 평전이 출간되어 살짝 흥분시키는 가운데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까지 열린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이라면 '신경안정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제를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고 뒤이어 평전에 관한 정보들을 이어붙이도록 하겠다.  

국민일보(06. 06. 28)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프랑스문화원과 동숭아트센터가 ‘시네 프랑스’ 네번째 시리즈로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연다. 다음달 4일∼8월29일 매주 화요일 저녁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트뤼포 감독의 대표작 9편을 만날 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세계적인 거장이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란 뜻으로 전형적인 영화 문법에서 탈피해 줄거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는 ‘작가주의 영화’를 주창했던 흐름이다. 누벨바그 이후 영화의 개념이 바뀔 정도로 세계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트뤼포는 1940년대 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에서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등 영화 동지들을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아래 사진에서 앞줄 왼쪽이 트뤼포. 맨뒷줄에는 안경을 쓰고 있는 고다르와 샤브롤의 모습이 보인다.) 



-1954년 영화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에 발표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ema Francais)’은 프랑스 전역에 누벨바그를 불러 일으키는 토대가 됐다. 이 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영화를 독창성이 결여된 미적 침체상태로 보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가치기준을 마련했다. ‘작가주의 영화’의 탄생에 이론적 뒷받침이 됐다는 점에서도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

-트뤼포는 1959년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로 장편영화에 데뷔했다. 장인이자 영화제작자였던 이냐스 모르겐스턴이 “그렇게 잘났으면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하자 직접 영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트뤼포는 이 영화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 역시 예술적으로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세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트뤼포는 이후 <400번의 구타>의 주인공 ‘앙트완 두아넬’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연작 시리즈 <앙트완과 콜레트> <훔친 키스> <부부의 거처>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20여년간 열정적인 영화작업을 계속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의 대표작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이웃집 여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 외에도 <마지막 지하철> <부부의 거처> <두 영국 여인과 대륙> 등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선보인다(*대표작 중 하나인 <쥘과 짐>이 빠진 것이 특이하다. 다들 봤을 만한 영화라서인가?). 



<상영작 목록>
- 7월4일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1977)’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11일 ‘400번의 구타(1954)’ / 전체 관람가
- 7월18일 ‘이웃집 여인(1981)’ / 15세 이상 관람가
- 7월25일 ‘마지막 지하철(198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일 ‘훔친 키스(1968)’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8일 ‘부부의 거처(197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15일 ‘두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1971)’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2일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 15세 이상 관람가
- 8월29일 ‘사랑의 도피(1978)’ / 15세 이상 관람가

그리고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10번째 책으로 출간된, 세르주 투비아나, 앙트완 드 베크의 평전 <트뤼포>(을유문화사, 2006). 원저는 1996년에 출간된 'Francois Truffaut'(갈리마르, 1996)이다. 번역본의 분량이 796쪽이니까 현재로선 결정판이 아닐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트뤼포는 생전에 여러 차례 자서전을 기획했으나, 본격적인 자서전 집필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그가 수집해 둔 자료만 보존되어 있는 상황이다.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은 52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52편의 작품, 동료들의 증언과 트뤼포의 일기, 메모,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사적 자료를 토대로, 트뤼포의 후배 영화인들이 집필한 책이다."

"부모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비행 소년으로 낙인찍혀 불행한 성장기를 보냈던 트뤼포는 단절된 외부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위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수백 편의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예술가들의 오만함에 조소를 보냈으며, '400번의 구타', '훔친 키스', '쥘과 짐', '아메리카의 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같이 '나'에 대한 영화, '삶을 찍는' 영화를 만들며 세계영화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하면, 이 전기는 그의 '입지전'이기도 하겠다.

 

 

 


"상처를 남긴 성장 과정, 히치콕, 혹스, 르누아르 같은 거장들에 대한 숭배와 교류, 영화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연출의 비밀들, 시네필들의 우정, 연애와 불륜,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의 방황을 비롯하여, 트뤼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회의 지적인 분위기, 누벨바그 세대의 형성 발전 과정, 1968년 5월의 칸영화제 풍경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풍부한 사진과 트뤼포의 모든 영화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필모그래피가 함께 실려 있다."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시네필 평론가 정성일은 "이 책만은 정말 번역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다. 왜냐하면 매일 밤 나만 몰래 침을 발라가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트뤼포에 대한 사랑을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추천의 글에 적었는데, 그의 기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로선 유감스럽겠지만, 애호가 수준의 독자들에겐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도 몰래 침을 발라가며 얼른 읽어보도록 하자...

06. 06. 28.

