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대의 부부, 조지프와 셀리스가 바닷가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알몸의 시신으로 함께 발견된다. 

스산하기는 해도, 낭만적인(!) 상상을 잠시쯤 할 수도 있으련만, 그럴 틈은 그닥 주어지지 않는다. 


시신이 부패되어 가는 과정이 자세히도 묘사될 땐 메리 로취의 <스티프>를 보는 듯했다. 

살아날 가망이 없는데 잠시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죽음을 실감하는 조지프의 모습은 한층 더 절망적이다. 

죽음은 미화되지 않는다. 

"그들의 인격은 피처럼 흘러나와 풀밭에 쏟아졌다. 세상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살이었고, 우리는 살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기일 뿐이다."


그들은 소지품을 노리는 노상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안정적이고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던 동물학자 부부가, 사냥하듯 약탈을 즐기는 인간에 의해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폭력에 익숙해져야" 한다던 셀리스의 강의는 의미심장하다. 이런 폭력이 아니었음은 분명함에도.

견고해보이는, 좋게 말해도 나쁘게 말해도 어떤 변화도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상이, 막되먹은 양아치 한 명 때문에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허무하고, 참담하다. 

그러나.. 이 허망함도 큰 그림으로 보자면 자연의 섭리일 뿐. 

"과학자와 설교자가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생명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복제되고 분해되기 위해 존재할 뿐, 분명 아무 의미도 없다. 가혹한 진실."

"동물학자들은 자신들의 주문을 갖고 있었다. 변화는 유일한 상수다. 우주에서 안정되거나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멸과 성장은 동의어다."

"톡토기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가?"


살해당하기 전을 거슬로 올라가면, 낭만적인 구석을 찾을 수 있을까. 

이야기는 담담하고 건조하게 죽음 직전의 시간과 그들의 삶을 반추한다. 

조지프에겐 그들의 첫 섹스 장소로 돌아가 다시 그 일을 실행하고 싶다는 나름의 낭만적(!)인 계획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만,

이 또한 씁쓸하다.

셀리스는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 상대의 감정을 해치는 것보다 양보하는 편이 나"으므로, "체념하는 기분으로" 남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곳으로 향했을 뿐이며, 그들의 계획은 한편의 희극처럼 우습게 끝나버린 와중에, 꽝! 살인자의 화강암이 내리쳐진 것이다.


조지프의 그 장소 선택 또한 사뭇 잔인한 구석이 있다. 이런 동상이몽.

30년 전, 연수원이 있던 그곳에서 그들은 화재로 한 동료를 잃었다. 늙어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페스타. 

셀리스는 자신이 불 위에 올려둔 냄비나 무심하게 방치한 담배 한 개비가 그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왔다.

그녀는 경찰관과 죽은 페스타의 부모에게도 되풀이해서 그 사실을 고백했다. 

셀리스는 그녀를 만류하던 "조지프의 손끝을 평생동안 증오했다."

그녀는 그 장소를 찾아가려는 열의에 불타오른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셀리스는 동료 교수의 자살을 보며 어쩌면 그 죽음이 더 낫다고 생각했었다. 

"노화를 통해 아주 조금씩 죽어가는 것"보다는 자살이 낫다고. 자살은 그를 노년에서 구해주었으니 신(新)진화론적이라고.

조지프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늙어 통증에 시달리는 노인이 되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바람에 가깝다는 아이러니. 바로 그 나이듦. "그는 꿈속에서 가장 음울한 소망을 실현한 셈이다."

시신을 직접 만지고 처리하는 경찰관들에게 그들의 죽음은 월급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는 불쾌한 일일 뿐이다. 

"희망이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자연계에서는, 그들의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다. 풀잎은 다시 일어서고, 겨우 아흐레만에, 살인 사건 현장에 "뿌려진 생명과 사랑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자연계가 홍수처럼 되돌아왔다. 우주의 화려함이 되돌아왔다. 모래 언덕에 잠시 머문 조지프와 셀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 속에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풀의 활기 찬 속삭임을 북돋워 줄 뿐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한낱 자연의 섭리일 뿐일까, 일일이 신경쓸 필요도 없는. 글쎄.   

이야기의 한 축으로 등장하는 그들의 딸 실비가 있다. 

부모로부터 도망쳐 "내키는 대로 교양없이 살아가는 자유"를 힘들게 쟁취했던 그녀, 부모의 실종 소식이 성가시다.

시신을 확인하기 직전 그녀가 느낀 안도감. 그러나, 물론 즐거움이 아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이 위안이 되"는 아이러니. 

실비가 목격한, 어머니의 발목에 닿아있는 아버지의 손가락은 실비의 가슴에 사랑을 채운다. 

실비는 짧은 인생이 줄어드는 가운데, 남은 날을 낭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부모의 죽음은 그녀의 시작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내가 생각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실비는 계획을 세울 것이다. 화려한 날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죽음이 자연의 일일 뿐이라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이기적 유전자의 열일이건 뭐건 간에, 살아남은 자들의 인생을 뒤흔드는 일일 뿐.

그러니 나의 사후 장기기증보다, 내 가족의 장기기증이 더 말하기 힘들다. 일단 생각하기가 싫으니까. 

짤막하게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스스로 무신론자임에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견딜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고 한다. 작가의 집필 배경 중 일부를 옮긴다. 

"죽음의 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가혹하다. 그 가혹한 진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은 무엇인가? 인생 자체는 아름답고 사랑에 넘치고 초월적인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존재하지 않는 영원에 자신을 파묻지 않고, 인생을 최대한 살아간다. 영원은 없어도 우리는 사랑과 기억과 경험을 세상에 남기고 죽어간다. 그것은 날마다 빛이 바래 가지만, 짧은 동안이나마 우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사랑을 받는다.

 이 작품은 또 하나의 거짓된 구원일지도 모른다. (...중략...) 무신론자가 과학과 자연계에서 초월성을 추구하면 새로운 세기로 가는 새로운 타입의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다."


실비가 찬장에서 아버지가 모아둔 자신의 젖니 열아홉개를 찾는 장면은 다소 감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먹먹하도록 훌륭한 작품이었다.

배변활동 때문에 먹는 것에 신경쓰는 것 또한 우리네 일상 아니겠나. 죽음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 

자연의 섭리건 말건, 나는 나와 내 곁의 당신들의 삶이 소중할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