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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생명체가 이렇듯 신비할 수가
유전자의 변신 이야기
존 C. 애비스 지음, 이영완 옮김, 최재천 감수 / 뜨인돌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로드무비님으로부터 <유전자의 변신 이야기>를 받고나서 근 반년 가량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책이 너무 두꺼워 보여서였고, 두 번째로 매우 어려운 내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대해 남들보다는 안다해도, DNA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픈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많은 분들이 읽은 <이기적 유전자>도 그래서 못읽고 있다 (실제로 그 책은 굉장히 어렵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 눈이 피로하지 않은 종이를 써서 그렇지 책은 겨우 312쪽밖에 되지 않았으며, 내용도 DNA 얘기가 아니었다. 유전학 교수인 저자는 이 세상에 살고있는 동.식물들의 흥미로운 세계를 알기 쉽게 전달해 준다. 먹이에 따라 다른 독을 내는 독사들 얘기부터, 난 이 책에 빠져들었다. 우주의 신비니 뭐니 하지만, 정말 신비한 것은 자기 나름의 생을 살아가는 생물들이 아닐까. 예컨대 산란을 위해 수천킬로를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 떼라든지, 온도에 따라 성이 결정되는 거북이들, 다른 종의 둥지에 알을 낳음으로써 남에게 자기 애를 떠맡기는 뻐꾸기... 그 모든 것들이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으며,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신기하기만 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줄곧 사용한 방법은 DNA 표지법으로, DNA가 얼마나 비슷한지를 따져서 조상이 누구며 어디서 파생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DNA 결정론이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몰랐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수컷이 자녀 양육에 헌신하는, 그래서 금술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횃대새가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는 사실은 횃대새의 새끼들 중 일부가 아빠 수컷의 유전자와 다르며, 오히려 옆집 수컷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게 증명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 비율이 3분의 1 이상이라고 하니, 횃대새를 더 이상 금술이 좋다고 해야 할지 심난해진다. 예를 이렇게 들어서 그렇지, DNA 표지법이 단지 부정의 증거만을 잡아내는 건 결코 아니며, 위에서 말했듯이 근연종을 밝혀냄으로써 진화의 계통도를 그리는 게 더 큰 목적이다.


아쉽게도 이렇듯 신비한 동.식물들은 점점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예컨대 북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산란을 위해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이 지난 1세기 동안 90% 이상 감소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탐욕 때문이겠지만, 빙하기 때 많은 동물이 죽은 것처럼 인간의 득세도 빙하기와 비슷한 환경적 재앙의 하나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식물은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태어나기도 하니, 고래 같은 게 멸종하는 걸 너무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앞으로는 인간의 횡포를 견뎌낼 강한 애들만이 지구상에 살아남겠지. 한가지만 말한다. 물개 그것이 아주 좋은 정력제라고 알고 있는 분들, DNA 가지고 검사를 해보니 시중에서 팔리는 물개 그것은 물개 건 거의 없고 “들개나 집고양이, 소” 등의 그것이란다. 정력 그만 추구하고 있는대로 쓰자.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로드무비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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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19세기의 러셀과 21세기의 네티즌
결혼과 성
버트란드 러셀 지음, 김영철 옮김 / 간디서원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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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이가 성에 대해서 물었을 때, 어른들은 대부분 “몰라도 돼” “크면 저절로 알게 돼”라고 한다.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사실 없는지라 그네들은 성에 관한 지식을 매우 은밀하게, 주로 친구들을 통해서 습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쓸데없는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그 폐해는 자못 심각하다. “지식을 추구하는 아이가 어떤 방면에서는 이러한 호기심이나쁘다는 것을 알 때, 그의 과학적 호기심이라는 충동은 모두 저지되고 만다”

아이들이 바라는 만큼의 지식을 제공한다면 아이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아이들의 관심은 언제나 성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포르노 등을 통해 잘못된 성지식을 배우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이 <결혼과 성>에서 한 말이다. 제목이 야해서가 아니라 저자의 명성 때문에 이 책을 샀는데, 결혼과 성, 그리고 가족제도에 대해 이처럼 공감 가게 얘기하는 책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비록 저자가 1872년생이고 그 후 성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 책에 씌어진 말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계약결혼을 옹호하는 등 오히려 급진적인 면도 있다. 특히나 공감한 것은 사회의 도덕에 관한 대목이다. 도덕적 기준이 높아서 성에 관한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없으며, 그런 욕구를 억압하는 것이 훌륭한 사람의 조건이 되는 사회는 구성원이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런 사회에서는 성매매가 창궐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별 거 아닌 책들이 판매금지가 되고 영화 ‘거짓말’의 상영이 봉쇄되는 우리나라가 성매매의 천국인 것도 다 그런 데서 기인한다.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했던 사람답게 저자는 성에 대한 지나친 억압의 주체를 기독교로 보고, 그로 인한 육체와 이성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러셀은 정말 멋진 남자다.

