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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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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퐁. 핑. 퐁 -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렁그렁, 크지도 않은 눈망울에 커다란 물방울이 고였다. 펑펑, 흘러내리지 않고, 그렁그렁 고드름처럼 매달려만 있다. ‘못’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60억 인류를 생각하면서, 지구의 미래를 위한 ‘언인스톨’을 떠올리면서, 울고 있었는데도 그것들을 흘려버릴 수 없었다. 이렇게 아프고 속상한 이야기, 그렇게 담담하게 흘러가는 문체, 그리고 박민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나를, 인류를, 지구를 정말로 ‘언인스톨’할 때가 되었거나 박민규가 천재이거나 둘 중에 하나를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왕따와, 인류와, 지구와, 탁구의 이야기 - 내가 당신들을 만난 것에 감사드린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의 왕따라면 내 주위에도 있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이 특별한 인간의 눈 밖에 나 특별하게 정신적으로 다쳤던 아이. 그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을 때, 두려웠다. 다수에서 밀려나는 것은 아닐지, 함께 왕따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내가 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내가 선택한 일은 모두와 친구가 되는 것, 그래서 아무와도 친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다수인 척 할 수 있었고, 항상 소수의 곁에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고 비열한, 아니 사악한 것이었다. 용감하지 못했던 나를 돌이켜 보며 ‘못’과 ‘모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또 말한다. 그 때 나와 그 아이에게도 탁구라는 것이 있었다면, ‘핑퐁’ 대화의 틀을 이용해 소통할 수 있었다면, 나는 좀 덜 사악했을 것이고, 그는 좀 더 든든하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정말 미안해’라는 핑을 날리면 ‘괜찮아’라는 퐁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비겁하고 비열한 나에게 손 내밀어 준 그에게 ‘고마워’라고 핑, 가면 속에서 스스로 왕따하고 있었던 나에게 ‘괜찮아’라고 퐁, 혼자라도 핑. 퐁. 핑. 퐁. 탁구를 친다. 

  왕따에게 주어진 탁구, 그것은 썩 괜찮은 위로다. 가볍고 작은 공은 자신감을 주며, 격하게 부딪치지 않을 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날리는 게임 방식은 그들을 무장해제하게 만든다. 몸이 슬슬 풀리고 호흡이 맞춰지면 ‘핑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그 옛날 미국과 중국마저 그랬던 것처럼. 핑퐁-작지만 밝게 빛나는 공을 통해서 작가는 왕따를 위로하고 싶었던 게다. 차라리 못이면 좋겠다던 ‘못’에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던 게다. 그래서 못과 모아이도 핑. 퐁. 핑. 퐁. 탁구를 친다. 

  ‘지구가 멸망해버리면 좋겠다. 라는 생각은 나도 종종 한다. 아무리 괜찮아 잘 될 거야 나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려도, 잘 될 것 같은 미래나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힘들어졌다. 명품으로 치장을 한 발랄한 부익부와 굶주림으로 밥을 먹는 흐릿한 빈익빈의 세상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이나 행복추구권을 가진다던 사회 교과서의 구절들은 그저 성경 말씀이 된 요즘, 차라리 지구가 멸망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나에게 세상은 누구나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배울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꿈을 꽃 피울 수 있는 곳,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 그런 곳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제도권 교육을 마치고 세상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부익부가 아니면 빈익빈이 되는 세상을 내가 꿈꾸는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열심히 핑. 퐁. 핑. 퐁. 탁구공을 날려보아도 부지런히 핑. 퐁. 핑. 퐁. 탁구공은 돌아오므로, 세계는 듀스 포인트로 변하지 않고 주욱 부익부 빈익빈으로 달려온 것을 모르고 말이다. 

  9볼트짜리 해악을 가진 인간들이, 매수당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왜 사는지도 모른 채 던져진 지구라는 공간은 과연 괜찮지 않은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못’과 ‘모아이’는 왕따를 당하고, 노인은 매수당하기를
기대하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다수인 척 노력하고, 대부분의 인류는 왜 사는지조차 모르며 살아간다. 그러니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혜성을 기다리는 간절함만큼 세계는 부패했으니 역시 듀스 포인트다. 

