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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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중, 요즘은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온 사람이 둘 있었다.

제목만 듣고는, 둘 다 왜 그런 무서운 책을 읽냐고. 

덕분에 저자가 말하는 자살이 터부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새삼 확인했달까. 

오해다. 전혀 무섭지 않다.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지적이고 유희적이며, 이성적이고 감성적이다. 

매우 만족스럽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정몽헌 회장의 자살을 계기로 자살을 화두로 삼게 되었다고 밝힌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이 자살로서는 훨씬 완벽해 보였다. 생활고에 떼밀려, 혼란스런 마음의 벼랑 끝에 섰기에, 복수하기 위하여, 또는 우울증의 끝에 택해지는 자살들에 비하여." 


우연히 같은 자리에 있어 함께 그 사건을 접한 "병색에 찌든 얼굴과 가난한 외양"을 한 아낙은, "에유~ 쯧쯧!"하고 혀를 찬다.

"모든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혀를 차며 동정할 권리를 가진 것인가."


저자는 도처에 널려있던 자살을 떠올린다.

"1986년의 봄에도 많은 어린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것. 

"인간들은 더 강하고 깊게 서로 연결돼 있었던 듯하다. 타자들의 가난과 죽음이 나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였던 듯하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선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5월'을 넘어 살아내기가 어려웠다. 자기 자신이라도 내던지고 공격해 세계의 비참과 불의에 작은 생채기라도 내고 싶어했던 듯하다." 

누군가는 세상에 소리라도 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데, 그 세상의 사람들이 이 죽음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저자는 자살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자살을 주변 사람들에게 시사하거나, 토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살자는 최후까지 구원을 기대한다."

"누구에게나 삶이 딱 한 번이듯, '죽음'도 딱 한 번인 것이다. 그런데 이 어려운 타자의 '딱 한 번'에 우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이란 우리네 삶과 사회의 한계 자체"라고 짚고, 관심을 촉구한다. 

"직접성을 잃고 신자유주의의 효율에 '저당잡힌 삶'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믿기에 이런 글을 쓴다"고. 


아래의 문장으로 저자의 논지를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정몽헌씨의 자살이 좀더 '자살 그 자체'에 가까운 것은, '생계형 자살자'의 죽음이 타살로서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자살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어서 죽는 생계형 자살이 진정 자살일까. 

열녀를 칭송하는 사회, 정절을 잃거나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어야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생명이나 인권은 '정절' 앞에서 한낱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자살이 순수한 자살일까. 


책에 의하면, 2012년 한 해 자살자는 14,779명, 하루 40여명 꼴이라고 한다. 

뼈아픈 말, "사실상 우리 모두는 자살생존자다."


죽음, 특히 자살을 터부시하는 우리 문화에서 우리는 자살에 대해 무지하고, "무지와 기피는 자살을 방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고로, 자살을 연구하는 것은 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이야말로 우리 사회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살아 있는' 비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곳이 아귀지옥임을 말해주고, 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가해를 대속하는 존재라고. 


국가는 자살의 '원인'을 정신질환 같은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전체주의의 속성과 관계가 깊고, 박정희정권 역시 자살 통계를 포함한 각종 국가 통계를 비밀문서로 분류하고 통제, 은폐했다고. 

지금의 한국은 자살률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자본과 시장이 국가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책은 방대한 통계와 역사적 자료들은 물론 문학적 텍스트들을 활용하고 있어 매우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이성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수입된(!) 정사(情死)가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의 표징, 즉 '연애의 시대'를 드러내는 기능을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60년대까지 드물지 않게 등장했던 정사 및 실연자살은, 이제 드문 일이 되었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계몽되고 경제적 독립성이 커진 여성이 결혼(제도)이 가진 모순을 통찰하게 되었으며, 특히 신자유주의가 연애와 결혼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남녀관계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자체를 시작하지 않게 하므로, 정사와 같은 극단적인 일은 애초부터 차단되는 셈이라고. 

70년대까지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써왔다는 '정사'라는 단어 자체가 지금은 사어가 되다시피 한 것도 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현재 목도하는 자살의 모든 '이유'와 양상이 1910~20년대부터 본격화되고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노동 능력이 없거나 최하층 소속의 사람들이 곧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는 성격의 자본주의였던 듯하다."

"요컨대 조선의 자살자와 아사자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살자와 아사자는 또한 다 같은 "자연법칙의 희생자"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문명'이 아니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일종의 '자연'인 것이다."

또한 조선의 자살률 증가를 조선총독부가 '문명화', 즉 문화 진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했다는 통탄할 만하다. 

지금도 그런 식의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꺼림칙한 마음이 든다. 

저자는 "'성장'은 '자살'과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이나 '자아존중'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통계와 자료를 들어 설명한다. 성장만이 우리를 구원할 진리라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싶다. 

"사회학자 정승화가 말한 것처럼 박정희의 근대화 개발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1960~70년대의 "개발독재 시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았던 '절망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곧 '아노미적 자살'의 개념인데, 박정희 통치 연간은 일종의 사회적 '위기' 국면이자 인간적 삶의 '비상 사태'였던 것이다. 오늘날 사회과학은 그것을 '압축성장'이라는 부드러운 말로 불러준다."

"성장은 물론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인가'가 이슈일 때 성장은 진정으로 의미있다. 결국 문제는 정치적 주권과 계급관계일지 모른다."

"자살과 경제 문제의 '최종심급'에도 결국 '정치'가 있을 것이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저자는 자살자들이 생명을 존중하지 않거나 건강한 가치관을 갖지 않은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은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현상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실질적 대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가 우리는,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죽지 않고 죽음을 당한다." 


저자의 논지만을 파악하자면 이렇게 긴 지면은 필요없겠다 싶기도 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국문학과 교수의 사회 현상 바라보기라. 

문학이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지, 다시 사회는 문학을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해 퍽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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