P.S.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관련칼럼을 보충하는 의미로 옮겨온다. 내가 가보지 못한 트뤼포 영화제의 후일담도 곁들이고 있어서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6. 07. 21) 트뤼포, 영화광의 초상

-7월 4일 오후 7시 대학로의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영화제의 개막행사가 열렸다. 8월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상영될 9편의 트뤼포 영화 가운데 첫 번째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가 상영됐다. 이 개막행사는 최근 출간된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앙트안 드 바에크, 세르주 투비아나 공저,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것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역자 한상준 씨가 스크린 앞에 나섰다. 인사말 대신 그는 모 월간 음악잡지 기자로 일했던 1984년 당시 트뤼포의 부음 소식을 듣고 썼던 편집후기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한 젊은 영화광이 선배 영화광의 삶과 죽음에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 성격을 띤 그 글의 마지막은 트뤼포의 죽음과 더불어 영화광의 청춘기도 흔적 없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이 모두 한상준 씨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존경하는 감독의 평전 번역을 손수 맡은 외국의 영화광이 보여준 헌정의 표시로는 최상의 것이었음을 누구나 인정했을 것이다.

 

 

 

 

-한상준 씨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저널리즘과 학계,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꾸준히 활동했으며 우리끼리 영화 내공을 따지면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인물이다. 그는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을 번역하기 위해 프랑스판과 영어판, 일어판을 두루 참고했는데 역자의 완벽주의는 출판사 측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번역된 책은 8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세부적인 구성과 묘사력 면에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트뤼포의 삶은 영화에 비해 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훨씬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는 감옥 같은 학교와 학교 같은 집을 왕래하며 부모의 정을 거의 받지 못한 성장기를 보냈고 결핍된 애정을 스크린에 투사해 거기에 자기 삶을 바쳤다. 그의 구원은 오로지 영화에만 있었다. 그는 인생보다 영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과 영화를 비평하는 일과 영화인에 관해 말하는 일에 자기 삶의 상당수를 바쳤다.

-대체로 이런 영화광의 삶은 경멸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광이야말로 인생의 실상을 모르는 바보라는 경구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영화광은 인생의 모든 것을 영화관에서 배우지만 영화관은 인생을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장소가 아니다. 영화는 환상이며 꿈이며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관은 현실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해방구이며 실제 삶의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 평전에 실린 실제 트뤼포의 삶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그런 고통스런 긴장이다. 이를테면 연애에 관해서도 트뤼포는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연애와 자신의 실제 삶에서 추구하는 연애의 경계를 곧잘 허물고자 했다. 영화에 빠져 살면서 실제 인생을 영화의 그것과 닮은꼴로 만들려 시도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경계 허물기는 쉽지 않은 것이어서 이는 트뤼포의 전체 삶에 예기치 않은 긴장과 혼란을 초래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제의 첫 번째 작품으로 상영된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는 그런 트뤼포의 삶의 형식을 잘 요약해주는 영화였다. 아주 오래전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전성기를 지난 감독의 주책스런 상상력의 발현이라고만 여겼던 영화가 이번에 다시 보니 특별한 정취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결혼하지 않은 채 숱한 여자들과 연애하는 것에 전력하는 한 중년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쓸 때 다른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책의 제목을 바람둥이라고 쓸 만큼 이 남자의 삶은 부도덕하다. 특별히 잘나서 주목할 만한 매력이 없는데도 숱한 여자들을 매혹시킨 이 남자의 비밀이 영화 속에서 명쾌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형의 삶이 주는 긴장의 중독성이랄까, 하는 것에는 어렴풋이 공감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베르트랑 모란은 각양각색의 여자들에게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백화점에서, 세탁소에서, 렌터카 사무실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집 근처 상점에서 자신의 눈길을 뺏는 다리를 지닌 여성에게 돌진하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여자들의 다리는 지구의 모든 방향을 측정하면서 평형과 조화의 상태로 유지하게 만드는 컴퍼스'다.