  그렇다면 선택은 한 가지, 지금껏 지구를 지배해왔던 거대한 시스템을 제거하는 것이다. 선택권은 지금껏 소외되었던, 배제되었던,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못’과 ‘모아이’에게 있다. ‘지금 이대로, 변함없이’를 선택할 만큼 부패하지 않은 중학생 둘은 언인스톨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서서히 언인스톨되고 있다. 공룡이 지구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인류 또한 사라질 것이다.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인해 진행된 지구 온난화,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인한 기상 이변은 그 작은 증거들이며, 인류가 지금 이대로, 변함없는 태도로 세계를 일궈나간다면 그 진행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잘 된 일이라고, 인류가 뿌린 씨를 거두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려니 미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미련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혹시 언인스톨에 반대하거나 지금 이대로의 세계에 애정이 있는 인류가 있다면, 누구라도, 이제라도,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다시 ‘못’과 같은 아이가 나타나 “적응이 안돼요,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잖아요,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 책임일까요,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라고 하며 울지 않도록. 

  그렁그렁, 작은 눈을 가득 채운 눈물이 책을 덮은 지 한참 만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핑. 퐁. 핑. 퐁. 미안해, 미안해. ‘못’과 ‘모아이’, 60억 인류, 그리고 지구에게 미안했다. 그저 다수에 편입되기를 바라며 보냈던 시간들이, 내가 사는 세상은 문제가 없다고 믿었던 세월들이, 그래서 깜빡하고 지냈던 그들이 생각나서 자꾸만 미안했다. 이제라도 핑. 퐁. 핑. 퐁. 탁구를 치며, 대화를 시도하고, 희망을 만들어가겠다. 뭐, 어차피 지구가 언인스톨될 것이라고 해도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왜 살고 있는지, 이 세계는 어찌하면 좋을지 당신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못’과 ‘모아이’와 60억 인류와 지구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 핑. 퐁. 핑. 퐁 - 실버스프링의 핑퐁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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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을 사다 시작시인선 74
성선경 지음 / 천년의시작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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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몽유도원을 사다]를 집다
 

시 - 너무 먼 당신
  진실하고 솔직한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지상 최대의 선(善)이다. 숨기거나 속이거나 빙빙 돌려 어렵게 말하는 것은 비겁하고 알차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자연스레 ‘시’와 멀어졌다. 코찔찔이 초등학생 시절의 의성어와 의태어가 잔뜩 들어간 동시를 읽으며 느꼈던 말의 재미, 수능 공부에 매달리며 읽었던 문학사에 길이 남의 시들을 배워간다는 즐거움, 그런 것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좋은 인상의 전부이다. 동시는 유치해서 싫어졌고,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시험을 치기 위한 암기였기에 부담스러웠다. 수많은 시인들이 많은 생각을 압축해 담아 놓은 시어들도 무거워 보이기만 했다. 시는 원래부터 나와는 피부터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일종의 브랜드 소품처럼 여겨졌다. 생각을 함축하고 고운 언어로 정제하는 작업을 하는 그들의 손은 논일과 밭일로 거친 손을 갖게 되는 내 아버지의 손과는 너무도 동 떨어진 것이었다.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즐거움 - 그런 생각이 들수록 시는 나에게 너무 먼 당신이 되어갔다.


시집(몽유도원을 사다)을 집다
  ‘몽유도원을 사다’는 우연한 기회에 나와 인연이 닿았다.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찾다가 주황색 표지와 인상적인 제목을 보게 되었다. 마침 찾던 책이 대출 중이었고 빈손으로 대출실을 나오기가 뭣해서 아까 그 제목의 책을 대출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을 사다’였다. 얇고 가벼워서, 주황색 표지가 썩 마음에 들어서 별 거부감 없이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 때까지도 시는 여전히 나와 먼 당신이었기에 큰 기대 없이, 빌려 온 책이므로 읽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그렇게 글을 읽어나갔다. 

