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밤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지나북스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여성 작가 '싼마오'는 에너지 넘치는 천하무적의 여성이다. 그녀가 1943년생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는데,

싼마오의 글은 79세의 할머니 세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포근한 밤>을 읽으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쓴 것인지 소설 속 이야기인지 헷갈릴 정도다. 사건의 장소도 다양하고 만난 사람들도 다국적이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도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내가 싼마오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허수아비 일기'였다. <포근한 밤>은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인데, 첫 만남보다 더 좋았고 더 빠져서 책을 읽었다. 이미 고인이 된 중국 작가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버린 책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그녀의 이야기는 책의 첫 장에 실린 '유럽 견문록'이다. 1973년 11월 <실업 세계> 92호에 실린 이야기다.

싼마오는 홍콩을 출발해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가기 위해 영국에서 비행기를 환승하게 된다. 그 당시 중국 여자가 영국에 입국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2000년대 초반에 미혼 여성이 미국에 입국하려 할 때, 매춘을 하려는 의도가 있다며 비자를 거절한 적이 많았다. 정말 믿기 힘든 말도 안 되는 경우였다. 그러니 싼마오가 영국에서 환승하기 위해 입국하려 할 때 영국인의 태도가 어떠할지는 어느 정도 상상이 갔다. 영국 이민국은 싼마오가 이미 스페인행 비행기 표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입국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며 그녀를 유치장에 가두어 버린다. 그 시대에 겁도 없이 미혼의 아시아 여성이 유럽을 혼자 간 용기도 대단하고 유치장에서도 기죽지 않고 관찰 직원들과 끝까지 싸우는 그녀의 패기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마지막에 자신을 잡아둔 이민국에서 협상을 제안했을 때에도 싼마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끝까지 요구했다. 이민국에서 그녀를 보내며 '밀입국 의도가 있어서 스페인으로 경외 추방한다'라는 서류를 만들어 사인을 요구했다.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이유를 만든 것인데, 싼마오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경내에 들어간 적이 없는데 무슨 '경외 추방'이냐며 그 단어를 빼고 '스페인행 항공권을 제공한다'라고 쓰지 않으면 사인을 할 수 없다고 이민국 관리와 대립한다. 자기주장대로 써주지 않으면 그냥 유치장에서 살겠노라며.


싼마오가 유치장에서 보여준 당당함과 이민국 관리 앞에서 보여준 기개에 정말 감탄했고 한편으로는 너무 속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아시아 여성을 대하는 몇몇 무지한 백인들의 태도에 화살을 쏘아 명중해버린 느낌이랄까.

스페인을 떠나며 자기를 보호 관찰한 로리에게 한 이야기는 더욱더 재미있다.


"돼지가 호랑이 잡아먹는 놀이 해 봤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한 놀이예요. 돼지는 나고 호랑이는 이민국이죠. 겉보기에는 돼지가 열 시간도 넘게 억울하게 잡혀 있었지만 사실 손해 본 건 당신들이에요. 돼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짐도 다 날라 주고 밥도 주고 서류도 만들고 게다가 택시비까지 내줬잖아요. 나는 공짜 관광에 견문도 잔뜩 넓히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어요. 그러니까 돼지가 호랑이를 잡아먹은 셈이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런 용기와 기개는 어디서 나온 걸까?


지금 시대에도 선진국의 이민국 공무원들 중에 몇 사람의 태도는 상당히 비합리적 면서도 기세 등등하다. 그 앞에 선 상대가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타국에서 불공정하고 불편하지만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쳤을 때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낸 싼마오는 보통 여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배우고 싶고 동경할 만한 여성이다.


싼마오는 그 시대에 우리가 지금도 여행하기 힘든 사하라 사막이나 카나리아 제도, 세네갈, 나이지리아 등에서 살기도 하고 여행도 했다.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를 자유 자재로 사용하며 살아온 여성. 스페인 남편 호세가 악덕 회사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싸우기도 했다. 국적을 떠나 싼마오의 삶은 너무 매력적이다. 그녀가 자신의 멋진 삶을 글로 남겨두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와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그녀의 글이 있었기에 싼마오를 알 수 있었다.

요즘 친구들에게 싼마오의 책을 자주 권한다. 용기 있고 도전적이면서도 약한 자를 돌보고 온정을 베풀 줄도 아는 여성 싼마오의 삶을 담은 책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여성의 삶을 엿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