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0 인생의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깊은 골에 켜켜이 쌓인 그 활자들은 나를 때로 살게 하기도 했고 살고 싶게 하기도 했다.
P.164 나의 방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책장을 바라볼 때, 수천 년 전의 인간이 남긴 말부터 지금의 인간이 그 말을 해석한 책까지 있는 광경을 바라볼 때, 나는 인간이란 죽으며 한낱 활자만을 남길 수 있는 존재임을, 동시에 그 활자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임을 상기한다.
P.170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의 관심 분야가 책장에 반영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머릿속이 책장에 꽂힌 책과 점점 닮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언제든 책에게 정신을 침범당해도 좋다는 인정이다. 책장을 들여다볼수록, 또 책장의 책을 들여다볼수록, 그 사람의 세계는 가지고 있는 책의 관심사와 비슷해진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책에 대한 소유욕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소유욕이다.
P.193 책을 많이 읽는 게 훌륭한 삶의 표본도 아닌데 잠시 좀 쉬면 어떤가. 죽어서 위인전 목록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그렇게 책을 놓고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다시 책을 집어 드는 때가 오는데, 다른 유희 활동이 다 재미없어졌다는 신호다.
P.274 우리는 왜 끊임없이 진실을 요구하면서 책을 읽는가. 그것은 삶의 진실이 때로 가상에, 거짓에, 행간에 있기 때문이다. 가상은 책 너머 현실에 유출되어 현실의 일부분을 이룬다. 우주를 이 잡듯이 뒤져보면 정말로 책에 나온 세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존재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책이 들려주는 가상으로부터 우리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그로부터 변화한 태도와 행동이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 이 발견된 책이 세상에 존재하게 됨으로써 내가 쓰고 있는 이 책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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