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첫 번째 글)
명정이 짧았던 ‘한 스푼의 시간‘을 마감한 후, 곧 덩달아 물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야마는 은결의 감정이 너무도 절절하게 와닿았다. 로봇의 감정이 인간의 감정과 같은 경로와 방법으로 발현되는지는, 아니 근본적으로 감정이 발현되기는 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명정과 은결,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 사이에는 분명 함께 한 ‘한 스푼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P.51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P.68
이제 집에 가는 대로, 학원 마치고 밤늦게 돌아올 오빠를 위해 저녁을 차리라는 엄마의 당부에 고개만 까딱해 보이고 6인실을 나선다. 페인트 냄새를 풍기며 밤새 아빠의 상태를 돌볼 엄마, 평생 자기 집이란 걸 가져본 적 없는 엄마는 남의 집 다용도실을 초조하게 도색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질문을 삼키면 그것이 식도를 지나 위장에서 분해된 다음 몸 밖으로 영원히 배출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삭지 않는 밥알처럼 언제까지고 명치에서 맴도는 거 말고.

P.156
은결이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먼저 지나가는 말로라도 몸은 좀 어떤가, 다 나았는가 물어볼 것이다. 거기서 오지랖 열두 폭을 펼치는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 같으면 벌써 퇴원해도 되느냐, 더 누워 있지 않고, 그래서 그놈과 사후 처리는 어땠는지 등등, 자신들이 돕거나 책임져줄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송곳니 같은 호기심을 감추지 않으며 수선을 피울 것이다. 그날로부터 시일이 퍽 흐르긴 했지만 사람은 인과관계를 항상 염두에 두는 생물이며, 무엇보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추임새를 넣으려 애쓰는 존재다. 상대를 딱히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인사란 그런 것이다. 잘 잤어요, 오랜만, 같은 습관과는 또 다른 작용을 주고받기. 사고와 관계의 지층을 쌓아오는 동안 표면을 어루만짐으로써도 이면을 촉각하게 된 존재가 사람인 것이다.

P.157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P.169
그러니까 죄송하게도,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 인물이 대략 21인이나 등장하고 약간의 생략된 맥락들이 있어서 모든 조각은 다 맞추지는 못합니다만, 그래도 중요한 사실만은 알아들었습니다. 당신은 자리를 피하지 않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냈고, 부자유한 사람과 그 가족을 위할 줄 알면서, 동시에 다른 손님들의 권리를 소홀히 다루지 않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는 점입니다. 비록 소극적인 형태라고 하겠으나 불의에 저항하기를 그만두지도 않았습니다. 선의가 항상 보답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기에 당신은 부당한 곤경에 처했고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습니다. 그 이상 알아야 할 것이 달리 있습니까."
넋 놓고 있다가 머리채를 잡힌 듯한 표정으로 은결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시호는, 문득 눈이 마주치자 제 동그래진 눈이 떨리는 것을 들기고 싶지 않다는 듯이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다.
"너 완전 주제넘어, 뭐냐고 진짜.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말하는 건데, 선의가 반드시 보답받지는 못한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건데.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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