-한 정신 나간 남자의 일대기를 다룬 듯한 이 영화는 기묘한 종교적 열정으로 승화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죽어가면서도 간호사의 아름다운 다리를 보고 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애쓰다가 쓰러지는 베르트랑 모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의 이 영화에 관한 대목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서 외제니의 아버지가 사망 직전에 사제의 금제 십자가를 낚아채려 애쓰는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에서 베르트랑 모란의 자전적 소설의 가치를 알아본 책 편집자이자 마지막 애인이었던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이 자기도취에 빠진 구제불능의 남자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비상한 혜안을 지닌 사람임을 인정한다. 이는 베르트랑의 영혼이 어떤 관습의 고정성이나 일상의 무감각에도 갇히지 않았던 열정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느비에브는 베르트랑과 짧은 연애를 즐기면서 그가 자신의 가슴을 만질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권리는 있지만 의무는 없는 관계의 긴장을 버텨내는 열정은 이 책에 따르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삶에서 줄곧 염원하던 가치와 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삶이 마냥 행복할 리는 없었다. 성장기의 자전적 체험을 다룬 <400번의 구타>로 성공하면서 겪은 부모와의 불화에서부터 아내와 딸들과 누린 일시적인 평화와 장기적인 부조화의 갈등도 그렇고 영화를 찍을 때 누린 공동체적 친밀감과 영화가 끝난 후에 느끼는 이별의 상실감 같은 것들이 그의 삶과 영화에선 늘 반복된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상영되는 트뤼포의 또 다른 후기작 <이웃집 여인>에서 오랜만에 이웃으로 재회한 남녀 주인공은 젊은 시절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자신들의 열정을 되살릴까 말까 한동안 고민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마침내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을 분출시켜 그들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의 절정기에 죽음을 맞는 이 돌연한 결말은 인생의 충만한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지극한 절망의 표현이다(*언젠가 TV에서 본 영화이다. 제라르 드파르디유 주연). 영화라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종의 시체애호증처럼 필름이 마모될 때까지 우리는 스크린 속 꿈의 실체를 거듭 음미하고자 영화관을 찾는다. 비디오와 DVD로 매체가 호환되는 현대에 그런 영화광의 매혹은 점점 과거의 것이 돼가고 있지만 유한한 실제 삶과 달리 실제 삶을 모방한 이미지는 불멸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트뤼포의 영화적 스승이기도 한 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명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영화는 현실에서 되살릴 수 없는 일종의 시체와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불멸성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트뤼포의 삶과 영화는 바로 그런 삶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거듭된 시도이고 열정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트뤼포는 프랑스 영화계의 기린아가 되기 위해 엄청난 야심을 불살랐던 젊은 시절부터 영화계의 중심부에 오르게 된 장년에 이르기까지 숱한 권력적 행보를 서슴지 않았으면서도 그의 스승 앙드레 바쟁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극적인 삶을 살았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그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흥미로운 영화세계를 펼쳤으며 그것 이상으로 굴곡 많은 삶의 궤적을 보여준 한 영화광의 삶을, 스크린 안과 밖이 겹치면서 생기는 긴장과 열정의 충돌을 통해 상세히 묘사하는 역저로 누구에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06.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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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83)

연휴를 앞두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을 꼽아본다. 나로선 당장 연휴에 읽을 책들은 아니지만 한두 권 정도는 연휴에 구입할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5-60권의 도서정보를 처리하고 그 중 최소 10여 권을 구입하거나 복사한다. 절반 정도는 전공이나 관심사와 관련된 원서들이고 나머지 절반쯤이 우리말 책들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은 그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거나 한번쯤 관련서들을 뒤적거려보고 싶은 책들에 속한다. 이번 경우엔 <로맹 가리>나 <도구적 이성비판>이 특별히 그러한 종류에 해당된다. 먼저 <로맹 가리>부터 시작해보자. 

 

 

 

 

도미니크 보나의 <로맹 가리>(문학동네, 2006)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이자, 수수께끼 같은 작가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에 관한 전기로 198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기부문 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평전이다(보나의 책으론 <세 예술가의 연인>도 출간된 바 있다). 요컨대 "<자기 앞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번갈아 소설을 발표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거장'과 '자유로운 영혼의 신인'이라는 두 페르소나를 연기했던 작가, 1980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치기까지 열정과 야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66년 생애를 조명한다."

소개를 좀더 옮겨보면 "<로맹 가리>는 문학비평 기자이자 르노도 상 수상 작가인 도미니크 보나가, 저널리스트의 치밀함과 소설가의 감수성으로 쓴 평전이다.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아자르 사건'을 포함하여, 로맹 가리의 내면세계와 모든 작품과 창작의 배경,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다. 화려한 성공을 꿈꾸는 한 가난한 소년의 열망이,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외모로 세계 외교 무대를 사로잡은 한 외교관의 카리스마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외로움이, 창조적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자 했던 한 작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실 내게 로맹 가리보다 더 친숙한 이름은 그의 가명이자 '또 다른 작가' 에밀 아자르이다. <자기 앞의 생>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의 여주인공도 내 기억에 로맹 가리의 광팬이었다). 

내가 책을 읽은 건 기억에 1990년 봄쯤이다. 나는 제대를 얼마 안 남겨두고 한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에서 뒹굴며 몇몇 소설들을 탐독했었는데,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 바로 <자기 앞의 생>이었다. 주인공 모모와 로자(로쟈가 아니다) 아줌마가 엮어가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 이후에 다시 읽은 적이 없으므로 작품에 대해 정확히 평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었고 이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까지 관심이 이어지도록 했다. 비록 <유럽의 교육>(책세상, 2003)은 구입해두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으론 다소 의아하지만. 아무튼 이번에 나온 전기를 읽다 보면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란 한 작가(혹은 두 작가?)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판단과 열정을 갖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두번째 책은 역시나 평전으로 '과학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사이언스북스, 2006)인데, 실상은 지난번에 다루어져야 할 책이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월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헉슬리'란 성이다. 조금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허슬리'가 여럿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주로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잘 알려져 있는데, 헉슬리 가문을 일으켜세운 토머스 헉슬리(1825-1895)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이다. 토마스의 또다른 손자인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 경은 올더스의 형이고, 그들의 배다른 동생 앤드류 헉슬리는 노벨상 수상 과학자이다.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을 만큼 진화론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데, 이 '불독' 집안이 가히 지성의 명가인 것이다.

