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소설의 순간들』은 박금산의 소설론이자 소설이다. 한권의 책한테서 두 가지 다른 성질의 글의 형태를 동시에 느낀다는 것은 이 책이 가진 구성의 독특함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의 소설론은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작가는 어떠한 이론이나 주장은 최대한 삼가 한 채 ‘소설’로서 소설의 단계를 설명한다. (흔히 말하는 소설의 5단계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서 ‘위기’의 단계는 빠져있다.) 그러니 이 책의 목차는 ‘발단’ 파트, ‘전개’ 파트, ‘절정’ 파트, ‘결말’ 파트로 이루어진다. 게다가 각 파트를 소개하는 소설의 양이 일정치 않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발단에는 5편의 소설, 전개에는 9편의 소설, 절정에는 6편의 소설, 결말에는 5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의 소설에서 각 파트가 담당하는 분량의 차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발단과 결말은 짧고, 전개가 가장 길고, 절정은 강렬하되 길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면밀히 살펴보면 이렇게 다르게 조정된 각 파트의 소설들 중 하나의 소설이 여러 파트로 분할되기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발단에 있는 ‘어떤 개의 쓸모’와 전개에 있는 ‘개와 상사’는 같은 소설이다. 절정의 ‘매일 새롭게 ‘퍽큐!’’와 결말의 ‘그 남자가 국경수비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는 모르죠’는 같은 소설이고 아마 발단의 ‘정신과 상담’까지도 포함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순간들』은 구성 빼면 시체인 걸까? 그렇지 않다. 각 파트에 속한 소설이 다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이 스물다섯 편의 소설들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아닌 소설의 한 단계를 대변하는 부분으로서 존재하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수록 파편화된 조각들을 맞춰가는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는 이론 없는 소설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소한의 상황과 비유만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덕분에 ‘플래시 픽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여섯 단어(“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로 이루어진 소설을 만들어낸 헤밍웨이의 기발한 일화를 빌어 짧게 쓰겠다는 다짐을 밝히던 작가는 전개 파트의 ‘소설을 잘 쓰려면’에서 장황한 성장소설을 쓴 제자를 혼쭐내는 교수로 분한 것 같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비유는 또 어떠하냐면, 각종 운동종목에 빗대어 한다. 테니스, 야구, 서핑으로 소설쓰기와 소설의 단계를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마지막 상대 타자를 세워두고 던지는 첫 투구. 그것이 발단이다.”, “소설의 전개는 서핑에서 보드 위에 올라서는 과정이다.”, “더 이상 진전이 있을 수 없는 상태! 끝! 서핑이나 스키다이빙에서 날아가는 것!”, “화려하게 파도를 잡은 후 마지막에 파도에 먹히는 꼴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을 설정한 작가는 절정을, 승부를 지어놓고 첫 투구에 임해야 한다.” 맺음말의 제목은 ‘테니스 코트에서 소설 창작하기’이다.
이 책의 개성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소설론에 실질적인 정보를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구구절절한 일장연설은 줄인 채 딱 핵심만 짚고 실전으로 넘어가는 이 방식이 꽤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이것으로 또 하나의 소설론이 생긴 것이리라. 공을 치는 것, 서핑 보드 위에 올라가는 것, 라켓을 잡는 것. 이 느낌만 가지고 일단 글쓰기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작가는 ‘위기’의 단계를 빼놓았다고 말했다. 결국 작가는 스물다섯 편의 소설로 다져진 스물다섯 번의 실전감각으로 독자로 하여금 그 비워진 공간을 채워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