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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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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그 자체에 내재한 충동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지속된다니체의 역사구분법을 원용하면 현재는 아폴론-소크라테스적 원리가 한계에 이르고 디오니소스적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그리스 인민들이 이룩한 신화세계의 기획으로그들은 살아갈 수 있는 가상적 안전지대를 확보했다이처럼 신()이란 현상은 그 최초 설정단계에선 집단적 인간의 욕망이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물과 같았다신의 세계를 통해 그리스 인민들은 자연에서 접하는 공포와 전율에 의미를 부여하고스스로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엄숙하고 절제된 그리스도교의 신적 형상이기보다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을 지닌 신들의 행태를 거울로 비추어 보며그리스 인민들은 자신의 인간적 삶에 안도한다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신적 존재를 자처하고이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속성을 지닌 이른바 영웅적 존재의 비극적 이야기로 자극된다.


하지만 신을 조립한 설계자들의 후예는 그것의 설계의도를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신은 불가해한 세계의 관념과 이상이 뭉쳐 빚어진 거대하고 단일한 관념으로 숭배된다신은 의미의 과잉이다신앙은 미지의 것을 해명해주는 유일한 창구로 기능하고인간의 유아적 의존성을 부추긴다이제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비로소 인류는 유아기적 단계를 벗어나 청소년이 되었음을 실감한다그리스 신화에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신인 우라노스를 살해하려는 거세 모티프가 있다거세는 곧 생식력창조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아버지-신으로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거세 행위는창조 능력을 가진 자만이 신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상징과 같다.


아버지를 거세하고 최고신이 된 크로노스와 달리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자신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닮았다다윈으로 알려진 새로운 세계는 인간의 구세계를 난도질했고이에 인류는 경악한다도대체 왜인간은 여전히 아버지-신 앞에 엎드린 어린아이와 같으며자신이 이미 생식능력을 갖춘 자로 성장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이것이 근대의 위기이며염세주의 혹은 허무주의의 도래인 한편인류의 사춘기적 홍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설계자로서 자각했던 시절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스스로 최고신에 오른 것처럼제우스의 모사 혹은 현현(顯現)인 그리스 인들은 이미 인간 스스로 세계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예감했다이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탁월한 이론 덕분에 다시 증명되었고 니체의 정당한 선언으로 환기되었다인간은 자신의 창조능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표출함으로써 당당한 삶을 구가할 수 있다다윈은 인간과 동물이 같은 기원에 있음을 알아냄으로써인간이 설계한 신에 의한 안락한 종속 혹은 자발적 노예상태에서 인간을 구출했다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뤄낸 구원인가인간이 설계자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수 있을 무렵그럼에도 반신반의하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사자후를 내뿜는다두려워하는 인류여그대는 의심하지 마라인간은 신을 만들고 또 부수는생성과 파괴의 이중적 충동을 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절대적 인간 긍정의 정신을 찬양하고이를 부정하고 의혹의 늪에 침잠하려는 교활한 욕망을 분쇄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스스로 결박 당한 신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면, 22세기 이후의 세계는 인류가 창조하고자 욕망하는 또다른 신인 인공지능과의 대립이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신이 그랬듯 인공지능 역시 인류에 의해인류를 위해인류의 인공지능에서 기원한다인류가 신을 창조하고 범한 맹목적 오류처럼또다른 신적 존재인 인공지능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아니면 새로운 윤리를 창안할 것인가가 관건이다인류는 이처럼 생성과 파괴의 우주적 원리를 내재한 창조적 존재로써그 쾌감으로 삶을 지속시킨다신이든 인공지능이든 인간은 자신의 대용물을 섬기든지 혹은 부리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한다.


인간은 그가 창조한 예술작품으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할 뿐이다그러나 결코 예술작품은 인간 그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없다그는 그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피조물은 조물주 생()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피조물에 의존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그는 단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다시 부술 권능이 있음을 영원히 자각하는 것으로 족하다조물주는 피조물에 개의치 않는다그는 피조물의 황홀함을 물리치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홀연히 길을 떠난다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인민들은 정녕 이런 일들을 했던 것인가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예술 작품화한 것이 그리스 비극일까?