저자 화이트는 책에서 "19세기 과학계의 발전사와 '과학 지식인' 토머스 헉슬리의 삶을 다뤘다. 헉슬리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부인 및 동료들과 나눈 서한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학 및 과학자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토머스 헉슬리를 재조명한다. 좁게 정의되는 과학이 아닌, 다른 문화 영역들과 연결되는 실천방식으로서의 과학을 추구한 그의 삶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책은 과학의 실천, 대중화, 변호 과정에서 헉슬리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한 사람의 '과학 지식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과학 및 과학자들의 사회.문화적 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밝힌다."

해서 '과학 지식인의 탄생'이란 부제가 공으로 붙여진 것은 아닌 셈인데, 헉슬리 가문과 과학 지신의 자기정체성이 모두 토머스에게서 기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 '대단한' 위인의 생애에 한번 눈길을 주어볼 만하다.  

 

 

 
 
 
 
세번째 책은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주제 사라마구(1922- )의 신작 <도플갱어>(해냄, 2006). 제목 그대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게 되는 '도플갱어'의 모티브를 차용한 소설이라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 <동굴>과 함께 주제 사라마구 '인간의 조건'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영역본의 제목은 ' The Double').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어느 날 그는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영화에 나오고 있었던 것. 막시모는 집요한 추적을 시작, 배우의 본명과 거주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배우와 그 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배우를 발견하면서 그가 가졌던 자신에 대한 불안감은 이제 배우 부부에게까지 전염되고,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몸에 난 상처까지 똑같은 두 남자는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를 따지며 존재의 불안감을 떨치려 한다..."
 

 

 

 

나는 아직 사라마구의 책을 읽어본 바 없지만 노벨상 수상작인 <수도원의 비망록>(문학세계사, 1998)을 읽어본 지인의 호평은 기억하고 있다(드라마들도 번역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소 낯설다는 느낌은 주지만, 이번에 출간된 '도플갱어'는 상당히 낯익은 테마의 작품이다. 도플갱어, 혹은 분신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만화와 영화에도 두루 걸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에서 최수철의 <분신들>에 이르기까지.

사실 자신과 똑같은 또다른 존재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좀 섬뜩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것이어서 공포영화에서도 즐겨다루어지는데, 가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플갱어> 같은 게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 놓이는 작품이기에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읽기도 다소 수월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도플갱어'란 테마가 정신분석을 자극하고 요청하는 테마인데, 네번째 책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연구서 박찬부 교수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모처럼 국내 필자의 저작이어서 반가운데(국내에서는 홍준기, 권택영 교수 등이 라캉 관련 저작을 갖고 있는 정도이다), 저자는 이미 10년전에 <현대정신분석비평>(민음사, 1996)을 상자한 바 있고(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역서로 돼 있지만 저서이다), 프로이트 전집의 <쾌락원칙을 넘어서>(열린책들, 199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재현과 그 불만'이란 표제 자체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의 영어 제목인 '문명과 그 불만'에서 따온 것인데, 라캉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저자의 길잡이가 되는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표현은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에서 유래한 것. 프로이트가 인간 발달의 동인으로 문명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도 '죽음 본능'으로 대변되는 '그 불만'을 주요 논제로 다루었듯, 상징적 재현의 불가피성을 인간 주체의 '강요된 선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언제든지 불만 세력인 실재계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라캉의 '상상질서'에서 시작되어 '실재계' 쪽으로 옮겨졌던 관심사를 그대로 되짚어 살핀다. 지나치게 어렵거나 해체적인 서술을 지양해, 라캉의 이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죽음본능' 혹은 '죽음충동'을 화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지젝 라인의 사고방식과 겹치는 듯하지만 저자는 지젝과 같은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라캉 담론의 탈근대적 유산'이란 서론의 제목이 이미 이를 암시해준다. 지젝이 방어/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라캉의 '근대적' 유산이기에). 방점이 '정신분석'보다는 '비평'에 두어져 있던 <현대정신분석비평>에서 저자가 사숙한 스승으로 거명한 이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노만 홀란드였다. 독자반응이론가로도 분류되는 홀란드의 대표작은 <문학적 반응의 역학(The Dynamics of Literary Response)>(1968)이다. 말하자면 '미국화된 라캉'의 한 사례를 <라캉>에서 읽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었던 독일의 사회학자 호르크하이머(1895-1973)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인 <도구적 이성비판>(문예출판사, 2006)이 거의 40년만에 출간됐다. 아도르노와의 공저인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리고 아도르노의 그늘에 가려 사실 덜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멤버들을 그린 한 캐리커쳐가 말해주듯이(이 흔한 이미지가 잘 검색되지 않는군) 대학의 사회문제연구소장이었던 호르크하이머는 학파의 대부이자 좌장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책에서 "부정의 철학을 지향하며, 자연과 인간을 도구화하고 파멸로 이끄는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대해 고발한다. 오늘날 이성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고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고발은 이성의 전면적 해체가 아니라, 오직 이성의 자기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론적 염세주의자이면서 실천적 낙관주의자가 되자.'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출현을 인식하는 비관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의 유대를 꿈꾸는 낙관주의를 가진 호르크하이머의 사상을 느낄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의 책이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철학의 사회적 기능>(전예원, 1983)이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판된 책이지만 이 참에 새로 때깔을 입혀도 좋지 않을까 한다. 더불어, 황재우(시인 황지우) 등이 공역한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50 >(돌베개, 1981)도 다시 손을 봐서 재출간하는 건 어떨까?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근간으로 한 책은 지상사적 시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탄생과 이론적 진화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는 저작이다...