“도덕주의자들은 성도덕은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에 빠져 있다....남녀간의 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성의 정조에 관한 전통적인 기준의 완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제, 시집간 딸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 났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딸도 제사 지내라”느니 어쩌니. 제사가 대부분 여성들의 노동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판결에 그런 식으로 딴지를 거는 모습은 보기 딱하다. 그런 댓글들을 다는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어째서 19세기에 태어난 러셀보다도 시대에 뒤쳐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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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붉은돼지 > 무제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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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소설은 두어 해 전에 <마의 산>을 읽고는 처음이다. 지금 돌이켜 보니 소설의 줄거리도 감감하고 남아있는 특별한 느낌이나 감상도 없다. 골골거리는 환자들이 모인 무슨 요양원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프리메이슨이 나오고 어쩌고 했던 기억만 조금 난다.

본인의 기억력이 한심한 수준을 넘어 걱정스러운 단계로 접입가경 접어 들었다는 것은 본인 당자로서는 비록 안타깝고 서글프나 어쨌든 거의 명명백백한 것처럼 보인다. <토니오 크뢰거>를 두세장 쯤 읽다가....우리의 주인공 토니오가 학교수업을 마치고 그의 연모하는 동성친구인 한스 짐머와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 쯤을 읽다가..... 문득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슬그머니 드는 것이었는데, 책을 내려놓고 가만 곰곰 궁리를 거듭하던 차에 이문열세계명작산책에서 본 듯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서가에서 '성장과 눈뜸'이라는 부제가 붙은 3권을 꺼내어 펼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떡하니 <토니오 크뢰거>가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본인이 이문열명작산책 10권을 3~4년전에 모두 읽은 것은 확실하니 그 안에 있는 토니오 킈뢰거도 읽었음이 분명한데 읽은 책의 제목도 되새기지 못하는 본인의 기억력으로 책은 또 읽으면 무엇하나 하는 슬픈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본인이 중학교 다닐 때 수집한 영화포스터에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 포스터도 있었는데(영화잡지 스크린에서 주로 오려내었음) 그때는 이 영화의 원작이 따로 있는지 또 토마스만이란 작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몰랐다. 포스터에는 동그란 안경을 낀 조금은 소심해 보이는 분위기의 중년남성과 금발에 세라복 혹은 해군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얼굴이 가름한 미소년(처음에는 여자인줄 알았다.)이 등장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중년의 남성은 변태 아센바흐이고 소년은 타치오 되겠다. 아센바흐의 타치오에 대한 사랑을 달리 말하자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경까지 와 있고 동서와 고금을 두루 살펴보건데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니 뭐 실제상황이라고 해도 미소년 남색 취양이 별 스러울 것도 없겠다. 아센바흐는 헛것을 쫓다가 헛되게 죽었지만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것은 빛나는 두 눈과 감수성을 지닌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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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문장과의 그 질기디 질긴 사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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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산문을 읽지 않았던 건, 아주 오래 전 잡문 수준의 '산문'을 '산문'이라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했던 글을 읽은 영향도 있었다. 결국 난 산문을 좀 폄하하는 편견에 사로잡혔고, 이 책을 읽었을 때 이제라도 산문을 폄하해서는 안되겠다는 반성도 하게됐다. 그만치 이 책은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산문도 글을 쓰는 수준이나 취향이 제 각각이라 내가 좋아할만한 수준의 책을 고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 정도라면 고급한 산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본다.

작가의 깊은 사유와 사물에의 성찰이 돋보인다. 작가 자신은 무교라고 말하지만 불교에 꽤 심취해 있는 것 같다. 이 만한 문장을 구가하려면 얼마만한 책과 깊이있는 사고를 해야하고, 문장과의 질기디 질긴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일까 의문스러워지기도 한다.

물론 일시적이긴 하지만, 어떤 글은 읽고 있으면 내가 글을 쓸 때 언젠가 모르게 그 문장을 흉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남의 것을 정령으로 하여 쓰고 있을 때 묘한 안정감이 느껴지곤 하는 건 뭘까? 결국 글발도 무당처럼 신이 내려야 쓴다는 말이 맞는 얘길까?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정령을 떨쳐 버리고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과연 문장이 누구의 것을 흉내내서 될 일이란 말인가? 잠시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내것으로 도용하거나 차용할 수는 없다. 누구는 누구 같이 쓴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문장은 그 사람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도구일 것이다. 나는 알라딘 서재를 쓰면서 내 글이 참 많이 허접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정리도 안된 글들을 마구 토해낸다. 어떤 땐 내 스스로의 글에 창피함을 느끼고 앞으로 안 쓸까도 생각해 본 때도 많이 있다. 내가 산문에 관심을 갖으려한 것도 어떻게 하면 내가 내 글에 책임을 지고, 조금이라도 나은 글을 구사해 볼까 얍삽한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선우의 문장을 대하면서, 문장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사람처럼 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장은 사유의 깊이에 비례할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때론 문장이 사유의 깊이를 쫓아 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작가들은 피를 말리는 문장과의 사투를 서슴치 않기도 하는 거겠지.

