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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두 번째 글)
이 책이 말하고 싶었던 바는 무엇일까. 사람이란 고작 세제가 녹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고, 치열하게 사랑하고, 끝없이 갈구하며 사는 존재라는 걸까. 너무도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더더욱 소중한 것임을 알리고 싶은 걸까. 그 짧은 시간, 충분히 서로 아끼고 사랑하자는 것일까. 시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스며들 것인지 내린 결론이 비현실적일지라도 최소한의 가능성을 믿자는 것일까.
P.179 "너희 도움을 받아서 병원에 실려 갔다 온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배부른 소리일지 몰라. 그래도 흔적이 남는다고 해서 터진 자리에 바늘 한 번 대지 않고 내버려두고 싶진 않아, 여건만 허락한다면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고, 옹색한 생활의 굴곡을 감당하고 싶어. 서로 비슷한 일과 사물에서 긴장을 느끼고 그것을 이완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하고 싶어. 슬픔이나 근심의 타이밍이 서로 다르더라도 공감의 여지만은 남겨두고, 어쩌면 계산되지 않는 그 다름이야말로 함께하는 이유의 전부가 될 수도 있겠지. 같은 날 같은 시에 나란히 죽는다는 꿈은 비현실적인 낭만이지만. 적어도 서로 오랜 시차를 두지 않고 사라지는 게 좋겠어. 지금까지 말한 것들 가운데 대부분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가능성을 버리고 싶지는 않아."
P.184 봐라, 네 안에는 물리학과 생물학뿐만 아니라 화학 천문학까지 들어 있지. 너는 지금까지 사람이 밝혀낸 한도 내에서 우주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을 거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P.203 그를 온몸으로 책임질 수 없다면, 그의 짐을 나눠 지지 못할 것 같으면 그에 대해 궁금해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어림 반 푼어치 얄팍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P.249 아이가 훗날 자라 그 약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대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아이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완전히 멈출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 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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