06. 09.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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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82)

보관함에 자꾸 쌓이는 책들을 좀 털어내보려고 한다(머릿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이 벌레들!). 이번에 다룰 책들을 뭉뚱그리자면, "곤충들의 도서관에서 세계의 명작들을 읽으며 내면의 침묵에 빠져들다가 끝내 국경을 넘어 중세로 달아나버린 한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되겠다(이 이야기에 캐스팅되지 않은 책들은 또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럼, 먼저 '전략의 귀재들, 곤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제일 먼저 꼽을 책은 토마스 아이스너의 <전략의 귀재들, 곤충>(삼인, 2006). 원제는 'For Love of Insects'(하버드대출판부, 2005)이고 원서의 표지는 국역본의 표지와 같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파리 종류인 거 같다. 국역본의 제목은 다소 튀는데, 같은 제목이더라도 '곤충, 전략의 귀재들'이라고 배치하는 게 보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아이스너 교수는 코넬대학의 석좌교수인데, 동물행동학과 생태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아주 작고 놀라운 곤충의 세계. 반세기 동안 우루과이, 호주, 파나마, 유럽, 북아메리카 대륙을 넘나들며 관찰하고 실험하여 발견한 곤충들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고. 특히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곤충들의 생존 전략, 진화에 승리한 비밀을 해독해내는 과정과 연구 순간순간을 포착한 원색 사진들이 돋보인다"고 한다.

568쪽 분량에 책값도 5만원에 육박하지만, 사실 이 정도 설명뿐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한데, 역시나 세계적인 개미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이 책은 프랑스의 위대한 곤충학자 파브르를 계승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유능하고 열정적이며,박학다식하고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가 반세기 넘는 시간을 곤충에 투자한 노력의 산물이다"라는 최상급의 추천사를 쓰고 있지 않은가? 흔한 말로 '강추'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더 눈길을 주는 수밖에(참고로, <파브르 곤충기>는 아직도 완역되지 않은 듯하다. 분량이 방대하긴 하지만).

거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의 정복자 - 곤충>(다른세상, 2005)의 저자 메이 베렌바움이 거들기를 "곤충학의 세계에도 초인적인 영웅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토머스 아이스너일 것이다. 톰은 화려한 업적을 쌓아오면서 곤충이 화려한 색상이나 기이한 돌기, 아주 고약한 분비물을 지닌 이유를 수도 없이 밝혀냄으로써,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과학자들의 기를 꺾어왔다. 이 책에서 그는 재치 넘치는 문체와 입이 떡 벌어지게 멋진 사진들을 통해 흥미진진한 과학의 세계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곤충과 그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정도 밀어주는 분위기라면 소장용 도서로 꽂아두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원색 사진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니까 초등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도 유용할 듯싶다. 어른이야 곤충을 '사랑할'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두번째 책은 책벌레들의 전당, 도서관에 관한 것이다. 로널드 맥케이브의 <도서관, 세상을 바꾸는 힘>(이채, 2006)이 그것인데, 딱히 이 책에 주목해서라기보다는 그간에 도서관을 표제나 주제로 해서 나온 책들을 이 참에 호명해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령, 얼마전에 출간된 최정태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2006)이 소장가치로는 더 앞선다. 도서관의 역사를 다룬 책들도 있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미궁 같은 도서관의 모델의 되었다고 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관한 책도 눈길을 주어볼 만한 책이다.

