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 설우특선 5
미우라 아야꼬 지음 / 설우사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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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꼬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몰라도 문학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빙점'이라는 소설 제목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대체로 내가 대중문학이 아닌 세상에 인정받은 권위 있는 문학작품들을 주로 읽은 시기가 중학교 시절이었다. 그러다 판타지 소설에 물들었다가 다시 팬픽, 인터넷 소설, 대중문학 등에 빠져서 좀 멀어지기는 했지만 한 때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로 '빙점'을 꼽았던 적이 있다. '빙점'을 통해서 미우라 아야꼬라는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읽게 된 것이다.

'빙점'을 읽어 본 사람은 미우라 아야꼬가 가지고 있는 사상에 대해 짐작할 것이다. 그녀는 기독교도이고 '빙점' 또한 기독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무신론자이거나 기독교가 아닌 사람은 그런 점에서 거부감을 가질 수 있겠지만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저쪽으로 치우고 소설 그 자체를 읽어본다면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 또한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말하자면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난 독실한 크리스천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비(?) 기독교도라고 하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종교는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있고 이래저래 신앙에 대해 여러 가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다. 각설하고 요점을 말하자면 미우라 아야꼬는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을 썼지만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인간 본래의 감정, 삶에 대한 성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기에 난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을 꼭 추천하고 싶다.

'설령(雪嶺)'은 제목처럼 일본 홋카이도의 시오모리 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아직 우리나라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을 그 시절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한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의 실화를 미우라 아야꼬가 소설화한 것이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그 시절에 철도원이었던 기독교인 나가노 마사오 씨는 시오모리 고개를 오르다 문제가 발생하여 뒤로 떨어지게 된 열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떨어지는 열차를 자신의 몸으로 막았다. 나가노 씨의 희생으로 인해 열차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 시절, 기독교를 경시하고 두려워하며 배척하던 일본인들은 나가노 씨의 희생을 계기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나가노 노부오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서 시오모리 고개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기까지의 일을 써 내려갔다. 

나가노 노부오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그 시절의 다른 일본인들처럼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죽음, 친구 요시가와의 동생인 후지꼬와의 사랑, 어느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난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여 올바르게 살려 애쓰다가 마침내는 이 세상의 한줄기 빛이 되었다. 

나가노 노부오라는 인물은 확실히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경건한 인물이다. 정말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곧고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또 친구 요시가와,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 후지꼬를 비롯한 마음 사람들이 훌륭하고 고결하게 그려진다. 작가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을 깨끗하게 그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주인공은 기독교에 입문하지 않고 기독교를 막연하게 싫어할 때조차도 외곬수라고 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깨끗이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가노 노부오는 후지꼬가 병으로 죽어갈 때, 다른 중매 자리도 거절하고 그녀를 몇 년 동안 문병하며 기다린다. 기독교에 입문하고 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동료를 위해 후지꼬를 떠나 직장까지 옮긴다. 비록 그 동료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자신을 매도할 때조차도 동료를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등불이 되어 주었고 마지막에는 빛이 되었다. 현실에서는 없을 정도로 주인공을 미화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 작가로서는 있다고 말할 것이다. 주인공의 원형인 나가노 마사오 씨와 작가의 자서전인 '길은 여기에'서도 나오는 자신의 소꿉친구 마에까와 다다시 씨를 합쳐서 주인공인 나가노 노부오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여기에'의 이야기도 나중에 하게 되겠지만 정말 마에까와 다다시 씨도 노부오 마사오 씨 못지 않게 훌륭한 분이었다. 한때 일본 사람들은 '길은 여기에'를 읽고 난 후, 마에까와 씨를 본받고 싶다고 작가에게 편지도 많이 보냈을 정도라고 한다.

'설령'의 마지막을 읽고 난 후,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 소설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려는 작가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전편에 걸쳐서 작가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만약 '빙점'을 읽은 사람이라면,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설령'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단지 기독교 신앙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던 '나가노 노부오'라는 한 인간의 짧은 생애를 감상한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봐 줬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후지꼬와의 결혼을 앞두고 죽은 주인공을 시오모리 고개에서 추억하며 우는 요시가와와 후지꼬의 울음을 끝으로 이 작품은 끝이 난다. 나도 얼마나 슬펐던지. 그러나 주인공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끝이 나지 않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고 후지꼬가 결말에서 주인공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주인공을 질투하던 동료(이름이 기억 안 나지만)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을 본받으려 한다.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은 이것을 종교 소설이 아니라 한 인물의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끝으로 나 또한 나가노 노부오, 또는 나가노 마사오 씨의 깨끗한 마음과 경건한 정신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단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정말 당장 죽는다면 누가 내 죽음을 그렇게 슬퍼해 줄 것인가, 내가 세상에 남긴 게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의 유서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나가노 마사오 씨처럼 나 또한 지금부터라도 마음 한 구석에 내 자신의 유서를 지니고 다녀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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