 
  “나는 내 詩에서 간자반처럼 소금기가 느껴지길 원한다. / 내 살아온 날들의 눈물과 땀과 소금발의 냄새가 / 간자반처럼 짭짤하게 느껴지길 원한다. /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 육 남매의 맏이로 /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눈물처럼 / 안개처럼 은은하게 번졌으면 좋겠다. / 가끔 산다는 것이 땅강아지같이 느껴질 때 / 살맛이 없어 입맛조차 잃었을 때 / 문득 그리워지는 간자반처럼 / 문득 그리워지는 바다처럼.”

   서문을 읽고 마음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내가 그토록 멀리 여겼던 시라는 것이 내 마음 아주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각 시어들에 또 어떤 함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고, 문학적인 표현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런 것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글을 봤겠지만, 분명 내 마음이 찌릿, 시인과 통하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간자반의 소금기’라는 것, 시인이 살아왔을 삶이라는 것,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시’라는 것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 - 어쩌면 더 진솔한 당신
  사실을 사실로 구구절절하게 기록하는 것이 진실이라 믿었던 내 생각은 성선경 씨의 시를 만나면서 깨졌다. 그의 글은 지금까지 가졌던 우아하고 고귀한 인상의 시가 아니었다. 생활을 소재로 삼았고 그 속에서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정서를 표현했다. 그렇다고 감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사랑 타령이나 버터 잔뜩 발린 허위의 탈도 보이지 않는다. 불혹의 나이를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하고 솔직한 심정들이 시 속에 고스란히 녹아 읽는 족족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고 있었다. “내 마음의 무릉도원 한 세트”를 사 들고 온 가장의 모습, 아내와의 싸움에서 “내 가슴 속에 사는 부처님”을 느끼는 어른, 아내와의 사소한 다툼에서 “그럼 나는 무어냐” 질문하는 남자, 감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는 아들 등 인생이 하나씩 묻어 있는 글들을 보고 시가 얼마나 솔직한 문학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구구절절 풀어 쓰지 않아도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참 멋지지 아니한가. 시란 어쩌면 더 진솔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시 - 이제는 멀지 않는 당신.
  다행스럽다, 이제라도 시와 조금 가까워진 느낌을 지니게 된 것이. 시인의 바람처럼 시집에서는 간자반처럼 짭잘한 소금기가 느껴진다. 그가 살아온 세월들도, 앞으로 살아갈 모습들도 간자반처럼 짭잘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그가 참 좋아 보이는 것은 맘에 품고 있는 따뜻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올리며 쓴 글들과 앞으로의 자신의 다짐을 쓴 글들이 그를 증명한다. 참 좋게 보이는 사람이 쓴 참 좋은 글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짭잘한 간자반을 보면, 달콤한 황도를 보면 이 따뜻한 글들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글을 통해 자신을 내보인다는 것, 그것만큼 투명한 것이 없다고 한다. 시는 짧고 압축적이라 그 정도가 가장 덜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다른 글들이 얇은 천이라면 시는 실오라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진실하고 솔직한 시와 자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는 기쁨을 알게 된, 시집을 집어 들었던 그 날에 나는 '몽유도원'으로 가는 티켓을 집었다. 몽유도원이 따로 있던가, 여유롭게 누워 진솔한 글 한 편 만날 수 있으면 그 곳이 바로 몽유도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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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아침
이경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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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누구에게도 아름답거나 충만하지 않다.
오히려 젊음은 우리 모두에게 미숙한 지혜, 불안한 미래, 가난한 일상을 선사할 뿐이다. 그 시기의 사랑 역시 결핍과 오류와 허상으로 빚어진다. 훗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젊은 날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 과오나 악행에 대해 알아차리게 된다. [천 개의 아침]에는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의 과정이 공감할 만한 서사 구도를 통해 묘사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용서하고, 그 시절의 상대방과 화해하고, 사랑의 한 과정을 마무리 짓는 여정이 세밀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 된다. 