원제가 'Civic Librarianship: Renewing the Social Mission of the Public Library'(2001)인 신간은 '도서관과 사서의 위기 극복을 위한 철학적 고민'이란 부제를 갖고 있으며, "책은 미국 공공도서관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펼치며 도서관 사서들이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커뮤니티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시민사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미국 공공도서관 역사를 짚어가며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의 새로운 공공도서관의 청사진을 이야기한다"는데, 순전히 미국적 상황과 처지에 관한 내용일 듯하지만 '기적의 도서관' 건립운동 등에서 촉발된 도서관에 대한 관심과 여론을 보다 체계화/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 보인다.

아마도 도서관 사서들의 연수교재용으로 딱 알맞아 보이는데, 이 '공적인 책'에 따분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들의 풍광을 잠시 훔쳐보아도 좋겠다(저자는 러시아 도서관들을 훑어볼 포부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공부가 절로 될 만하지 않는지?.. 

 

 

 

 

그럼, 우리의 아름다운 (가상의) 도서관에서 무슨 책들을 읽어야 할까? 최근에 나온 따끈따근한 고전 명작들은 어떻겠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학사에서나 자주 접하던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1811-1972)의 <모팽양>(열림원, 2006)이다. <미라 이야기>(열림원, 2006) 같은 청소년물이 지난 7월에 출간되기도 했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 고티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다(이런 유미주의 작가로 가장 유명한 이로는 영국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있다).

작가 고티에가 고작 24살 때 발표한 작품이라는 <모팽양>은 "관습적인 성역할을 넘나드는 여주인공을 통해, 사회적 성정체성인 젠더(gender)를 치열하게 성찰한 작품"으로 "주인공 '모팽 양'의 실제 모델은 17세기의 남장 여가수이자, 후에 모팽 부인이 되는 '마들렌 도비니 양'이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존심이 높았고, 기사복을 입고 다녔으며, 결투를 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봤을 때도 다소 '전복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듯한데, "이 작품은 1835년 출간되어 발자크, 위고의 극찬을 받았고, 당시의 프랑스의 고전비평과 부르주아 신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특히 동시대 공리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아름다움의 무용성을 극단적으로 주창한 서문은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니 작가의 나이는 잠시 잊어주는 게 좋겠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버티고, 2006)도 최근에 나온 작품이다. 한데 엄밀히 말하면 이미 출간됐던 작품이다. 지난 1990년에 나온 중앙일보사의 소련동구문학전집 중 한권으로 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함께 묶여 있었던 것이다. 중앙일보사판은 역자가 이윤기씨로 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국내 최초의 체코어 완역본"이라는 건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흐라발은 쿤데라와 함께 체코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하다. 안면이 좀 있었던 체코출신의 한국 유학생은 대단한 작가라고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적이 있었다.

그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1965년 작인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체코를 배경으로, 독일에 점령당한 체코인들의 삶을 그렸다. 냉혹한 현실에 우스꽝스러운 등장인물들을 배치,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든다. 수습 역무원 흐르마는 소심한 성격의 스물두 살 청년. 여자친구와의 첫 경험에 실패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벽돌공의 도움으로 살아나 3개월 만에 근무에 복귀한다. 하지만 독일군에 점령당한 기차역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신호를 잘못 보냈다고 총살당할 뻔하고, 화물차량 가득 실려 오는 아사 직전의 불쌍한 가축들을 보아야 한다..."

해서, "파시즘에 저항하는 영웅적인 이야기이지만, 진한 휴머니즘도 내재되어 있다. 체코에서 영화화되어 196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으며(*영화의 스틸 사진들은 보시는 바와 같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소련, 동구 현대 문학전집'에 이윤기 씨의 영어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다(*여기 내용이 다 나오는군). 함께 실린 단편 '간이주점'은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 날, 결혼 피로연이 열리는 왁자지껄한 간이주점에서 목을 매고 죽은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곧 분량도 많지 않으므로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에 유쾌하게 다 읽을 만한 소설이겠다.

그리고, 또 우리에겐 <주홍글씨>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손(1804-1864)의 장편소설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문학과지성사, 2006). "사회주의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모인 남녀들의 다층적인 연애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 "1852년 발표되어 '호손의 형식 미학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번에 국내에 초역된 작품이라고.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 부근, 일군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고 '블라이드데일'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행복의 골짜기라는 뜻처럼, 처음 이 공동체 생활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고무적으로 펼쳐진다." 호손의 지명도를 고려하면 한번쯤 읽어둘 만한 작품이겠다.

