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 늙은 동물은 무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앤 이니스 대그 지음, 노승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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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늙은 동물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희소한지 말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원숭이의 개체를 '어린 유아, 유아, 나이든 유아, 어린 청소년, 청소년, 준 성체, 근 성체, 성체'로 세부적으로 나누지만, 

'늙은 성체'라는 범주는 없다고. 

무려 8단계의 생애 주기가 있지만, 성체 이전만이 존재하고 이후는 존재하지 않는 것. 

늙은 동물 역시 성체의 범주에 들어갈테지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성체가 되고 바야흐로 노화를 맞이해 죽음에 더 가까워진 개체는 따로 분류될 가치도 없을까.


저자는 늙은 동물에 대한 자료를 찾기 힘든 여러 이유들을 말한다. 
동물의 나이를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 천수를 다하는 동물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식용가축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동물학자들도 개체의 진화적 측면에 보다 관심을 갖지, 번식이 끝난 동물에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번식은 진화론의 주춧돌이다. 그렇다면 노년에 이른 사회적 동물의 삶이 진화적으로 중요할 수 있을까?
진화적 관점에서는 늙어서 식량을 축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늙어서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무언가 진화적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저자의 접근 방식이다. 나로선 과연 모든 것을 진화적 관점으로 이해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진화적 측면이 아니기에 관심이 없는 부분을, 진화적 이유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가정하고, 다시 또 진화적 관점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것.
모든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관점이라. 

늙은 사회적 동물의 필요를 크게 네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노년까지 살아남은 동물은 훌륭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둘째, 번식 능력이 없는 암컷도 "중요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새끼를 키우는 등.
셋째, "일부 유전자는 나이 든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 집단 전체에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
넷째, 상당수 늙은 동물은 족벌성이나 이타성을 발휘해 친족의 삶을 개선시키고 자기 유전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서로 중첩되기도 하지만) 위의 큰 틀 안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어른 코끼리 없이 자란 코끼리들의 공격성, 늙은 동물이 가진 지혜의 효용과 전달, 경험의 축적과 리더쉽, 
침팬지 무리의 교미를 8년동안 조사한 결과, 수컷을 유혹하는데 있어 젊은 암컷은 늙은 암컷보다 조금도 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놀라웠다.
등장하는 동물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역시, 저자의 관점을 짐작하게 했다. 

늦게 낳은 새끼 때문에 고생하는 동물들의 사례도 흥미로웠고,
"클래런스는 참새로서는 고령인 12세에 뇌졸중을 일으켰는데..."
참새의 뇌졸중이라는 의외성에, 진지한 대목인데 잠깐 웃기도 했다. 내 수준을 드러내는 것인진 몰라도.
 
"스콧은 후손을 많이 둔 늙은 양이 지도자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새끼를 돌볼 때 복종 성향이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뭔가 모르게 감동적이기도 하고, 

"젊은 어미는 현재의 자식에게 상대적으로 적게 투자하고 자신의 생존과 꾸준한 성장에 상대적으로 많이 투자한다."
뜨악하기도 하고. 
'진화적 자제 가설'에 의하면, 전성기 암컷이 늙은 암컷에 비해 새끼를 방치할 가망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후 자식을 더 많이 낳을 기회가 있기 때문에.

동물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노년의 유용함이란 끝도 없었고, 책은 매우 유익했다.
내겐 의문 한 가지가 남는다.
과연 우리는 노년의 유익함을 깨닫고 이용해야만 할까. 
책은 노년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설명하고 있고, 모두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모든 도움을 전혀 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노년이라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긴커녕, 스스로를 도울 수도, 거동할 수도, 심지어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면?
그때의 노년은 어떻게 설명할텐가.

그들의 무용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왜 늙음의 유익함에 집중해야 하냐는 것. 유익하지 않은 것은 존재 가치가 없을까. 그 역시 진화적 관점인가. 
그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순 없을까. 
혹은 그들, 연약한 자들을 모두가 함께 돌본다는 우리의 인간성에 집중하면 안되는 걸까.
내 늙은 부모를 잘 공양했을 때 내 자식이 나를 잘 공양할 거라는, 그런 식의 이해관계 역시 떠나서, 
사회 전체가 어떤 이익도 노리지 않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그 사실. 
약자를 노린 범죄가 판치는 사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사회,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어떤 대가도 없이, 약자가 철저히 보호되는 사회로 변모한다면, 과연 그 변화의 가치는 미미할까. 
낭만적 공상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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