작가에게 있어서 문장을 다듬는다는 건 어떤 글을 쓸 것이냐 못지 않게 자기 살을 깍는 아픔과 같은 것이리라.

무엇이 산문 정신일까? 좀 더 심사숙고 해 볼 일이다. 단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장의 명징함과 유려하다 못해 장중함 또한 느껴졌고, 사유의 깊이에 천착하는 작가의 성실함에 마음 속 깊이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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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천안문
샨 사 지음, 성귀수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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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문체가 좋다. 중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에 가서 7년만에 써낸 프랑스어 소설이란다. 7년 동안 죽어라고 프랑스어 공부하면 이렇게 써낼 수 있는 걸까?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소설이다. 읽고 난 느낌은 참 아련하다. 겉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천안문 사태의 가담자 중 한 사람인 아야메를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그녀를 쫒는 장교 자오의 추격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둘은 쫓고 쫓길 뿐 만나지 않는다. 단지 아야메를 쫓는 자오의 쌍안경을 통해 먼발치에 있는 그녀의 모슴을 줌으로 끌어 당기는 데서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병사 하나가 자오의 귀에다 대고 "뭘 보셨습니까?" 할 때 그는 병사를 돌아 보며, "아니, 아무 것도."라고 말하며 이 소설을 끝맺는다.

보통은 드라마 <모래시계>처럼 그런 혁명을 배경으로 했다면 뭔가 진한 감동의 러브 스토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뭐든 평온하고, 충만할 때 인간의 내면은 고여있는 법. 외부에서 요동칠 때 인간은 과격해 진다든지, 더 치열해지고 강한 인간애를 표출해 내는 법이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건, 진한 동료애건 간에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참으로 특이하게도 두 남녀 주인공이 옷깃조차 스치질 않는다. 자오는 오직 아야메의 집을 수색할 때 발견한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녀의 삶을 추적할 뿐이다. 그녀의 삶을 느끼고 유추해 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행방을 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야메는 중등시절 전학 온 짝 민을 돌봐주다 서로의 우정을 키워간다. 그러나 민은 전학 올 때부터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같은 반 아이들로부터 심지어는 담임 선생에게 까지 달돌림을 받는다. 선생님은 그런 민을 아야메와 짝이 되게 한건 아야메가 공부를 잘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우정이 알려지면서 담임 선생은 둘을 갈라 놓게되고 결국 민에게 퇴학 처분을 내리는 강경한 조처를 내린다. 이에 민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어느 학교에서도 자기를 받아주지 않자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아야메는 학교와 사회에 강한 불만과 울분을 쌓아가게 되고 결국 천안문 사태의 가담자로 쫓기는 신세에까지 이른다.

자오는 그런 아야메의 일기를 읽으면서 무조건 그녀를 잡아들이려 하기 보단, 과연 이 여자는 과연 누구인가 궁금즈을 품게된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현 정권에 대한 강한 불만이 증폭되어 터져 나오는 것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 그 어느 한 순간에도 인간이 이슈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인간은 역사의 주체다. 하지만 역사학자는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객관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기에 노력해야겠지만, 작가는 그런 주체인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데 더 주력한다. 그것이 아무리 허구일망정 말이다.

작가 샨사는 참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다. 그의 문체는 깔끔하고 유려하다. 아마도 자오가 쌍안경을 통해 아야메를 발견하는 것에서 소설을 끝낼 생각을 한 것은 어떤 면에선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 내면을 끊임없는 객관적인 시야로 탐미하려고 했던  보다 열린 결말이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족을 달자면,  요즘 프랑스에선 아멜리 노통과 샨사가 문단에서 주목을 받는단다. 나 개인적으론 리뷰는 쓰지 않았지만, 이전에 읽은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보다 샨사의 이 작품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솔직히 별 네 개를 주기엔 많고 세 개 주기엔 인색해 보이 작품이 이 작품이다. 세 개 반이라면 딱 좋을텐데 말이다. 그래도 네 개 주는 것이 세 개 주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네 개를 준다.

* 리뷰 제목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는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 인용한 말인데, 책장 말미에 나오는 역자의 글도 새겨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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