- 김형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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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글이 표지에 써 있는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아름답거나 충만하지 않은, 모두에게 미숙한 지혜, 불안한 미래, 가난한 일상을 선사하는 '청춘'의 중후반 즈음에 서 있는 내가 그 청춘을 지난 이의 글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었다.

읽으면서 궁금증은 일종의 연민으로 변했고, 가슴 한 구석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나와는 거리가 있는 그들의 삶이기에, 다행이도 소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박정환의 한 많은 청춘과 최수영이라는 가여운 청춘이 만나 사랑이라는 것을 하더라. 오해와 이해를,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함께 있음을 행복이라하고 사랑이라 하면서 불행한 시간을 따뜻하게 보내려 하고 있더라. '사랑이 사치인 존재', 그들이 참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작가의 말에도 있듯 이 글은 작가를 위로하기 위해 쓴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듯하며, 읽고 난 뒤 마음이 헛헛해진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보내기때문에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좀 더 참신한 문체나 특별한 소재의 글이 좋다. 징징거리는 옛날 연애는 좀 진부하지 않은가.

글이란 독자에게 힘을 주는 것이었으면 한다. 장르가 어찌되었든, 무슨 이야기가 되었든 읽고 나면 머리에 한참 동안 남아서 울리고 있을 큰 힘을 지닌 것이 되었으면 한다. 삶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도, 보기에 따라 또 쓰기에 따라 다른 의미를 발산하는 액체성 개념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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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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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호떡, 그리고 김치볶음밥 


  달달한 향내 풍기는 호떡, 길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느리게 만들며 결국은 노릇노릇 예쁜 모습으로 그들의 손에 들리게 되는, 고마운 호떡이 생각난다.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날들.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던 때, 우연히 코를 자극하던 호떡에게 이끌려 한 입 베어 먹고는 참말로 달콤한 잠을 자게 되었다. 수면제가 아니라 호떡, 거창한 메뉴가 아니라 호떡, 그래서 더 고마웠다.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입이 잠시 즐겁자는 마음으로 베어 물었던 호떡이었기에 고마웠다. 나에게 ‘분홍 리본의 시절’은 그런 호떡 같은 소설집이다.

 

  ‘분홍 리본’이라는 고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꽃 그림의 표지를 가진 책. 신간 도서 한 켠에서 달달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분홍이라는 글자가 풍기는 감정도, 권여선이라는 작가도 낯선 존재들이었으나 이미 그 달달한 향내와 노릇노릇 예쁜 모습은 내 손에 있었고 기대 이상의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했다. 책 속에서 손이 나와 ‘너는 그대로 괜찮으니, 힘을 내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7개의 단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결핍되고 어딘가 모자란 이들이었다. 보통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전형성을 가지거나 특출한 개성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과 평범한 외모, 혹은 건강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가진 그들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어떤 건강하지 못한 부분들을 닮아 있었다. 

 

  ‘가을이 오면’의 로라는 상상력과 독창력이 부족하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이다. 엄마의 의지로 우아함을 가장하며 살고 있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그 옷에 대한 거부감이 가득하다. 우연히 나타난 남자의 사랑으로도 그녀의 콤플렉스는 치유되지 못한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어떤 이에게 다가갔다가 ‘학을 떼겠’던 경험이, 나에게 다가섰다 스스륵 물러났던 어떤 이의 기억이 로라의 존재를 가깝게 여기게 해주었다. 어쩌면 로라처럼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상처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가 유난히 가슴을 후벼 파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로라와 비슷한 우리가 보이지 않는가? 

 

 ‘분홍 리본의 시절’을 살고 있는 주인공은 벗을 고르는 데 까다롭다.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지내는 바엔 혼자 지내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그런 그에게 생긴 벗은 선배와 선배의 부인. 그들과 함께 보내는 부르주아적 생활, 색깔로 치면 곱고 매력적인 분홍이라 하겠다. 그녀에게 있어 참 좋은 날인 것 같았다. 그러나 선배도, 선배의 부인도 껍데기를 벗기니 공허하고 외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에 붙어 즐거웠던 그녀가 가장 공허한 존재이리라. 웃고 있다고, 대화하고 있다고, 별 볼일 있어 보인다고 모두 알찬 것이 아닌 삶, 그래서 아무리 비루한 인간이라도, 잘난 인간이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절을 묶은 분홍 리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리본이 묶고 있는 시절이다.