그리스 비극의 원천은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 근원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펼쳐낸 것에서 비롯한다세계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다는 근원적 진실이러한 고통은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힘을 외부에 투사할 때그에 맞서는 강력한 반발력을 지각할 때 실감하게 된다그 고통의 끝에는 죽음이 자리한다이를 지켜보며 그리스 인민은 망연함에 전율한다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차이는 실로 명확하다양자 모두 세계의 실상이 고통임을 간파했지만쇼펜하우어는 이를 통해 의지의 소멸을 주장한 반면 니체는 정확히 그 반대인 강력한 의지의 배양을 주창했던 것이다그럼 그리스인들은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니체의 스승이 그리스인들인 만큼그들에게는 유별난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폴론적 가상즉 의미화를 통한 창조의 능력이었다이것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스스로 납득하게 만들어 삶을 살아갈 만한 세계로 재창조하게 한다이제 그들에게 전율로 다가오던 세계는 욕망의 영역으로 변모한다실레노스의 지혜는 무()를 향한 의지에서삶을 향한 열망으로 전도된다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창조한 올림푸스 신들의 세계이며아폴론적 정신이 지배한 서사시적 그리스 인민의 질서다그러나 이것은 디오니소스적 진실을 그저 잠시나마 가리고 있는 것일 뿐가상은 결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디오니소스적 진실은 고통과 죽음이다그것은 곧 개체인 나 자신이 이 우주와 동떨어지지 않은 존재임을 상기시킨다죽음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괴로운 일이나우주적 관점에서는 우주로 돌아가는 합일을 의미한다그래서 디오니소스적 속성은 개별성을 극복한 망아(忘我) 상태개체에서 벗어난 무아(無我)의 경지를 가리킨다디오니소스 제례에서 행해진 광란적 도취를 통한 경계의 철폐예컨대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지 않는 위계의 무화인간적 질서를 무시한 집단 난교 등은 이러한 짐승과도 같은 원초적 욕망을 표출한다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속성만으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뚜렷이 부각될 수 없다.


이렇게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단독으로는 저마다 한계가 분명하며그들이 오랜 세월 투쟁을 거듭해 온 것 또한 도무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특징에 기인한다그런데 만약 이 두 속성이 결합을 한다면그들이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장엄한 결혼식을 올리는 사건이 벌어진다면그것은 세계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의미화 함으로써근원에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신기원의 창조리라나는 니체가 가리킨 이러한 창조의 순간을 그리스 인민이 도달한 비극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요컨대 그리스 인민은 그리스 비극 예술의 창조로써세계의 디오니소스적 본질에 접속하는 동시에 그것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구현한 것이다이제 그리스 인민은 더 이상 세계의 본질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생산한다오히려 세계의 본질로부터 더욱 강한 삶의 추동을 느끼게 된다나는 그러한 절정에 도달한 인간상을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에서 강렬히 예감한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에 등장한 두 가지 인간 유형을 비교하며 제시한다그들은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적 인간과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다이들을 통해 그리스인의 이른바 강건한 명랑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자이다불가해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정도로 지혜의 오만함에 사로잡힌 그는자신의 운명에는 한없이 무지하고 무력했다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몸을 섞는 가혹한 운명에 절규하여도 그는 결코 운명에 의해 파괴당하지 않는다눈먼 오이디푸스는 광야를 떠돌며 테세우스의 나라에 정착하여 새로운 신탁을 부여 받는다이제 그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서안녕을 가져오는 존재로 변신한다고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자그것이 반신반인 즉 영웅이다여기서 나는 문득 인간적 고뇌는 디오니소스적 속성이며그것을 극복하는 신적 힘은 아폴론적 속성이라 느껴진다그리고 그것이 합쳐진 존재가 반신반인의 영웅이며바로 비극으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비극의 주인공이 일상적 존재가 아닌 영웅적 존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적 영웅은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다그는 한없이 수동적인 영웅이다자신의 운명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통받고 그것에 단지 파괴되지 않을 뿐이다.


운명에 결코 파괴되지 않는 인간도 굉장하지만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인간형이 있으니 그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이다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주인공인 프로메테우스는 신 앞의 단독자(單獨者)반항적 인간의 원형이다신에게 맞서는 위대함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위대함은 고통을 뜯어먹고 자란다반항적 인간은 곧 예술적 인간과 동일하다예술가는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다그는 오직 자신의 디오니소스적 심연만을 응시할 뿐이다그리고 그 심연을 아폴론적 언어의 가상으로 표현해내는 스스로를 오롯이 관조한다여기서 아폴론적 속성과 소크라테스적 속성을 잠깐 비교하면둘은 닮은 듯 다르다아폴론적 속성이 타락하고 변질한 극단이 소크라테스적 이론형 인간의 모습이라 생각한다아폴론적 충동의 근본은 관조에 있으나소크라테스적 특징은 논리와 이성에 의한 해명이다소크라테스적 인간은 오직 아폴론적 가상-표상하는 능력을 논리-이성적 설명을 위한 도구로 부릴 뿐이다그래서 둘은 닮아 보이나 다르다.


