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과 의사의 아내이자 취재기자인 이사도라는 남편 베넷과 함께 빈에서 열리는 정신과학회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매혹적인 남자 에이드리언을 만나 광기와 같은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안전을 상징하는 베넷, 열정을 상징하는 에이드리언을 두고 고민에 빠지는 이사도라. 

다른 남자를 갈망하며 남편과 있든, 스스로의 열정과 남편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하든, 그녀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녀의 갈등과 선택, 그 이후.

그것을 큰 축으로 하되,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발랄하고 경쾌하게, 도발적으로 쏟아진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결혼관, 페미니즘, 가족, 작가로서의 사명감 등. 


이야기는 시종일관 퍽 유쾌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넘쳐나는 유머와 유쾌함은 이 책의 덤일 뿐. 

핵심은 삶을 돌아보는 진지한 고찰에 있다.


에이드리언은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헛된 약속이나, 달콤한 감언이설일랑 없다.  

"나하고 여행을 떠나는 거야. 나는 유럽을 발견하고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제 사랑 타령 그만하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보는 게 어때?"

"당신 삶의 그 위선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겠어. 정절이니, 일부일처제니 하는 헛소리와 수백만 가지의 모순 속에 살면서 남편 품 안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재주 많은 어린애처럼 살면서 자립할 생각은 절대 안 하잖아."


첫번째 선택은 에이드리언. 

그와 함께 하는 모험을 감행한 뒤, 그녀는 행복할까?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가 된 기분이라니, 말 다했다. 그것의 핵심은 목숨 구걸이고 종속적인 운명 아니었던가.


예상되듯, 페미니즘은 책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모든 매체와 광고와 별자리들마저 합세해 여성들에게 심어주는 구원환상.

"아이큐가 170이건 70이건 상관없다. 여자라면 누구나 세뇌당한다. 단지 덫의 생김새가 다를 뿐이고 말이 조금 더 세련되어질 뿐이다. 그 말속에서 여자들은 여전히 사랑에 굴복당하기를, 한눈에 반하기를, 정액을 뿜어대는 거대한 페니스로 채워지기를, 거품목욕, 실크와 비단 그리고 물론 돈을 욕망한다."

열여섯에 진즉 삶의 지향점을 결정한 똑똑한 소녀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찾는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세상은 편견으로 공고해진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의 성차별적이고 편견으로 똘똘 뭉친 언행들은 도처에 널렸다.

그것이 상호모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말들로 이뤄져있더라도, 여자들은 그것에 스스로를 가둔다. 

"조금씩, 조금씩, 여자들은 여자에 대한 그런 편견들을 믿기 시작한다. 결국 그런 편견의 그늘에서 수세기동안 살아온 여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알지 못하고 그 어떤 일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의 그러한 우유부단함을 조롱하고 그 모든 걸 생물학적인 문제, 호르몬 문제, 생리전증후군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약점을 공격한다."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라고, 우리와 상관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완전히 부정할 수 있을까. 


진정한 자유와 쾌락을 주창하던 에이드리언은 결국 글감과 배신감만 주고 떠난다.

혼자가 되고, 그녀는 깨닫기 시작한다. 

"나의 모든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건 바로 혼자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페미니즘을 주창하면서도, "남자한테 사랑받지 못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왔음을.


그러나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을 향한 비난은 접기로 한다. 

그것 또한 스스로에게 충실한 방법이었음을,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처였음을 받아들인다. 

주장은 더욱 선명해진다. 

"다른 사람은 결코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완성할 힘이 없을 때, 사랑을 찾는 건 자살 행위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자기희생 따윈 이제 관심없다.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빌린 날개들은 내가 필요로 할 때 붙어 있어주질 않았다. 아무래도 내 날개를 길러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결혼에 대해, 환상의 커플에 대해 그녀가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두 사람의 결합은 영혼의 틈을 서로 메워 주고 그로 인해 우리는 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의 응석을 받아주고 서로를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두 사람. 단지 그런 결합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결혼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결혼은 이 무정한 세상에서 단 한명의 진정한 친구를 갖는 것이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 될 듯. 

나로선 의지와 의존이 다르고, 쌍방의 결합과 일방의 종속 역시 완전히 다르므로, 결혼과 독립이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상호 배타적 존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에이드리언과 헤어진 이사도라는 남편 베넷을 찾아가고, 그와의 재회 직전에 책은 끝난다.

나로선 남편에게 돌아간 것이 그녀가 안정을 찾아, 편견 속으로 복귀하는 거라고 해석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가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더이상 종속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는 그녀의 선언은 이행될 것이므로. 

당당하게 사랑을 찾아가는 것 또한 내 삶을 쟁취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 아니겠는가.


그녀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중에서도 "문득 내가 강제수용소에서 태어났다가 살해된 유대인의 유령 아닐까 하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훗날 극복했지만 지나온 어느 한 때, 그녀는 결백을 주장하는 독일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들의 위선이 역겨웠다. 차라리 터놓고, 우린 히틀러를 사랑했다고 털어놓았더라면, 차라리 인간적이고 정직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어쩌면 용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의 거짓 앞에, 그녀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고는 확장된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 자신에게 정직할 수 없다면 호르스트 앞에서 큰 소리 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물론 그와 나의 직무태만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본질은 같았다. 내가 쓴 글로 나 자신의 정직함을 증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의 글이 정직하지 않다고 화낼 수 있겠는가?"

작가로서의 소명을 깨닫는 과정이 놀랍고, 이 책이 고맙다. 


전세계 어디서나 모녀간의 애증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과 증오는 너무도 심하게 뒤엉켜 있어서 엄마 자체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엄마와 나. 나는 그 둘을 결코 분리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결국 종속이다. 끊어내지 않으면 영원한 고리로 연결될 뿐. 

독립과 해방은 모든 것으로부터 이뤄져야 한다. 남자와 결혼만이 아니라. 


저자는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열렬한 찬사와 날선 비난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고.

"그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작가는 오래갈 수 없다"고. 

그 정신이 좋다. 남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지 않는 것도. 스스로에게 당당하고자 하는 것도.  


그녀의 센스는, 책을 관통하는 핵심마저 "고속도로 다리 밑에 누군가 써놓은 낙서"로 보여주는 것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FEMMES! LIBERONS-NOUS! (여성들이여! 스스로를 해방시켜라!)"


<비행공포 - 에리카 종 장편소설, 이진 옮김/ 비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