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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선가 신경숙은 회색빛 작가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녀만의 세상에 지그시 던져지는 삶의 시선, 그 시선은 하얀색의 밝은 이미지도 아니지만 검은색의 어둡기만 한 이미지도 아닌, 희뿌옇고도 희미한 회색의 시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의 진위를, 그 말의 속을 까집어 준 책, 진정 신경숙 작가의 색채가 무엇인지 드러내준 책이 종소리다.
종소리의 모든 단편 작품들 속의 세상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모두가 하나같이 세상에 시달려 힘 빠진 날개를 축 늘어뜨린, 자기 둥지를 잃고 방황하는 새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런 자신을 방황의 구렁텅이에서 올려다 줄 밧줄조차 자신 밖에는 없는 상황. 극히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희망적이지도 않은, 오히려 체념적인 삶의 색채가 작품 전반에 나직히 깔리운다.
우리의 시대는 참으로 각박해졌다. 누가 뭐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 모습일 게다. 옛날의 인간다운, 정다운 모습들은 현대라는 광산 안에서는 캐내기가 너무나 힘든 귀한 광물이 되어 버린지 오래고, 서로서로 도우며 사람 人자의 그 모습을, 그 의미를 되새기던 때는 사라지고 오로지 믿을 사람이라고는 자기자신, 아니 이내 자기자신조차 믿기 힘든 사회가 현재이고 그 곳이 우리가 웃고 떠들며 살아가고 있는 장소이다.
즐거워 보이기만 한 이들 속에 풍겨나오는 행복감. 그 행복감이 텅 빈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 텅 빈 행복감. 알맹이 없는 행복은 여기 종소리에서 체념적 행복감으로 나타난다. 자기자신의 의지를 뛰어넘는, 인간의지로써도 극복하기 힘든 그 세상의 각박함. 그 속에 이제 작품의 인물들은 체념적 만족을 느끼우면서 현실이라는 수레를 끌고 나간다.
보통 우리들은 밝은 이미지의 소설을 주로 보아 온다. 과정은 밝지 않더라도 그 끝은 고진감래인 작품들을 수두룩하게 보아왔고, 그것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진정 삶의 뒤안처는 놓치고 온 기분이다.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들. 하지만 그 웃음소리 끝에 남겨지는 텅 빈 허무감이 서서히 쌓여 왔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느껴지게 된다.
신경숙의 종소리. J이야기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작품이었지만, 이 책 한 권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이미지를 제대로 나타내 주는 게 아닐까 한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내용. 술술 읽히지만 마음만큼은 경솔히 촐싹거리지 않는다.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중고등 학생이 읽기에도 무난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괜찮은 작품이다.