프로메테우스의 파멸적 예언에 제우스 신은 전전긍긍한다신조차 불안에 떨게 만드는 저 반항적 인간이란그는 저항했고 그로인한 벼락을 맞아 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이렇게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시선에서 봤을 때범죄를 저지른 자다그는 자발적으로 신적 질서를 범했으며가혹한 천벌도 그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다인간은 이런 비극적 영웅으로부터 전율하고 감화되며문득 자신이 이 거인을 닮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그렇게 한 인간은 비극으로부터 자신에게 내재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모습을 생생히 감지한다.


오이디푸스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인간형과 대조되는 유형으로 니체는 셈족의 신화를 거론한다이미 여기에 니체의 반()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배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아담과 이브라 하는 호기심 많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표출한 자들그러나 넘지 말아야할 신적 질서를 침범한 그들은 신으로부터 죄를 받는다이른바 타죄(墮罪) 신화 혹은 원죄(原罪) 신화로 불리는 문제이다그들은 너무나도 온순하고 무저항적인 태도를 고수했다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마치 노예들처럼호기심은 세계의 본질즉 고통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다고통을 살짝 들여다본 그들은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그리고 감은 눈 속에 펼쳐지는 낙원으로 본질을 전도한다그들이 프로메테우스적 존재였다면니체는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을 자처하며 이러한 전도된 세상에서 단독자로써의 전투를 감행한다그는 소크라테스의 유혹에서 비롯해 셈족으로 이어져 내려와마침내 거대한 무리를 형성한 대중의 저열함에 선전포고를 한다그는 이 전쟁의 사령관이며선지자이고절벽의 프로메테우스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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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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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아주 오래  어느날..

천상에서는 하느님과 악마의 담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을 둘러싼 선악의 한판 내기가 이제  시작된 것이다.

정신은 드높으나육체의 한계에 얽매인 그의 이름은 바로 닥터 파우스트.

소싯적 베르테르라는 예명의 장본인이라는 (?) 지닌 그의 레전더리 스토리가  펼쳐진다.. 쿠궁.


.. 어디서 많이  느낌이.. ㅋㅋ



부활한 베르테르

 

젊은 베르테르가 자살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때문에 당시 독일에서 실연당한 숱한 절므니들이 동반자살을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아놔.. 그런데 말입니다사실 베르테르가 멀쩡히 살아남았다면..? 폭풍격정과 질풍노도의 성정을 지닌 그가 살아남았다면? 5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나타난 베르테르가 사실 닥터 파우스트였다면오오..


닥터 파우스트로 다시 돌아온 그는 어떻게 변했을까그러기 위해선 먼저 젊었던 베르테르의 이야기를 다뤄야 겠으나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ㅎㅎ 일단 우리 주인공의 행적부터 더듬어보자.

 

 

악마와의 조우


파우스트는 젊었던 시절의 버릇을 못고치고 늙어서도 자살 시도를 한다. 온갖 관념으로 머릿속은 가득찼음에도, 가슴은 텅텅 빈듯한 공허감에 시달렸던 것이다다만 이번에는 권총이 아니라우아하게도 플라스크에 담긴 약물을 원샷하려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실패한다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타락을 영접하기 위해서였던가!?  타락의 길을 함께 하기 위한 거물급 인사가 등장한다.


문학 작품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네임드 악마라 할만한 메피스토펠레스가 그였다.

 

둘의  만남은 산뜻했다푸들로 변신한 메피스토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파우스트를 유혹한다.

귀엽고 약하고 순진한 애완견의 대명사라  푸들이 실은 악마라니악이란게 그렇게 방심 속에서 스스로 피어나는게지.

악은 어디 숨어있다 우리를  덮친다기 보다우리 자신이 '어서옵쇼~!' 때만 찾아온다드라큘라 같은 애들도 초대를 받아아먄 들어올  있고메피스토도 점잖게 3번은 불러줘야 비로소 방문하니 ..

 

여기서  유명한 악마와의 계약이   방울로 날인선포된다예전에  들은 바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무시무시한 느낌이었는데, 막상 책의 분위기는 꽤나 경쾌하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계약은 실로 파우스트에겐 새로운 활로였으니!

행일지 불행일지는 오직  길을 걷는 자에게 달렸음을..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이제는 길을 떠날 .

이렇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의 엉망진창 종횡무진 버디 무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메피스토 눈에서  떨어지네.. 둘이 사귀는줄.