 

 

 

 

네번째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내면의 침묵>(열화당, 2006)이다. 이번에 그의 에세이집 <영혼의 시선>(열화당, 2006)이 같이 출간됐다. 지난 여름에 출간된 평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유문화사, 2006)까지 갖춰놓으면, 게다가 좀 무리해서 사진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그는 누구인가>(까치글방, 2003)까지 마련해놓으면 국내 출간된 '브레송 컬렉션'은 일단 완벽하다 하겠다.

<내면의 침묵>이 먼저 눈에 띈 건 사실 표지로 쓰인 사뮤엘 베케트의 초상 때문이다. 말년의 베케트를 역시나 대가다운 솜씨로 포착하고 있는 사진이다. 혹은 아래와 같은 사진의 베케트.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다시 상기해보자면 올해는 베케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내에서는 이렇다할 기념 출판이 없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베케트를 표지로 한 브레송의 사진집이 그 아쉬움을 얼마간 달래준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그의 드라마 한두 편을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 한국어 베케트의 목록을 뒤적거려보지만 빈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기 이전에 베케트를 먼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책벌레가 어느덧 국경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다섯번째 책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 몇년전에 <국민이라는 괴물>(소명출판, 2002)로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저자는 근대 국민국가의 비판과 극복에 학문적 화두를 두고 있는 듯하다. '문화, 문명, 국민국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부제로 갖고 있는 이번 책에서도 "문명과 문화가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통합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들이 얽매인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예리하게 파헤친다"고 한다. 

요컨대, "문명과 문화라는 말은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며, 뛰어난 근대적 이데올로기임을 밝힌다. 따라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을 둘러싼 역사 또는 국민국가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문명, 문화라는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마저도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한다"는 걸 지적하는바, "책은 문화를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사문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문화의 대안을 모색한다."

이에 대한 임지현 교수의 추천사는 이렇다: "'서양'에게는 '동양'이자 '동양'에게는 '서양'인 일본, 오리엔트화되는 오리엔트이자 오리엔트화하는 오르엔트인 일본에 대한 니시카와 나가오의 날카로운 성찰은 비교문화 연구의 진경을 보여준다. 비교문화의 단단한 이론 틀 속에서 '일본적인 것' 혹은 '일본 고유 문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문화적 본질주의를 해체하는 그의 차가운 시선은, 좌우를 막론하고 '국민문화'의 회로 판에 갇혀 있는 일본 지식사회에 대한 엄정한 자기비판이다."(강조는 나의 것)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자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중요한 이론전 전거로서 참조한다. '오리엔탈리즘'을 주제로 한 국내서/번역서 몇 권을 같이 꼽아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은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의 표지로 쓰인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보통 다섯권의 책을 꼽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번엔 서양 중세사의 거장 조르주 뒤비의 책을 보너스로 더 집어넣는다.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생각의나무, 2006) 가 그것인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프랑스 아날학파의 거장 조르주 뒤비가 쓰고 백과사전의 명가 라루스 출판사가 출간한 책으로 그림과 지도로 보는 대 세계사 연감이다. 인간 역사의 파노라마를 520개의 사건으로 분류하여 편집 기술이 집약된 지도 위에 그 전개 상황과 개요를 새겨 넣어 역사 기술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책값이 12만원에 이르는 만큼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줌에 틀림없다! 아, 세계는 넓고 서민-책벌레로선 이 책값들을 벌기가 참으로 어렵도다!..

06. 0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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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oni > howmystery.com 추천 미스터리 42

howmystery.com 추천 미스터리 42 (by decca, 2005.6.29.)

1 음울한 짐승(음수), 에도가와 란포
이상 심리를 잘 표현한 수작
개성이 강하면서 신비로운 작품
심리적 압박감, 탁월한 스토리 텔링


 

 


 

2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문장과 흐름이 좋은 작품

 

 

 

 

3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추리소설을 더 넓은 분야로 이끈 소설
금세기 최고의 현학적 미스터리 소설
엄청난 정보량 속에 유머와 서스펜스가 뛰어난 수작



 

 

 


4 9마일은 너무 멀다(2표), 해리 케멀맨
단편 추리소설의 진수
단순명료하면서도 지적인 재미가 넘치는 소품 단편집


 


 

 

5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 카레
사실적이고 감상적인 결말

 

 

 

 

6 죽은자와의 결혼, 월리엄 아이리시
부조화 속에 이상심리를 잘 표현한 작품

 

 

 



7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긴장감


 

 


 


8 X의 비극, 엘러리 퀸
추리소설의 조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작품


 

 



 

9 황제의 코담배갑, 존 딕슨 카
심리적 트릭의 진수
추리소설 초입자에게 최적의 소설



 

 


 

10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재미를 만끽한다
개인적인 최고의 작품



 

 


 

11 반지의 비밀, 엘리스 피터스, 북하우스
추리소설 중 가장 로맨틱한 작품


 

 



 

12 헤르메스의 기둥, 송대방
국내물 중 가장 뛰어난 팩션(제가 임의로 단 코멘트입니다)