 

  ‘약콩이 끓는 동안’ 죽어 간 윤 양이 바라 본 교수와 가정부와 교수의 아들들이야 말로 인간 기저에 흐르고 있는 지저분한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죽은 듯 살고 있는 교수의 히스테리, 그 교수에게 붙어 무엇이라도 얻어 가려는 아들 둘,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살까, 싶은 가정부. 참, ‘인간이란 동물의 일종이었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연민이 생기는 존재들이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어찌 이리 비루한가, 소설이 한낱 소설이 아니다. 

 

  ‘반죽의 형상’은 같은 반죽으로 나누어 만든 두 개의 형상처럼 하나는 살찌고, 하나는 말라 가는 친구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굉장히 소중하고 가까우면서도 늘 질투심의 대상이 되는 친구가 있게 마련이다. 가깝고 소중하기에 나를 포기하고, 그러기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는 사람. 그가 늘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만 잘 되면 어떡하나를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한 거리 설정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안 순간부터 인간이 멸망하는 날까지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문상’을 가야 하는 우정미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머릿속을 보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우정미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고민했다.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부끄럼 없이 궁금한 것들을 쏟아 내고 부담 없이 친근함을 표시하는 우정미라는 여자.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누구든 우정미가 될 수 있다. 주인공의 머릿속에 우정미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존재지만, 그런 속내를 보이지 않고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그녀는 그를 다른 어떤 것으로 오해하기 충분하잖은가. 진저리남을 표현할 수 없는 인간과 자신의 진저리남에 대해 모르는 인간, 그래서 또 비루한, 또 미워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쫄깃한 놈도 있고 아삭한 놈도 있으니까 더 맛있지?”

  ‘가을이 오면’의 남자가 로라에게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주며 했던 말이다. 처음에 김치를 반만 볶고 나중에 남은 반을 볶는 이유이기도 했다. 책을 읽은 후 한 동안 머릿속에 저 말이 맴돌았다. 쫄깃한 놈, 아삭한 놈이 함께 들어 간 김치볶음밥이 더 맛있듯 다양한 인간이 모여 살아야 더 좋은 세상이 아닐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다 갖춘 사람이 더욱 멋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작가는 각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가진 모습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쫄깃하고 아삭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이 꼭꼭 숨기고 있는 어떤 비루한 모습을 끄집어냈다. 그 결과 어려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했다. 달달한 향내 풍기는 분홍 리본으로 싸인 책을 펼치는 순간 그 비루함에 마음 아플 것이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위로를 선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인간이 없듯이 완전 문제인 인간도 없다고, 그러니 당신은 괜찮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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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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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이상 문학상 수상작 작품집 제일 마지막에 실렸던 글이다. 대상에 대한 찬사가 가득했고, 대상을 받은 작가의 말도 감격스럽게 올라와 있었지만 나를 울린 것은 [침이 고인다]였다. 학원 강사를 하는 주인공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엄마에게 버림 받은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찬란한 청춘이라는 슬픈 이십대를 보내고 있는 가엾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제 몫을 하기는 어려워진 세상, 그리고 버림 받는 것에 익숙해진 젊음. 김애란의 글에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안타까운 젊음에 대한 그림이 있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만큼 자세하고 진실한 심리의 묘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서울 주변부에서 '지나가는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간절한 하나의 공간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펑펑 울어버리면 꿋꿋이 견디고 있는 저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지만 마음이 자꾸 아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고였다.

이런 위로, 저런 격려보다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훨씬 고마울 때가 있다. 김애란의 글은 언제나 담담히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비춘다. 슬픔을 슬픔 같지 않게, 그래서 더 많은 눈물이 고이도록. 그래서 나는 김애란의 글이 좋다. 앞으로도 따뜻한 시선과 정갈한 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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