여정을 앞둔 파우스트의 인상적인 구절로 글맺음 합니다.

 

나는 도취경극히 고통스러운 쾌락,

사랑에 눈먼 증오통쾌한 분노에 빠져 보고 싶네.

 마음은 지식의 열망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떤 고통도 피하지 않을 걸세.

 인류에게 주어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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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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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를 읽는 와중 귓가에 관현악과 교향곡 따위가 어른거리는 환각에 도취된다 운율에서 오는 리듬들썩거리게 만드는 리드미컬함.. 오오쿵짝쿵짝 북소리가 들리는  하구나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며 천상과 하계지옥을 내집처럼 드나들고 북방의 브로켄에서 남방 그리스까지 세계의 모든 마녀와 괴수정령들을 만나도다.

 

 환상적인 파우스트&메피스토펠레스의 모험은 '참으로 아름답구나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도로.. ^^


 요괴들의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아주 그냥 귓가에 종소리가 뎅그렁뗑그렁 울린다ㅎㅎ


파우스트 2부를 덮으며 당혹감에 휩싸였다천하의 악당인 파우스트가 구원받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이런 마음을 잠시 달래며 생각해보다새삼 흥분하고 있는  자신이 희한하게 느껴졌다나는  구원받은 파우스트를 보며 흥분하는 것일까이것은 착한 자는 복되고악인은  받아야 한다는 모종의 당위가 나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리라하지만 실제 세상이 어찌 그렇게 돌아가는가오히려 정반대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임에도인간의 내면 속에는 선악의 절대 원리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원천적으로 내재해 있는지 모른다그것이 제도와 사회적 계몽종교권력 등의 외부적 세례에서 왔든 아니면 인간의 양심에서 비롯하든 간에 말이다하지만 현실세계 혹은 대자연에는 그런 인간적인 도덕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  있다맹수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데 도덕개념이 없듯우리가 살고 있는 대자연에는 도덕적 선악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이렇게 보면 도덕이란 것이 그저 인간의 자기기만적 가치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를 차갑게 바라보면인간존재의 위상이 그저 짐승 수준으로 격하되는 문제가 발생한다어차피 도덕과 선악구원 따위는 인간이 제조해낸 발명품에 불과하기에그것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그런데 말이다설령 도덕과 양심 따위가 인간의 발명품이라 하더라도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상하다인간이 정말 짐승과 같은 혹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 하더라도 짐승이 스스로 도덕과 선악 등을 창조해내고  덕분에 어느 정도 짐승에서 벗어나는 존재로 거듭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이성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이렇게 보면 인간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 창조했다 혹은 신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대한 희구는 인간이 속해있는 짐승적 요소를 탈피하기 위한 이정표와 같다수험생이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계획을 세우듯인간은 신이란 존재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존재다.


선량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에 쫓기더라도 올바른 길을 잊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입으로 인정하게 되리라. [하느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p.19


여기서 하느님의 말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으로 느껴진다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심하게 뒤틀려버린다신이 인간을 창조했기에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권력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구원이라는 표상에 벌벌 떠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했다여기서  처음 파우스트의 뜬금없는 구원에 분노했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희대의 악당이 구원받을  있는가더구나 파우스트는 애당초 하느님에 대한 믿음 따위도 없는 인물이다파우스트는 능동적 행동의 표상이다인간은 무언가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깨달아가는 존재다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희로애락과 죄악은 필연적 결과이다초반부에 파우스트는 성경의 구절을 번역함에 있어 구절부터 막힌다. [태초에 ~ 있었느니라]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 내린 그의 결론은 파우스트의 인간상과인간의 구원에 대한 괴테의 생각을 결정적으로 함축한다. [태초에 <행위> 있었느니라]. 인간은 행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행위로 인한 결과 또한 인간 자신이 온전히 짊어질  밖에 없다는 점에서 숙명과도 같다파우스트는 끝없이 악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데어쩌면 이는 인류의 역사적 행로를 상징한다고   있다인류의 역사는 죽고 죽이는 참혹함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러나 무지몽매함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기어코 살아남는 까닭은신적인 존재를 지향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을 스스로 용인함으로써 고통을 피하지 않고 나아가는 인간 행위의 전형을 보였는데어쩌면 지극히 근대적인 인간 유형으로 평가할  있다어쨌든 인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모색하고 실천함으로써 비롯한 결과를 감내하고그러한 참혹한 결과물을 딛고  다시 나아갈  있다.