 

 

 

 

13 살인자들의 섬, 데니스 루헤인
멋진 반전과 더불어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


 

 

 

 

14 우부메의 여름, 교고쿠 나츠히코
낯설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무언가에 홀린듯한 독서체험
머리가 하얗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 작품


 

 



 

15 10일 간의 불가사의, 엘러리 퀸
일급 본격물 그리고 여운도 깊은 작품


 

 



 

16 가짜경감 듀, 피터 러브시
재미있다 외에는 별 말이 필요없는 작품(제가 보강한 코멘트입니다)
플롯팅의 절대 강자, 흥행의 보증수표
재미있고 유쾌한 추리소설


 

 


 

 

17 환상의 여인, 월리엄 아이리시
순식간에 읽힌다


 

 


 

18 삼나무 관, 애거서 크리스티
과장되지 않은 논리적인 추리


 

 

 

 

19 그린 살인사건, S.S.반 다인
당시 추리소설의 수준을 확 끌어올린 작품


 

 

 

 

20 수정마개, 모리스 르블랑
모험 미스터리의 진수


 

 

 

 

21 화요일 클럽의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13개의 추리극
각 단편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트릭과 재미를 주는 마플양 등장 걸작 단편집
심심하면 읽는 책


 

 

 


22 신의 등불, 엘러리 퀸
역사상 가장 대대적이면서 교묘한 하지만 너무나 단순한 트릭


 

 

 

23 여자에게 맞지 않는 직업, P.D.제임스, 일신(황금가지에서 재출간 예정)
지리한 진행 그리고 소름끼치는 전율, 추리문학의 정점



24 마지막으로 죽음이 온다, 애거서 크리스티
푸아로와 마플이 나오지 않는 작품 중 ‘그리고 아무도…’와 함께 최고로 즐거웠던 작품

 

 

 

 

25 숲을 지나가는 길, 콜린 덱스터
독자를 가지고 노는 작가는 흔치 않다

 

 

 

 

26 엘러리 퀸의 모험, 엘러리 퀸
엘러리 퀸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는 단편집

 

 

 

 

 

27 경찰 혐오자, 에드 맥베인
경찰 소설의 효시, 탁월한 재미
경찰 소설의 효시


 

 

 

 

28 내가 죽인 소녀, 하라 료, 청림출판
하드보일드에서 탁월한 반전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소설
- 이미 절판된 소설로 구하기는 다소 어려운 작품입니다. 다만 책이 최근에 일정 배포돼 리스트에 넣었습니다.


29 네 사람의 서명, 아서 코난 도일
모든 추리소설이 이 책에서부터 시작됐다


 

 

 

 

30 통, F.W.크로프츠
이 책을 시작으로 독자는 탐정을 바라만 보지 않게 됐다(제가 보강한 코멘트입니다)


 

 


 

 

31 빅 슬립, 레이몬드 챈들러, 북하우스
필립 말로의 첫 데뷔작(보강한 코멘트입니다)


 

 


 

32 푸코의 진자, 움베르토 에코
도입부만 넘기면 흥미진진한 보물 상자
책 자체가 거대한 음모


 

 

 

 

33 백야행, 히가시노 게이고, 태동출판사
깔끔한 문체, 깔끔한 구성, 깔끔한 결말


 

 

 

 


34 사라진 시간, 빌 벨린저
마지막 장에 이르러야 작품 전체의 내용이 파악되는 독특한 구조


 

 

 

 

35 살의, 프랜시스 아일즈
범인의 시각으로 범인의 심리를 통해 작품을 읽어나가는 재미

 

 

 

 

36 피의 수확, 대실 해밋
하드보일드의 원점, 거칠지만 사실적인 문체로 장르의 틀을 확립한 작품


 

 

 

 

37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하드보일드의 정점, 모호한 사건과 밝혀지는 비극, 결국 작품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완벽한 제목


 

 

 


 

38 소름, 로스 맥도널드
하드보일드의 종착점, 높은 완성도와 충격적인 반전


 

 

 

 

39 재앙의 거리, 엘러리 퀸
비극 시리즈와 동격, 라이츠빌 시리즈


 

 

 


 

40 악마의 선택, 프레드릭 포사이드

41 자칼의 날, 프레드릭 포사이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전개(제가 보강한 코멘트입니다)


 

 

 

 

42 Y의 비극, 엘러리 퀸
굉장한 몰입감

 

 

 

 

책에 대한 소개는 howmystery.com에 올라온 글 그대로예요.
재출간되면서 바뀐 책제목은 제가 수정했어요.
빨간색 제목은 제가 읽은 책입니다. 42권 가운데 29권.
나머지 책들도 다 읽어보고 싶어요.

ps. <음울한 짐승> 읽었음. (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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