사실  파우스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그러나 미워하기엔 너무나도 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에 마냥 비난할  없을뿐더러 그저 불편할 뿐이다지고의 존재를 갈망하지만그에 못지않게 애욕과 정념의 늪에 허우적대는 것이  닮았다파우스트와 나의 차이는파우스트는  데까지 가본다는 것이다고통 받아도 좋다어차피 받을 고통이라면 스스로 체험하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겠다라는 태도그로 인해 발생하는 숱한 비난 역시 안고 가겠다는 뻔뻔할 정도의 의지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그의 행위를 비난할  있고구원이라는 결론에 어안이 벙벙할  있다하지만 파우스트를  자신으로 치환한다면그때도 스스로를 쉽게 심판하지는 못할 것이다왜냐하면 파우스트적 인간은 너무나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결국 파우스트 이야기는 일상사에 치여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인간에게 가하는 경종이라 생각한다마치 너도 악마를 소환해 길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것처럼하지만  책을 어렵사리 읽고 있는 우리들 역시 이미 메피스토의 유혹에 빠진 파우스트렷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레트헨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은 구원의 핵심요소로 등장한다나는 이것을 앞서 언급한 인간이 지니고 있고 한편으로 지향하는 신적인 요소라 생각한다지고의 신이 마리아로 등장하듯여성성은 짐승의 어두운 속성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 빛이 되는 요인이다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있다는 포기하지 않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 의해 짓밟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르치기를 소망한다여기서 그레트헨과 파우스트는 인간이 지닌 양면으로 해석된다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충동에 내맡기기도 하지만또한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 또한 갖고 있다이것을 인간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화해하지 못한  측면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년간 인류문명이 파우스트로 상징되는 남성성으로의 여정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보면괴테는 이후 세계의 행로를 여성성에 걸었다고 보여진다그것은 [어머니들] 만나러 가기 직전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에 은밀히 암시되어 있다.


고매한 비밀을 밝히고 싶진 않지만   없소이다여신들은 숭고하게 고독 속에 군림하고 있소그들 주변에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공간도 없소이다그들에 대해 말한다는  자체가 당혹스러운 일이오그들은 [어머니들]이오! (파우스트 깜짝 놀란다어머니들! p.246


사탄도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고은밀하게 감춰진 [어머니들] 존재는 실로 인간에게는 수수께끼이다우리는 생성의 원천인 어머니로부터 비롯했건만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근원으로부터 멀어진다마치 파우스트와 헬레네의 자식인 오이포리온의 최후처럼 말이다 근원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파우스트의 여정은 비롯했고 끝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레트헨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이 자리한다여성성의 희구는  신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행동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형제처럼 음식을 함께 나누고 주님의 말씀 두루두루 널리 알리며 기쁨을 약속하는 너희들 가까이에 주님은 계시도다너희 곁에 계시도다! [천사들의 합창 ] p.39


천사들의 합창에서 보듯신은  위에서 언급된 행위로 구현된다 순간 인간은 신이 된다그때 파우스트의 [순간아 멈추어라정말 아름답구나 지상에서 보낸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그런 드높은 행복을 미리 맛보며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즐기노라]라는 외침은 유효할 것이다이러한 신적인 행위로 인한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은 죽음 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리라.


결론적으로 정리하면인간은 서로 상반된 의지를 지닌 분열된 존재이다그것은 화합할  없어 보이나, <행위> 통해 선악의 에너지는 통합되어 고차원으로 이동한다마치 나선형 회전처럼위에서 보면 평면에 머물러 있는  같아 보이지만옆에서 보면 사실   회전축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다. <행위>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결과가 항상 교차해서 발생한다그러나 부정은  긍정으로 가기 위한 동력이고긍정은 부정으로 가는 과정이다살아있는 이상 행함으로써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있는 유일무이한 일이 아닐까._()


우리도   없는  올림포스에 물어보라.

 누구도 아직 생각하지 못한

여덟 번째 신이 혹시 거기에 있을지 누가 알랴!

우리에겐 자비롭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신들.

 비할  없는 신들은

이룰  없는 것을 애타게 갈망하며

굶주림에 허덕이노라. [네레이스와 트리톤들]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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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극장 -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고명섭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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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세계로 번역될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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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의 탄생 -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사의 탐색, 1494-1763
김준석 지음 / 북코리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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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서 근세 유럽의 복잡한 정치적-군사적 지형도의 맥락이 잡혔다. 대단히 명료하게 서술되어, 이 분야에 관심있는 분에게 추천한다. 저자의 다른 책이 기대된다. 대북방 전쟁이나, 오스만-발칸-오스트리아 지역과 같은 동부 유럽의 국제정치사도 궁금하다. 계속된 시리즈가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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